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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조선의 가장 무능했던 왕 인조 1, 인조 반정

21 번째 왕이야기는 제가 참고한 도서에서 "단언컨데 가장 완벽한 최악의 군주" 라고 까지 혹평한 조선의 16대 왕 인조 입니다.

 

이 인조를 시작으로 자식을 죽여야 했던 세 사람의 왕이야기를 연속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 첫번째는 인조이고 두번째는 이반 뇌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세자를 굶겨 죽여야 했던 영조의 이야기를 쓸까 합니다. 그 첫번째인 인조는 글쓴이가 봐도 이 셋중 가장 무능하고 열등감을 가진 사람으로 이런 인물이 리더의 자리에 있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인조는 저 유명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선의 역사상 성공한 반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 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 입니다. (세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 처럼 직접 왕을 바로 몰아낸 것이 아닌 경우 제외) 이 2회의 성공한 반정의 2번째 주인공이었던 인조, 그는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남한산성에서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의 "홍타이지" 즉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우리 역사의 치욕의 순간을 직접 경험한 왕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아들을 살해하고(독살설) 며느리를 사사해야했던 굴곡 많았던 그의 삶과 생애를 한번 살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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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조가 등장했던 드라마는 2 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바로 JTBC에서 연기자 김현주씨가 소용 조씨로 분해 연기 포텐을 폭발시켰던 "꽃들의 전쟁" 과 아직 방영중인 퓨전 사극인 "삼총사" 입니다.

 

인조 반정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 역할의  "이덕화" 출처 : JTBC

 

인조 반정

삼총사의 인조 역할 "김명수"

출처 : TVN

 

인조의 가계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인 정원군 입니다. 서자의 손자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왕이 되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진 가계 입니다.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 감씨 사이의 소생에선 3번째 아들입니다. 인빈 김씨는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와 함께 선조의 후궁에서 또 다른 꽃들의 전쟁을 치룬 여인들 입니다. 공빈 사후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녀의 아들 신성군은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다투며 그 지위를 가장 위협하기도 했던 아들 입니다.

 

인조 반정

인조의 할머니인 인빈 김씨(한고은 분)는 "불의 여신 정이" 에서 광해군의 적수로 등장했습니다. 그녀는 드라마에 비친 것 처럼 야망도 컸지만 뛰어난 처세술과 지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초반 신성군과 함께 광해군을 위협한 적수에서 적통인 영창 대군이 태어난 후에는 광해군에 가장 우호적인 세력으로 변신하여 과 선조와 광해군 사이를 조율하며 자신의 자식들의 목숨을 보장 할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imbc

 

인빈 김씨는 신성군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신성군이 임란중에 병사하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통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현실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꿈을 접고 한때 적대적이었던 광해군쪽으로 말을 갈아 탑니다. 그 덕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목숨을 잃는 피바람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을 무사히 보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도 탄탄하게 구축해 두었는데 병사한 신성군은 탄금대에서 목숨을 잃은 신립 장군의 사위였습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장인은 강직하고 명망 높은 "구순"의 손녀였습니다. 이 결혼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인빈 김씨의 오래비인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여동생을 믿고 여러가지 세도를 부리다가 구순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에 김공량이 인빈을 찾아가 하소연 하고 구순을 험담하자 오히려 인빈은 선조를 설득해 구순의 손녀를 자신의 셋째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명망 높은 구순을 인척으로 맞아들입니다. 아마도 그의 오래비 김공량은 상당히 머쓱 해졌을듯 합니다. 그녀의 이러한 대범한 처세술과 자신의 아이들과 조정의 주요인물들과 맺어 놓은 인척관계를 보면 그녀 만큼 권력의 성격을 잘 이해한 궁중 여인도 없었는듯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인조 반정의 주역은 신립 장군의 후손들과 구순의 후손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정원군은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세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인 능양군이 바로 훗날의 인조 입니다. 능양군의 뒤를 이은 동생들인 능원군과 능창군은 일찍 세상을 떠난 정원군의 형들인 의안군과 신성군의 양자가 되어 그 가계를 잇게 하였습니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에 대한 평가는 "인조실록" 과 "선조실록"에  서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합니다. "인조실록"에서는 당연히 정원군과 능양군(인조)는 어린시절 부터 비범하고 출중하여 선조의 사랑을 받고 왕이 될 조짐들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필자는 "선조실록"의 기록들에 조금 더 더 신뢰가 갑니다. "선조실록"에서 정원군은 임해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망나니 아들 3명중 한명으로 일컫어 집니다. 임진 왜란 당시 일본군과 내통하여 밀거래를 하여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고 지방에 행차하며 막대한 금품을 약탈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 했다고 합니다. 이런 망나니짓을 하고도 무사할수 있었던 것은 단지 선조의 총애를 받은 어머니인 인빈 김씨와 그녀가 쌓아둔 인맥과 처세 덕이었습니다.

