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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 2 -블러디 메리-

우리는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군주제가 보편적이던 시대가 저문지 아직 1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자를 선거로 뽑았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로마의 공화정 시대를 예외로 하면 유구한 인간의 역사속에서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던 시대가 더 오랜시기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역사속에서 성군이라 불리는 좋은 왕과 폭군이라 불리는 나쁜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왕이 존재합니다.

그런 왕들의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고자 합니다.

 

글머리에

이글에서는 현재의 영국(United Kingdom) 즉,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영국이라 칭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잉글랜드로 표기하였습니다.

 

1544년의 메리 1세

출처 : Wikipedia

 

오늘의 주인공은 잉글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메리 튜더) 입니다.

 

메리 1세는 1553년 7월 19일에 즉위하여 5년 남짓한 재위기간을 보내고 죽기 하루전에야 이복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 하고 1558년 11월17일 숨을 거둡니다.

그녀의 죽음에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새 여왕인 엘리자베스를 열렬히 지지 합니다. 그녀가 죽은 날은 이후 200년동안 압정에서 해방된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그녀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지고 공포와 압제자의 이미지로 남게되었을까요?

 

 

출생

 

메리 튜더는 헨리 8세(헨리 튜더)와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헨리 8세는 튜더 왕조의 두번째 왕으로 두명의 왕비를 처형하고 세명의 왕비를 내쫓은 사생활에서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난봉꾼으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궁정은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으며 직접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는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노름꾼에 무예,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으며 병기개발에도 힘써 최초로 포문이 달린 대형 전투함인 위대한 헨리호를 진수하기도 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프랑스를 공격하여 스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 시켰고 스코틀랜드 제임스4세의 잉글랜드 침공시에는 플로덴필드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제임스4세를 전사시키고 오히려 스코틀랜드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웨일즈를 완전히 병합하였고 영국사의 중요한 장면인 종교개혁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혼을 위해 종교까지 버린 왕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종교개혁은 그 이혼이 빌미가 되긴 했어도 실제로는 더 복잡한 내막이 존재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도 차후에 다룰 예정인 복잡한 양면성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미드 튜더스의 메인 케릭터이기도 했던 헨리 8세

출처 : Wikipedia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저 유명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에스파니아, 스페인)의 공동 통치자인 여왕 이사벨1세와와 페르난도2세의 사이에서 태어난 명문 왕가의 딸입니다. 원래는 헨리 7세의 장남 웨일스 공 아서와 결혼을 하였으나 혼례도 치르기 전에 아서가 요절하고 합니다. 원래 에스파니아의 힘을 빌리고자 한 정략결혼 이었으므로 이후 아서의 동생인 헨리 8세와 약혼하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헨리 7세의 사망 후 헨리 8세와 결혼하여 정비가 됩니다.

 

이처럼 메리 1세는 출신 신분상으로 잉글랜드 왕가와 당시의 유럽의 슈퍼 파워로 떠오른 에스파니아 왕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무엇하나 빠질데 없는 명문출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라곤의 캐서린

출처 : Wikipedia

 

불우했던 어린 시절

메리 1세는 헨리 8세의 외동딸로서 한때 웨일즈 여공작(Princess of Wales)의 작위를 가졌습니다.

웨일즈 공작의 작위는 현재의 영국여왕 엘리자베스2세도 가졌던 작위이며 여왕 즉위후에는 찰스 황태자가 웨일즈 공작  (Prince of Wales) 작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웨일즈 공작은 흔히 황태자(또는 왕세자)로 번역되기도 하며 영국의 제1 왕위계승자가 가지던 직위 입니다.

 

 

현재의 웨일즈 공작(Pince of Wales), 찰스 황태자

출처 : Wikipedia

 

즉 그녀는 한때 헨리 8세의 계승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이혼을 인정하지 않던 로마 카톨릭을 버리고 종교개혁

(이후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벗어나 성공회 와 신교 중심의 국가가 됩니다)을 밀어붙이면서 까지 메리 1세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블린과 결혼 하면서 그녀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그녀는 앤 블린에 의하여 왕의 사생아로 신분이 격하 되었으며 한때는 앤 블린의 딸인 엘리자베스(후에 엘리자베스1세)의 시녀로서 봉사하도록 명 받는 굴욕을 겪습니다.

잉글랜드 왕의 계승자에서 어머니의 시녀였던 여자(물론 앤 블린도 귀족 출신 입니다)의 딸을 보좌하는 신분의 추락과 굴욕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한때 외동딸인 그녀를 귀여워 했던 아버지 헨리 8세의 냉담함은 어떤 상처가 되었을까요?

 

이때의 굴욕과 원한때문인지 그녀는 이복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평생 미워합니다.

 

 

1546년 경의 엘리자베스 튜더 (후에 엘리자베스 1세)

출처 : Wikipedia

그녀 역시 이 시리즈 후반에 다룰 생각 입니다. 이 가족들은 정말 이야기 거리가 풍부한 가족 들입니다.

