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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행궁, 정조대왕의 탕평과 상생의 꿈이 어려있는 어소

수원이라는 도시는 사실 조선후기 정조에 의해 수원화성이 건설되면서 도시의 근간이 된 부분도 큽니다. 수원에 살다 보면 종종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장안문을 보게되고 수원 화성의 성벽들을 여기저기서 늘 보면서 정조의 많은 흔적들과 만나게 됩니다.

오늘 제가 둘러보았던 화성행궁 또한 바로 그 정조가 남긴 흔적의 일부입니다.

 

행궁이란 왕이 잠시 머물던 임시처소를 뜻하는데 화성행궁의 경우에는 평소에는 부사, 또는 유수가 머물면서 집무를 보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임시 거처이긴 하지만 그래도 왕이 머무는 궁이기 때문에 종종 서울에 있는 경복궁 같은 고궁들과 유사한 건축 양식들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해마다 재현되는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는 올해는 정말 최대 규모로 재현되었고 해마다 축제의 장이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행사가 재현되는걸 아주 환영하는 편인데, 바로 요즘의 불통의 정치와 비선, 문고리 같은 추악한 추문의 집권자의 달리 정조가 꿈꾼 상생과 화합 소통과 탕평의 의지가 발현된 행차이기도 했기 때문 입니다.

 

수원 화성 행차의 의의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정조의 업적과 그 죽음. 독살설에 대해서 -3(終)-

 

 

 

사실 한국의 사적지들은 다소 수수한 편이라 유럽의 비주얼적인 면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이는 유명 관광지와 같은 부분은 기대하기 어려운 편입니다. 화성행궁을 둘러본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커다란 한옥 몇채 있고 별로 볼것도 없더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 못할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처럼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배경의 이야기를 읽고, 알고 들렸을때는 그저 경관만을 볼때와는 또 다른 감흥과 색다른 시선으로 문화유산을 바라보고 흥미롭게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정조와 화성행궁도 아비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를 알고 본인도 세손시절 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었고 스물 다섯상 즉위 후의 일성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말을 하기 까지의 이야기들, 그리고 즉위 첫 해에만 7번의 암살시도를 겪어야 했던 즉위 초의 불안정한 왕권 등에 대해 알고 나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이게 됩니다.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로 인해 숱한 고초를 겪었지만 정조는 왕이 된 후에는 복수의 정치보다 천천히 힘을 길러 수원 행차를 통해 왕의 위엄을 보이고 장용영의 무력 시위를 통해 노론으로 대표되던 자신의 정적들에게 허튼 마음을 먹으면 언제라도 너희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은근한 위협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힘의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그 정점의 달한 왕권과 힘을 가지고 나서도 자신을 암살하려고 까지 했던 정적에 속해있는 당파를 끝내 내치지 않고 소통의 끈을 놓지않으며 탕평의 길을 가려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정무로 인한 과로로 사망했다는 정설을 생각해 보면 국민을 우롱하고 드라마 본방 사수하며 연예인 블랙리스트나 만들던 누군가와 그 집단과는 참 다른 격이 다른 위정자 였습니다.

 

서론이 좀 길었던 듯 합니다. 오늘은 정조의 꿈이 담겨있는 수원화성, 그 중에서 화성행궁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화성행궁 앞에는 제법 큰 규모의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 요금은 시간에 관계없이 선불로 2,000원을 받습니다.

 

 

주차장의 한편에는 화성행궁의 돌담이 보이고 돌담을 따라 돌아가면 화성행궁의 입구인 신풍루를 보게 됩니다.

 

 

수원 화성 전도

 

화성행궁

 

 

 

수원 화성행궁은 오후 4시 30분까지 입장이 가능하며 5시 30분 까지만 관람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일반 어른은 입장료가 1,500원이며 어린이는 700원 입니다.

 

 

 

제가 간 날은 카카오톡으로 수원시를 플러스 친구로 추가하고 입장시에 보여주면 무료입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16년 한해 동안 한정이긴 한데 내년에도 계속하지 않을까? 예상만 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화성행궁에 갔다면 필수로 봐야 할곳들을 굵은 글체로 표기했습니다.

신풍루 (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입니다.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가 1795년 정조에 의해 신풍루로 이름을 다시 바꾸게 됩니다.

'신풍'이란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달았습니다. 화성이 고향과 같은 이유는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에 들리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1795년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을 행하기도 했던 장소입니다.

 

사진에 담지못했지만 신풍루 좌우에는 북군영과 남군영이 있습니다.

 

남, 북군영(北軍營)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입니다. 즉 행궁에 머무르는 왕을 지키기 위해 200명의 기병이 100명씩 나누어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1789년(정조 13년)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년)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1798년(정조 22년)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입니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습니다.

 

 

중삼문이라는 말은 내삼문과 외삼문 중간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을 뜻합니다. 즉 화성행궁에서는 신풍루가 외삼문이고 뒤에 나올 중양문을 내삼문으로 보면 됩니다.

