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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인도에 여행을 갈 일이 생긴다면 꼭 가서 한번 쯤 눈으로 직접보고 싶은 건축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타지마할 입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그의 왕비인 뭄마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이 궁전식 묘소는 뭄마즈 마할이 죽은 뒤 6개월 후 부터 건축을 시작해 완공되는데 무려 22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건물은 완공된 직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공사에 참여한 모든이의 손목을 잘랐다는 무시무시한 뒷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은 샤 자한과 그가 이 건물을 짓고 어떤 생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합니다. 언뜻 죽은 왕비를 그리워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기대하실듯 하지만 언제나 현실의 이야기는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타지마할 출처 : Flickr, Share Accept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타지마할 출처 : wikipedia.org

 

샤 자한

 

샤 자한은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까지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중앙아시아 이슬람  침입 세력이 세운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무굴제국을 대제국으로 만든 저 유명한 악바르대제 입니다. 샤 자한은 부친인 4대 황제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터 총명함을 보이고 10대 중반부터 원정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는 등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와 아버지 자항기르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인 "쿠람" 은 할아버지인 악바르대제가 직접 지어준 이름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쁘게 한다" 라는 뜻입니다.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샤 자한. 출처 : wikipedia.org

 

그의 아버지 자항기르의 치세 말기는 20번째 왕비인 누르 자한의 오빠인 페르시아계 귀족 압둘 하산 아사프 칸이 매우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샤 자한은 이 아사프 칸의 딸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뭄마즈 마할)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샤 자한은 1617년 데칸 지역 원정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제국의 남쪽을 안정시키는 큰 공을 세웠고 그의 아버지 자항기르는 매우 기뻐하며 셋째 아들에게 "세계의 용맹한 왕(샤 자한 바하두르)" 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원래 이름인 쿠람 대신 "샤 자한"으로 불리게 됩니다.

 

제국 황궁의 권력 투쟁

 

자항기르의 20번째 왕비인 누르 자한은 정치적 야심과 권력욕이 높은 여자였습니다. 자항기르의 첫째 아들 쿠스라우는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눈이 멀게 되는 극형을 받았고 둘째 바르비즈는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에 총명하고 군사적 역량도 보인 샤 자한이 유력한 다음 무굴제국의 황제 후보 였습니다. 하지만 누르 자한은 이 만만찮은 자질을 가진 샤 자한 보다 좀더 자신이 권력을 누리고 유지하기에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자항기르의 넷째 아들 샤아르를 지지하려 마음 먹었습니다. 

 

누르 자한은 자항기르와 재혼하기 전의 전 남편과 사이에 난 딸을 넷째 샤아르와 정략 결혼시키고 그를 제위에 올려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 하였습니다. 이 왕비와 외척의 권력 추구는 역사의 어느 왕조나 벌어지는 일로 궁궐의 권력 투쟁은 참 무서운 법입니다. 누르 자한은 페르시아 출신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친척들로 제국의 관료들을 채우고 점차 무굴제국의 권력을 차근차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점에 자항기르는 샤 자한에게 페르시아 원정을 명하였습니다.

 

자신이 페르시아를 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왕비 누르 자한과 샤아르가 뒤에서 어떤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낀 샤 자한은 이 참에 제위를 차지하려 마음먹고 1622년 반란을 일으키지만 부친 자항기르가 보낸 장군 마하바트 칸에게 패하여 오히려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1625년에야 겨우 화가 풀린 아버지 자항기르의 용서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샤 자한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마하바트 칸의 권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누르 자한은 이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또다른 권력 투쟁에서는 이번에는 점차 자항기르가 노쇠하고 누르자한의 권력이 강해지는데 위기감을 느낀 마하바트 칸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반란으로 자항기르가 사로잡히고 누르 자한도 어쩔 수 없이 항복하지만 누르자한이 마하바트 칸과 다른 귀족들의 사이를 이간하는데 성공함으로써 100일도 채 못되어 마하바트는 달아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습게도 이후 마하바트 칸은 샤 자한에게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마하바트 칸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누르 자한은 이후 제국의 권력을 휘어잡고 권세를 누렸으나 자항기르가 1627년 결국 숨을 거두는 바람에 그 권력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샤 자한은 누르 자한의 오빠이지만 사위를 편들기로 한 아내 뭄마즈 마할의 아버지인 아사프 칸의 도움을 받아 아그라의 황궁으로 달려와 동생인 샤아르와 사촌 형제들을 죽이거나 추방한 후 1628년 무굴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결국 권력 투쟁에 패배한 누르 자한은  연금 당하기는 했지만 목숨은 건져서 불편할 것 없는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샤 자한의 시대에 무굴제국은 그 전성기의 절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32년에는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을 병합하고 1636년에는 골콘다와 비자푸르를 굴복시켜 그의 영토는 데칸고원 남부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몸마즈 마할

