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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정조의 업적과 그 죽음. 독살설에 대해서 -3(終)-

이전글에서 정조의 즉위와 홍국영의 독주, 그 결말까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누구보다도 왕이라는 자리의 책무를 성실하고 열심히 수행했던 정조대왕의 업적과 그 죽음까지 다뤄볼까 합니다.

 

이전 글

 

[Story of Kings] - 정조, 조선의 22대 왕, 즉위까지의 험난한 길 -1-

 

[Story of Kings] - 정조, 홍국영과 규장각 -2-

 

정조는 재위 4년까지는 왕권의 안정과 정적 제거, 사도세자 추존등 과거 청산에 주력하였습니다. 암살시도가 있을 정도로 위태로웠던 시기를 보낸 정조는 정적들인 노론들에게 흠을 잡히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였습니다. 작은 예를 들자면 정조의 승은을 입어 의빈이 된 성씨의 경우 그 관계가 언제 맺어졌는지를 정조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의 눈으로 번득였던 노론조차도 몰랐습니다. 정조가 직접 성씨의 임신사실을 알리고 빈으로 책봉하기까지 그 임신 사실조차 아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신중함을 보였는데 정조는 평생 여자 문제에 대해서도 단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을 정도로 그 자신이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조의 개혁과 업적

 

정조,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묻힌 수원의 건릉

 

정조가 최대의 정적이라고 할수 있는 노론을 상대하는 방법은 할아버지인 영조가 신하들을 학문으로 누르려 했듯이 그 역시 철저하게 학문으로 그들을 상대하였습니다. 성리학을 명분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학문을 무기로 산림을 형성하여 이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해왔는데 정조는 세종과 비슷하게 신하들을 압도할 정도의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학문을 나누는 경연에서 송시열의 아들인 송덕상을 만난 정조는 그를 압도해 버렸는데 권력다툼에만 빠져 자신들의 큰 무기인 학문에는 소홀했던 노론의 실력이 거품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학문으로 노론을 압도한 것은 이후 실력파 남인과 소론을 대거 등용하여 이른바 탕평정치를 시작할수 있게한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탕평책은 이론적으로 붕당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할아버지인 영조가 비교적 유화된 탕평론을 실현하려 했다면 정조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격렬한 논쟁, 토론을 통하여 실력자를 가려내고 그 방안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남인, 소론 뿐만 아니라 노론에서도 실력이 뛰어난자를 가려 등용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실력없는 외척과 기존 노론 집권 세력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왕권강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물론 이 탕평책도 최근에는 성리학적 이상에 갇혀 새로운 실학과 북학등의 사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적 명분, 의리를 더 강화시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만든 부분이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1785년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군사세력으로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의 친위세력으로써, 정예군으로 육성을 하였습니다. 쓸모 없는 기존의 군사력은 해체하고 실력있는 군사력을 키우고자 한다는 명분으로 기존 5군영 중 수어청과 총영청을 폐지하고 만든 것이 장용영이었습니다. 정조 자신이 직접 군사지휘를 하기까지 하는등의 열의를 가지고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장용영내의 무과를 통해 급제한 자들은 서얼과 평민들도 많은 비율을 차지하여 사실상 실력위주의 군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는 처음에는 30명에서 출발해 수원 화성으로 진영을 옮긴 이후는 18,000 여명으로 불어나 사실상 조선내의 최강의 정예 군사력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법체계로는 대전통편을 발간하여 조선 창건시의 경국대전과 영조시대의 속대전을 합쳐 새로운 법체계를 세웠습니다. 이 법체제에는 탕평책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신해통공은 시전 상인의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오랜시간 정치와 결탁 해왔던 일부 시장 거상들의 결속을 막고 정경유착의 폐해를 막는 한편 일종의 경쟁 체제 도입을 통해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재벌이 누리던 경제 정책상의 특권적인 부분을 개혁하여 정치권과의 결탁을 막으려는 시도와 견주어 볼수도 있을듯 합니다. 이론적으로 올바른 정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점에 대한 견제안을 가지지는 못해서 영세 상인보다는 이득이 일부의 독점적 도매상들에게 집중되어 정조시대에 치솟는 물가를 잡는데는 실패했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정조는 그 어떤 왕보다 더 많은 암행어사를 파견한 왕이기도 합니다. 재위기간 중 총 60회의 암행어사와 53회의 별건의사를 파견하여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고 수령의 전횡을 막아 민생의 안정을 이루려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정조의 정치는 서찰 정치라고도 일컫어 집니다. 마치 지방의 총독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은 로마의 5 현제들 처럼 대소신료들과 직접 쓴 서찰을 보내고 받은 서찰의 답장을 쓰는일을 지속했습니다. 블로그 댓글도 자주 밀리는 게으른 저로써는 그 격무가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는 당시 북학파와 실학자 사이에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에 대해서 북학자인 박지원을 지목하여 연암체라고 나무라며 자송문(반성문)을 쓰게 할 정도였는데 그 자신이 쓴 서찰에서 속담, 이두, 욕설, 비속어를 아무런 가감 없이 사용하였습니다. 글쓴이가 추측해 보자면 나라를 대표하는 왕으로써 올바른 문체를 권장하여야 하는 부분을 왕으로써 시행한 것이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그런 문제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듯 합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흔히 알려진것 처럼 실학을 널리 장려한 왕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가장 성리학에 정통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꽉 막히지 않은 유연한 태도와 인재 등용을 통해 결과적으로 성리학이 아닌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려는 북학과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실학이 발전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상생과 화합이라는 정조의 꿈이 담긴 도시 수원화성