 

 

신풍루를 지나자 마자 바라본 좌익문

 

신풍루와 좌익문의 우측에는 집사청, 좌편에는 서리청, 비장청, 외정리소가 있습니다.

 

집사청(執事廳)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년)에 세워 졌습니다.

 

서리청(書吏廳) 서리들이 사용하던 건물 입니다.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1795년 정조의 행차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비장청(婢將廳), 비장이라는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들이 업무를 보던 건물입니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입니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년)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는 1795년 정조의 수원화성행차(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外整理所)는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입니다.

 

1796년(정조 20년)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습니다.

외정리소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을 하게 됩니다.

 

 

좌익문 우측담벼락에는 전통놀이인 투호와 고리를 던져볼수 있는 체험장소가 있습니다. 보기에는 쉬워보였는데 화살을 던져서 저 통에 넣는다는게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많은 아빠들이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잠시 집중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중양문(中陽門)

 


양문은 궁궐 건축상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 입니다. 1790년(정조 14년)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 습니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문을 지나면 정전인 봉수당이 나오게 됩니다.

 

중양문 좌측에는 봉수당의 좌측까지 차지하는 유여택(維與宅)이 있습니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고 정조가 행차시에는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의 역활을 합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으며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년)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년)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고 합니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正殿)에 해당되는 건물 입니다.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의 상징들이 보여서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서울에 있는 고궁인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나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서 볼 수 있었던 가운데가 봉긋 솟은 어로(왕이 다니는 길) 입니다. 이 어로를 볼때 봉수당이 왕이 머무는 임시 숙소인 행궁에서 정전의 역활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어로를 관람객 아무나 밝고 다니지만 사실 이 어로는 조선시대에는 왕만이 밝고 다닐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 어로를 실수로라도 예법에 맞지 않게 지나게 되면 국문을 당하기도 했던 길입니다.

 

임금이 친히 성절 하례의 표문을 전하는데, 좌통례 김극회가 임금을 인도하여 계단을 내려가다가 잘못하여 어로를 지나고, 주서 신상이 어로에 엎드려야 할 것인데 창졸간에 바로 내려오고, 또 미처 땅에 엎드리지 못하였으니, 명하여 신상을 금부에 가두고 국문하게 하였다.

 

王親傳聖節賀表 左通禮金克恢導王下階 誤過御路 注書申鏛伏當御路 倉卒直下 又不及伏地 命下申鏛干禁府鞠之 [연산군일기 권제52, 36장 뒤쪽, 연산군 10년 4월 24일(을묘)]

 

 

그리고 드라마 등을 통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의 상징인 일월오봉도가 이 봉수당에 있습니다. 왕만이 사용할수 있는 해와 달 5개의 산봉우리가 그려진 바로 그 그림입니다.

 

 

이 봉수당 처마에는 취두와 잡상도 보입니다. 머리가 독수리처럼 생겼다는 상당의 동물 취두와 조금 숫자가 적긴 하지만 잡상이 보입니다. 보통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찬산갑 등의 순서로 5개에서 7개에서 많은 곳은 11 종류가 궁궐이나 행궁 처마에 올라 갑니다.

 

이들은 옥황상제의 명으로 궁전의 지붕에서 침입하는 악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데 또 다른 말로 어처구니라고도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은 궁궐의 처마을 올리고 난 후 이 잡상들을 깜빡하고 올리지 않은 경우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1795년 정조의 수원행차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인 진찬례를 바로 이곳 봉수당에서 거행 하였 습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년) 9월 25일 완공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 되었습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가질 계획으로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에는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 커다란 화제거리였다고 합니다.

 

 

 

봉수당 뒷편의 담을따라 지어진 방들은 아마도 내관과 궁녀의 숙소로 쓰였던 모양입니다. 마네킹으로 재현이 되어 있습니다.

 

 

 

봉수당의 왼편에는 장락당과 복내당이 있으며 오른편에는 활을 쏘기 위한 정자인 득중정이 있고 낙남헌과 노래당이 있습니다.


장락당(長樂堂)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년)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으며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습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년)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득중정은 ‘예기(禮記)’ 권46의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였다고 합니다.

 

 

 

 

 

 

 

 

노래당(老來堂)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볼수 있습니다.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다고 하는데 현재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습니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낙남헌(洛南轩)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1795년(정조 19년) 행차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고 합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습니다.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 역시 이곳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입니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으로 화성에서 ‘화’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으로 사적 제 11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운한각은 이 화령전 안의 정전에 해당되는 건물로 정조대왕의 어진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미로한정과 내포사가 있지만 뒷담에 이르는 길을 올라가야 하므로 행궁 방문객이 잘 들리지는 않는 곳 입니다. 제 경우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와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서 가보지는 않았는데 여유가 되신다면 들려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아이들을 데리고 화성행궁에 가실일이 있다면 이 블로그의 글과 사진들을 소개서 삼아, 그리고 정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읽고 둘러보시면 그저 지루한 행궁 방문이 아닌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는 관람이 되실지도 모릅니다.

 

 

시설 소개 내용 출처 : 수원문화재단 시설물 소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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