 

비록 정략결혼 이었지만 그는 이 왕비를 무척 사랑해서 그녀의 이름을 뭄마즈 마할(황궁의 보석)이라 바꾸고 수많은 다른 왕비를 들였지만 샤 자한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한 사람은 뭄마즈 마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정치적 야심을 가지지 않은 완벽한 아내" 였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 때문에 샤 자한이 진심으로 마음을 놓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자항기르가 총애했던 누르 자한(뭄마즈 마할에게 이모가 된다)과 여러모로 다른 성정을 지녔다고 합니다.

 

앞서의 이야기들에서 보시듯 피 튀기는 권력 투쟁의 정점에 선 남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암투의 삶을 살아야 했던, 또 의붓 어머니인 누르 자한과도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했던 샤 자한은 수많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다른 왕비들 보다 그녀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현대에서도 가끔 성공한 남자들이 의외로 미모의 아내를 두고도 술집에서 예쁘지도 않고 젊지도 않지만 단지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에게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가정까지 버리는 경우를 보는데는 아마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까요?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뭄마즈 마할. 출처 : wikipedia.org

 

몸마즈 마할은 19년간의 샤 자한과의 결혼 생활에서 14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1631년 그녀가 14번째 딸을 낳다가 그만 사망하자 샤 자한은 깊은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어 머리가 새 하얗게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어쩐지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고려 공민왕과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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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공주, 왕 이야기 10

 

몸마즈 마할의 죽음 이후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터키옥, 청금석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 미문의 화려한 묘역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가 1653년에야 완공된 마할의 무덤, 타지마할 입니다.

 

 

타지마할을 바라보는것 만 허락된 말년

 

참 아이러니 하게도 샤 자한이 아버지의 자항기르의 말년에 겪었던 피튀기는 권력 다툼은 그가 늙고 노쇠하자 역시 재현 되었습니다. 그가 병석에 있는 사이 아들들이 권력 투쟁에 나선 것 입니다. 장남인 다라 시코와 차남 샤 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4형제는 피튀기는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1658년 아우랑제브가 최종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냉혹한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하고 아버지 샤 자한은 아그라 요새 탑에 감금 하였는데, 이는 샤 자한이 다라 시코를 지지하여 제위를 넘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이 죽을때 까지 그를 만나지 않았고 감금에서 풀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실의에 빠진 샤 자한, 그의 유일한 위안은 평생 사랑했던 아내의 무덤을 매일 바라 볼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고 합니다. 1666년 그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고 다행히 그의 시신은 타지마할까지 운구되어 사랑했던 아내 곁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맺으며

 

지금까지 쓴 왕 이야기들에서 공통적인 부분을 들라면 권력이란 것은 바로 부모 자식도 형제도 허락되지 않는 무서운 힘이라는 사실 입니다.  이전에 다룬 글 들에서도 어머니가 아들을 때로는 형제가,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평생을 같이한 동료나 스승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참 많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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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시대가 흐른 현재에는 집안끼리 싸우는 재벌가나 정치 권력자 집안의 이야기들이 마치 소설처럼 펼쳐지기도 합니다. 어느 시대던 어느 장소가 되었던 힘과 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일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전 포스팅 부터 꾸준히 이런 논조의 이야기를 여러번 하지만 역사 이야기를 보다 보면 내가 권력이나 돈 없이 평범하게 태어난 사실을 오히려 행복하게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적어도 다른 사심 없이 부모에게 사랑받고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들에게 배신 당할 걱정없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는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요? 물론 그 기회마저 차 버리느냐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린 문제인것 같긴 합니다.

 

내용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256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200                     

두산백과 타지마할, 자항기르, 샤 자한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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