 

권력은 10년을 가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메리 1세의 어머니를 밀어내고 왕비가 되었던 재치있고 출세욕이 강하던 앤 블린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고 공교롭게도 자신의 시녀인 제인 시무어에게 헨리 8세의 마음이 옮겨가면서 불륜, 이단, 모반의 누명을 쓰고 참수되고 맙니다.

(천일의 앤이라는 영화가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입니다. 그녀가 쟁취한 권력은 겨우 천일도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위기들을 겪으면서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와 마찬가지로 사생아로 신분이 격하된 삶을 살게 됩니다. 더구나 자신을 싫어하는 메리 1세의 견제와 감시를 받기 까지 합니다.

 

비슷한 불행을 격은 두 이복 자매는 후에 모두 여왕이 되어 한 사람은 블러디 메리(Bloody Mary)로 불리우며 두려움과 압제의 상징이 되고 한 사람은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상반된 치세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둘의 상반된 점과 공통된 점은 메리 1세의 경우는 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거의 명목상의 남편인 에스파니아 왕 펠리페 2세에게 아내로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고 남편의 아이를 갖기를 소원 했습니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처녀 여왕(The Vergin Queen)  이라 불렸고 "과인은 국가와 결혼 하였다"라고 할만큼 여자로써의 삶을 포기하고 정치와 국정에 전념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왕 즉위

헨리 8세는 앤 블린을 참수 까지 하면서 아들을 원했는데 마침내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무어와의 사이에서 에드워드 튜더(에드워드 6세)가 태어 납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소원을 충족시켜준 제인 시무어는 에드워드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합니다.

이후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6세는 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약 5년간의 치세 후 16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에드워드 6세

출처 : Wikipedia

 

에드워드 6세는 어릴때 부터 매우 병약 했지만 지성이 높고 이해력이 놓았다고 합니다. 오래 살아서 성인이 되었다면 좋은 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유력 귀족들이 왕국의 실권을 잡았고 짧은 치세의 후반은 병석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번외로 이야기 하자면 이 소년왕 에드워드 1세가 후에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에 등장하는 왕자 입니다.

 

에드워드가 죽기 전 잉글랜드는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호국경으로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병약한 왕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 본 그는 권력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길드포드 더들리를 에드워드의 오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키고, 병석의 에드워드를 설득해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내용의 유언을 남기게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교정책을 펼쳐 성공회를 뿌리내리게 한 에드워드 6세가 열렬한 카톨릭 신자인 메리 1세를 의도적으로 계승자에서 배제하려고 했다는 설 도 있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

출처: Wikipedia

 

결국 제인은 에드워드 사후 존 더들리에 의해 16세의 나이로 여왕에 즉위 합니다.

원래의 왕위 계승권자 1순위 였던 메리 1세는 존 더들리가 자신을 유폐하려는 것을 알고 서포크 지방으로 달아나 몸을 숨김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왕의 친척에 불과한 제인 그레이보다 에드워드의 누나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특히 불행한 시기를 보낸 메리 1세에게 민중의 동정심과 지지가 몰려 있었습니다.

또한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권력을 유지하려는 존 더들리의 노골적인 야망에 반발한 귀족과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메리 1세를 옹립하여 런던으로 입성하자 제인 그레이는 단 9일간의 짦은 치세를 마치고 처형 당합니다.

 

그녀는 겨우 16세의 소녀였고 정권유지를 위한 야욕과 부모인 그레이 후작 부부의 욕심에 희생되었던 터라 많은 동정을 받았습니다.

여왕에 즉위한 메리 1세도 제인 그레이를 살려주고 싶어했던듯 합니다.

 

하지만 한번 여왕으로 즉위 했던 제인 그레이는 신교 반란 세력의 상징으로 이용될 수 있었으므로 메리 1세의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1세는 제인 그레이가 카톨릭으로 개종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만 제인 그레이는 신앙을 지키며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메리 1세는 혹시 제인 그레이가 임신 했다면 당시의 관습으로 사형이 면제되거나 연기되므로 임신 여부를 확인케 하는 등 그녀를 살리려고 노력한 모습을 분명히 보입니다.

반면 이복 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카톨릭교도로 위장하여 메리 1세에게 충성맹세를 함으로써 목숨을 건집니다.

 

정말 그녀가 별명과 같이 잔인한 권력자 였다면 동정심을 가졌던 제인 그레이는 물론 원래 부터 미워했었고 왕권을 위협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복 동생(엘리자베스)을 살려두지 않았을 게 분명 합니다.

 

신교도 탄압과 친 에스파니아 성향으로 일관한 치세

메리 1세는 즉위 후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2대에 걸쳐 진행되어온 신교정책을 뒤엎어 카톨릭으로 복고를 선언하면서 성공회 주교들과 개신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3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녀로서는 오랫동안 참아왔던 아버지와 동생의 치세를 지나 마침내 복수의 칼을 빼든 셈 입니다.