 

정조, 조선의 22대 왕

화성 행차도

 

정조가 생각한 개혁의 완성은 연산군처럼 왕 한사람을 위한 절대 왕권의 확립과 피의 복수가 아닌 상생과 화합을 이루는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당시의 노론을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비록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적인 사상에 대한 신봉에 가까웠지만 어느 시대나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광신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노론을 학문만이 아닌 권위로도 누르고자 모종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계획의 일부로 정조는 1789년 수원을 화성으로 승격시키고 수원 부사의 품계를 유수로 두 단계 올립니다. 이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를 왕으로 사후 추존하기 위한 시도에서였는데 (결국 사도세자는 고종때에 이르러서야 장조로 추존) 이 무덤에 현릉원이라는 묘호를 올린 정조는 수원이라는 도시를 요즘으로 치자면 강한 방위력을 가진 자립형 신도시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기록중 재미 있는것은 이땅의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지 매입시에 그 주변의 땅값을 시세에 맞도록 계산하여 백성들에게 보상하게 하고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에게도 품삯을 적절하게 지불하여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세심히 살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입니다.

 

1792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게 하였는데 이에 정약용은 거중기를 개발하여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완공시까지 이를 잘 활용하여 채제공이 총 책임자로 화성을 완공시켰습니다. 더구나 정조는 "화성성역의궤"라는 성을 축조하는 동안의 모든 기록을 상세히 남기게 해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파괴된 수원화성을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조, 조선의 22대 왕

현재의 수원화성 서북각루 주변

 

수원 화성에는 둔전을 위한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고 선진적인 농업 기술과 경영방식을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현재도 농작물 시험재배소가 수원에 있습니다.) 수원 일대의 상인들을 유치하여 자유로운 시장을 조성하였습니다. 이 성은 현재에도 조선시대 축성기술을 집약한 성으로 평가받으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자립형 계획도시로써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정조, 조선의 22대 왕

동북 공심돈 주변

 

정조, 조선의 22대 왕

서북 각루 주변

 

화성이 축조된 후 정조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화성에서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기에 이 회갑잔치는 세상에 없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즉위 20년을 맞은 정조는 화성행차를 통하여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왕의 아버지로써 사도세자를 인정받게 하려했던 것입니다. 회갑연을 위한 출발일은 혜경궁 홍씨의 생일이 아닌 사도세자의 생일인 1월 21일로 부터 49일(49재를 고려한)이 지난 2월 9일이었습니다. 연회는 총 8일에 걸쳐 진행하였는데 이 8일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던 기간과 일치 합니다.

