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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2-

성종의 이름은 이(李) 혈(娎) 입니다. 기쁠 혈(娎) 이라는 이름답게 그는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 그리고 신하들, 이들 모두를 기쁘게 만드는 존재 였습니다. 단 폐비 윤씨와 아들 연산군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시법에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 成이라 하는데 성종의 사후 시호는 이러한 뜻을 지닐 정도로 성종의 치세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며 효성스러우며 유교적 군주의 덕목을 갖춘 왕으로 후대에도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런 성종도 앞의 글에서 다루었듯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즉위 과정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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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Kings & History] - 성종, 연산군이라는 파국을 잉태한 성군 -1-

 

원칙적으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었던 계승 서열 3위의 자산대군(자을산군, 성종)은 부모의 강력한 의지와 처세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한씨는 장남인 월산대군이 아닌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선택한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뜻을 두 말 없이 따랐는데, 그녀에게는 왕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성종이 즉위한 경복궁 근정문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재사용 가능 권한

 

훗날의 인수대비,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이 즉위하던 날, 아들과 함께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남편인 의경세자 사후 멀어졌던 왕의 어미라는 여성으로써의 권력의 정점에 마침내 다시 다가선 것 입니다. 이 모든일은 예종이 승하하고 반나절도 되기 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정희왕후의 훗날 수렴청정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야심, 세조의 장자방이었던 장인인 한명회의 힘,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던 고모들로 대표되던 친정의 세력을 가진 인수대비 한씨와 같은 권력과 정치적인 결탁으로 이루어진 왕위 계승이었습니다.

 

아래의 성종실록의 첫번째 기사를 보면 예종의 사후 성복도 하기전에 성종이 근정문 앞에서 바로 즉위를 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이날 예종(睿宗)께서 병세(病勢)가 위독(危篤)하니,

 

--중략--

 

진시(辰時)에 예종(睿宗)이 훙서(薨逝)하니, 대비(大妃)가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나가서 신숙주 및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의 대비는 세조의 비이자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 왕후를 말합니다.)
--중략--

대비가 얼마간 슬피 울고 나서 정현조(鄭顯祖)와 권감에게 명령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主喪)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신숙주 등이 말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신(臣) 등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교지(敎旨)를 듣기 원합니다."

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月山君)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者山君)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世祖)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대비인 정희 왕후가 자산대군을 왕으로 정하는 장면인데 실제로 예종이 죽고 짧은 시간안에 성종을 다음왕으로 지목하고 신숙주 및 대관들이 논쟁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이미 자산대군을 다음 왕으로 삼는 사전 논의가 이미 끝나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여러 원상(院相)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사군(嗣君)이 성복(成服)한 후에 즉위(卽位)하는 것이 전례(前例)이지마는, 지금은 이와 같이 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먼저 즉위(卽位)하여 인심(人心)을 안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성복은 상례에서 염을 한 다음날 상제들이 복제에 따라 상복을 입는 절차를 말하는데 성종의 즉위가 얼마나 급하고 빠르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전교(傳敎)하기를,

"좋다."

하였다. 신시(申時)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문(勤政門)에 나가서 즉위(卽位)하니,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하례(賀禮)를 올렸다.
    
성종실록 1권, 성종 즉위년 11월 28일 무신 1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이처럼 성종의 즉위는 정희왕후, 한명회, 인수대비 사이에 맺어진 강한 힘의 연합과 신숙주로 대표되는 공신들에 협력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13살의 왕은 즉위 첫해에 73명의 대신들을 공신으로 봉했습니다.

 

성종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성종 어진, 상상화 출처 : 나무위키

 

공부를 열심히 한 왕

 

할머니와 어머니, 장인, 그리고 공신들의 힘의 연합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공부 였습니다. 즉위 후 열흘 뒤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 할 수 있는 신숙주는 수렴청정 중인 정희왕후에게 강의 계획서와 강사진을 선별해 올렸습니다. 정희왕후는 그 어떤 정치사안보다 손자의 공부에 더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임금은 교육이 시작된 그 날부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경연과 주강을 반복 했습니다.

 

이것은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내는 7년 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즉위 이듬해 부터 시작된 역사 공부는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후인 성종 9년 까지도 계속되었으니 성종은 왕위에 오른 후부터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착실하게 제왕학을 배운셈입니다.

 

성종 또한 모범적이고 훌륭한 학생으로 학문에 매진하였고 신하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르친 임금을 자랑스러워 하고 사랑하였으며 존경하고 애착을 가졌다고 합니다. 사대부들에게 학생으로 임금의 역할을 시작한 성종은 조정 신료 대다수와의 관계에서 충(忠)을 넘은 각별한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은 인물이었고 바로 이때문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성종을 사랑하고 칭송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성군일까?

 

성종 대는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롭고 조정이 안정되었던 시기였는데 이는 그전의 태종, 세종, 세조및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 이르는 정치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하지만 성종이 정말 다른 선대왕들과 같은 성군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견이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다룰 폐비 윤씨에 대한 처사와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에서 두 대비들에게는 지극한 효자였으나 아내에게는 비정한 남편이었고 한없이 이기적인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또 그 자신이 아무것도 명확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고 선대의 사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끼워 맞추려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영민하고 똑똑했지만 그 지성을 명확한 국정 운영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데 쓰기보다는 자신이 비난받지 않는 방향으로 적당히 타협하는데 쓴 모습이 더 두드러집니다.