많은 신교도들이 탄압을 피해 국외로 달아나야 했으며 치세기간 일어난 신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탄압과 살육이 있었습니다.

 

메리 1세는 열렬한 로마 카톨릭교도인데다가 그로인해 당연히 자신의 외가이며 카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에스파니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아들인 필리페(후에 필리페 2세)라는 미남 왕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때 필리페의 나이는 27세로 당시 38세이던 메리와는 11살이 차이가 납니다.

 

두사람의 나이를 보아도 짐작하시겠지만 에스파니아와 미남 왕자였던 필리페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정략 결혼 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1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메리와 보내고 귀국하여 필리폐 2세로 에스파니아 국왕에 즉위합니다.

 

즉 필리페 2세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현재의 독일지역인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일부 에스파니아와 플랑드르지방 및 배우자인 메리 1세로 인하여 잉글랜드의 공동 국왕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메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았거나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어 필리페2세의 적자가 되었다면 이 아이는 아버지의 기존 영토에 잉글랜드와 웨일즈, 아일랜드를 포함하여 다스리는 제국의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결혼은 에스파니아로서는 프랑스을 압박할 수 있는 잉글랜드라는 동맹을 얻게 되고 그에 따른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사실상 잉글랜드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메리는 남편에 대한 의무와 친 에스파니아적 성향으로 에스파니아와 프랑스간의 전쟁에 휘말려 대륙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잉글랜드령인 칼레를 상실하게됩니다. 이러한 친 에스파니아 정책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이득 없이 에스파니아의 각종 전쟁(주로 종교전쟁 및 패권 유지를 위한 전쟁)에 휘말려 이용 당하느니 차라리 반 에스파니아 정책으로 에스파니아에 맞서 그들이 가진 부와 무역로, 식민지를 빼앗는게 더 국익에 도움이 되었을 터였기 때문 입니다.

 

이는 후에 엘리자베스 1세의 반 에스파니아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유럽의 2류 국가였던 잉글랜드가 대영 제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그러한 정책이 옳은 방향이라는게 증명 됩니다. 하지만 메리 1세는 자신의 출신과 종교의 기반이 되는 에스파니아에 변함없는 지지를 하였으며 겨우 1년남짓 같이 생활한 이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로써의 의무를 다한듯 보입니다.

메리1세는 필리페 2세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으나 난소 종양으로 인하여 아이를 갖지 못했고 결국 난소암으로 사망합니다. 

 

말년의 메리 1세

출처: Wikipedia

 

블러디 메리

제 생각에는 그녀가 블러디 메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첫번째는 앞서 제인 그레이나 엘리자베스의 사례에서 보면 그 다지 잔인한 성품이 아님에도 열렬한 카톨릭 교도로서 행한 종교적 탄압과 처형 때문이 가장 큽니다.

이는 후대의 엘리자베스가 성공회 교도로써 여왕이 되어 일부 구교에 대해 탄압이 없지는 않았으나 르네상스적 사고를 가지고 비교적 종교정책에 관용적이었던 부분과 대비 됩니다.

앞서 언급했던 종교관으로 인해 친 에스파니아 정책을 견지 한 부분도 메리가 카톨릭 교도이기 때문으로 포함될 수 있을듯 합니다.

 

두번째는 그녀가 절대군주로써 추밀원이나 귀족들과의 협조를 통해 통치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공포 정치를 행했다는 입니다.  이 부분 역시 절대군주로써 권위를 드러내긴 했지만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고 추밀원과 집단 리더쉽에 가까운 정치를 한 엘리자베스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세번째는 이후 잉글랜드 역사의 지배자들이 신교도이며 반 에스파니아 정책을 펼친 사람들이기 때문 입니다. 만약 이후의 영국이 카톨릭 국가로 남았다면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승리한 사람들의 기록이기 때문 입니다.

 

개인적으로 덧 붙이자면 결국 그녀는 잉글랜드의 통치자의 삶보다 카톨릭 교도로써, 비록 완벽하게 이루지는 못했지만 필리페 2세의 부인으로써 자식을 가진 여인으로써의 삶을 살고 싶어 했기 때문 이라 생각 합니다.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긴 튜더 왕가의 4번째 왕이자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메리 1세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고자 합니다. 못다한 이야기와 내용들이 있지만 추후 시리즈에서 다시 다룰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때 나머지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개인적인 지식 부족으로 잘못된 내용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리즈 이전글:

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 1 -세종대왕 편-

 

참조 :

Wikipedia 메리 1세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블크먼-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 -이원복-

https://blog.naver.com/puxlius?Redirect=Log&logNo=140050078380

https://bodhipoliticsociety.blogspot.kr/2012/10/1_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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