 

이 행차는 115명의 악기연주자, 238명의 기수를 비롯해 1,779명의 수행인원과 779필의 말이 동원된 화려한 어가행렬이었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씨만이 아닌 사도세자까지 고려한 이 부모님을 위한 회갑연이 만 백성의 축제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이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정조의 화성행차를 재연한 행사가 수원 화성 주변으로 매년 커다란 축제의 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조, 조선의 22대 왕

이미지 출처 :

goodjcs블로그

 

정조는 이 화성행차를 통해 신하들에게는 임금의 권위를 보여주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화성에 도착한 직후 진행한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은 정적들이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군사 훈련을 통해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의 위력을 가감없이 확인한 노론들은 두려움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치밀하게 이 행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였던 정조는 궁으로 돌아온뒤 그 위력과시를 바탕으로 노론을 축출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탕평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정조가 원한 것은 당쟁으로 인하여 죽고 죽이는 비극이 아니라 상생을 통한 국가의 발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조가 노론벽파의 핵심인 심환지에게 보낸 297통의 어찰에는 어제의 정적을 오늘의 동지로 품어 더 나은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옮겨 여생을 보내려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1800년 6월경 부터 종기를 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회복하지 못하고 재위 25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이른 죽음과 정적인 노론 벽파와의 관계 때문에 그의 죽음에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통한 수은 중독인데 이 연훈방 치료법을 어의를 통해 주관한자가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이지수 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조 스스로가 자신의 병세를 심환지에게 알리고 자주 협의를 하고 처방전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거의 한달에 가까운 투병후에 사망하오 현재의 주류 연구는 잘못된 치료방법에 의해 더위와 피로, 수은중독으로 인한 사망으로 보는 견해가 더 큰것 같습니다. 그 근거로 정조의 치료법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은점, 투병기간 외에도 1806년 순조(5년) 벽파가 일망타진 되는 병인경화 시기에도 정조 독살설에 대한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생각에는 정조의 죽음에 독살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는 그가 아직은 더 개혁을 펼쳐 나갈수 있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명을 다한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죽은후 아버지의 옆인 융릉 옆에 묻히고 싶어했기에 그의 유언에 따라 처음에는 융릉 동쪽에 위치하였다가 1821년 그 자리가 흉지라는 김조순의 주장으로 현재의 건릉의 위치로 효의왕후와 합장되었습니다. 현재 수원에 융건룽은 시민들이 나들이 하고 산책하기에 너무 좋은 공원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정조와 사도세자 부자는 현재도 수원이라는 도시에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는 왕인듯 합니다.

 

정조, 조선의 22대 왕

융건룽 주변

 

정조, 조선의 22대 왕

융건릉 주변

 

이미지 출처 : slr클럽

 

조금 이른 49세의 나이, 그의 죽음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가 할아버지인 영조만큼만 살아서 그의 개혁이 완성을 보았더라면 그의 사후 시작되는 외척과 세도정치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의 혼란은 늦추어 졌을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한국의 역사과목 교사들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위운 순간으로 정조의 이른 죽음을 1위로 꼽고 있는걸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비슷한가 봅니다. 세종이 그러했듯 정조 역시 세상을 떠날 당시 신체나이는 매우 노쇠한 노인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두 왕을 대왕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의 정치가 어떤 업적이 있었다로 평가하기 보다 왕으로써의 책무, 즉 어떻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히 할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그 책무를 다하고자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다는 점 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들 때문에 그들은 대왕으로 불리우고 후세에 남을 업적을 만들수 있었던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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