 

인조 반정 이전

능양군(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의 배려를 통해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에게도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5, 6세 때는 선조가 품안에 두고 번거러워 하지 않고 귀여워 했다고 하니 그의 어린시절은 궁궐에서 사랑받으며 행복한 시기를 보낸것 같습니다. 선조가 별세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는 정원군을 따라 경희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인렬왕후가 되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린 후에는 사저에 분가하였습니다. 18세에는 맏아들인 소현세자를 얻습니다.

 

광해군의 치하에서도 인빈 김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탈했던 그 자식들도 그녀의 사후에는 신경희의 옥사(1615년)로 일컫어지는 사건을 맞아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던 동생인 능창군이 유배를 당하고 자결 하게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실제로는 목을 매어 자결 하도록 강요되어 살해 당했다고 합니다.) 이는 수안군수 신경희가 획책하던 모반에 추대되었다는 고변을 받은 광해군이 역모의 수괴로 능창군을 강화로 유배하여 살해한 사건으로 이후 광해군은 정원군과 능창군의 집을 빼앗고 그자리에 인경궁을 짓습니다. 아들을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인조의 아버지)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으로 4년동안 화병으로 자리를 보전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정원군의 아내였던 구씨 부인은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위해 친정 식구들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반정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역사 이야기를 좋아해서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다보면 남자들이 전면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그 뒤에 남성들 못지않은 강단을 지닌 여성들이 있는것을 보게되는것 같습니다.

 

죽은 신성군이 신립의 사위였으므로 신성군의 양자인 능창군의 죽음에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도 가담하여 구씨의 친정 오빠인 구굉과 함께 반정의 주축 세력이 되게 됩니다.

 

이는 무인 세력과 여러 인물들의 가담을 불러오게 됩니다. 구인희,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 이괄등의 인물들이 반정에 가담하게 되었고 광해군이 인목대비 유폐라는 유교적 사상하에 패륜이라는 최악의 악수를 두면서 당파를 초월한 사대부 전체와 적대하게 되자 이를 주요 명분 중 하나로 삼아 광해 15년(1623년) 3월 12일 밤 마침내 거사를 일으켜 능양군(인조)이 몸소 무장하고 일가 친척들이 수장으로 있는 군사들을 직접 이끌고 새벽에 궁궐을 들이치게 됩니다.

 

인조 반정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반정"에서의 인조(이덕화 분), 출처 : JTBC

 

인조 반정

사실 반정이 누설되었다는 소문으로 초기 군사를 이끌기로 한 김류는 집에서 두문불출 하다가 이괄의 설득으로 합류하는 등의 혼란이 있었고 그 전 해인 1622년에는 계획이 누설되어 이귀, 신경진이 거사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있기도 했으나 너무나 많은 역모, 고변, 국문등에 진력이 난 광해군은 이러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가 결국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왕위를 잃게 됩니다.

 

거사의 그날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궁궐의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비교적 손쉽게 반정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정군이 궁안으로 진입하자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이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사로잡혀 왕자의 신분인 "군(君)" 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 되었습니다. 광해군 정권하의 세력가이던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을 비롯한 고관대작 40여명이 참수되고 숙청되어 귀양을 간 사람이 200여명에 달했습니다.

 

조정의 고관 대신이 40여명이나 참수되는 일은 사실 연산군 때의 사화에서도 없었던 일로 인조와 반정세력의 광포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쿠데타나 반정에서 반대파를 완벽하게 압살할 수 있었던 경우의 드문 사례가 된 인조반정은 그 여파로 그 후의 조선의 외교나 정책이 일방향으로만 향하게 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반정의 주요 명분중 하나가 인목대비의 폐위와 유폐였으므로 반정군은 인목대비를 복위하고 그녀의 교서를 받아 인조를 즉위시키는 형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 명분일뿐 인조 즉위후에는 인목대비는 크게 예우 받지는 못하고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맙니다. 또한 논공 행상에서 공정하지 않아 내부적인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는 앞서의 반대세력을 철저히 제거 할수 있었던 부분과 맞물려 인조의 치세가 순탄하지 않게 흘러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왕이 될수는 없었을 서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약점 또한 인조의 왕위를 치세 내내 위협하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와 인조의 할머니인 인빈 김씨는 살아서 선조의 총애를 가장 치열하게 다툰 여인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공빈 김씨가 승리자 였고 비록 산후병으로 일찍 목숨을 잃긴 했지만 그녀의 아들 광해군은 결국 왕이 되었습니다.  공빈 김씨가 죽은 후에 총애를 얻었던 인빈 김씨는 결국 그녀의 손자인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첫번째 꽃들의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인빈 김씨라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오늘은 인조의 삶에서 인조 반정이 일어나는 이야기까지 다루어 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인조 반정 이후의 반란, 두번의 호란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관련 글 :

조선의 가장 무능했던 왕 인조 1, 인조 반정

인조 2, 끝까지 준비되지 못했던 왕, 이괄의 난과 피어오르는 전운

인조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인조 마지막편, 소현세자의 죽음과 꽃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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