 

실제로 그는 단 한번도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는데, 신하들 사이에 잘못이 불거져도 그는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 하고 훈구 대신과 신진 사림의 사이에서도 언제나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자신이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는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세종 조에는 어떻게 하였는가? 세조 조에는 어떻게 하였는가?"

 

물론 공적인 사안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선대의 일들을 묻고 신하들의 의견과 조언을 받아들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고 신하들과 늘 의논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훈구대신과 사림세력의 조화를 주도하며 탁월한 통치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세종과 같은 스스로의 확고한 통치 철학이나 사람에 대해,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열린 생각을 갖추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 됩니다.

 

특히 성종은 여인에 대해 유달리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수절하지 않은 여인에 대해서는 결벽증에 가까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스무살에 과부가 된 후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영향이 컸습니다. 성종 8년, 임금은 여성의 재혼을 법으로 금하고 재혼한 여성의 자식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는 문제를 거론합니다. 관습적으로 3번이상 재가한 경우만 문제로 삼자는 주장이 대세가 되자 성종은 불쾌한 낯빛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재혼을 못하게 하였는가? 자식을 돌볼 생각이 없으면 언제든 할 수 있지 않는가?"


결국 성종 16년 재혼한 여성의 자손에 대한 제재가 정식 반포되었습니다.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며 과부의 재혼 금지를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법으로 규정했는데, 이 법은 조선 후기까지 작용됩니다.

 

이러한 과부의 재가에 대한 법 제정은 당시까지는 다소 개방적인 조선사회를 성리학적 이념으로 남성중심적인 완전한 폐쇠적인 사회로 만들기 시작한 단초로 생각됩니다. 이는 여성 노비, 남성 노비의 출산 휴가에 대해서 까지 마음을 쓰고 만백성을 어루만지고자 했던 세종과 성종과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합니다.

 

성종대의 주요 업적들

 

성종대의 주요 업적이라고 말하는 부분들은 세조가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의 헌법에 해당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해 반포했고, 《여지승람(輿地勝覺)》, 《악학궤범(樂學軌範)》, 《동문선(東文選)》 같은 서적을 편찬하는 등의 학문적 제도적 성과 입니다. 이런 면모는 세종과 비슷한데, 세조에 의해서 사라진 집현전(集賢殿)을 대체할 홍문관(弘文館)을 새로 창설하고, 독서당(讀書堂)제도를 시행해 인재들의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인데 사실 대부분의 업적이 선대에 시작한 부분들을 계승하거나 전례에 좋았던 부분을 부활시킨 부분이 더 커 보입니다.

 

외적인 업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과의 무역 확대 등을 통해, 국력을 크게 진작시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여진족 소탕은 조선군 4만명을 동원해 마주친 여진족 200명 중 4명만을 사로잡는 성과에 그쳤고 겨울철 군사를 일으켜 식량 부족등으로 많은 군사가 얼어죽고 아사하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성과라 말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사실 조선초기 비교적 강력했던 군사력은 성종대를 기점으로 문약해지고 약화되었다고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성종의 성격을 나타내 주는 일화들

 

또 다른 성종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는 임금에게 간하는 역할인 대간들이 다리 셋이 달린 닭이 태어나자 이는 임금이 여자의 말을 들어 정치를 한 탓이라며 왕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어이 없는 간언을 하는 사태를 대했을때도 "대간들이 미신을 믿고 왕에게 반성하라고 하다니?" 라고 항변했음에도 대간들의 반성 요구가 이어지자 다른 후대의 왕들 처럼 이들을 귀양보내거나 처벌하는 대신 "요즘에 발생하는 재이는 다 나의 탓이구나" 라고 신경질 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성종은 스스로 유학적 소양을 갖춘 군주였기에 다소 무례한 대간들의 그 어떤 간언에도 결코 처벌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만 그러한 대간들의 성종에 대한 무례는 이후 이러한 모습들을 똑똑히 보고 기억한 연산군에게 철퇴를 맞게 됩니다.


성종은 동물을 유달리 좋아해서 궁궐에서 동물들을 많이 기르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나 개, 사슴, 노루, 매는 물론 심지어 백조나 원숭이까지 길렀다고 합니다. 성종 때가 성리학적 유교정치의 전성기였던 만큼, 이는 당시 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사림 간관들에게 크게 비판받기도 했고, 성종이 간관들과 이 문제로 설전을 벌인 기록까지 있습니다.

특히 원숭이는 류큐 왕국에서 보내온 것이였는데, 이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는 문제로 좌부승지와 설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좌부승지 손비장은,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 벌로 하나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논리로 공격하자, 성종은 "외국에서 바친 것을 추위에 떨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불가능하다"며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신하들의 간언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놓아준 동물들도 많다고 합니다.

후대인 연산군 시절에도 일본에서 원숭이를 보내온 적 있었는데, 연산군이 말하길, "선왕(先王) 시절, 저들이 앵무새 따위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 돈만 들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된 거나 있었는가? 그냥 돌려보내거라" 라고 하여, 폭군으로 연산군의 면모만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활쏘기도 잘하고 글도 잘썼으며 매사냥을 좋아하는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성종이지만 "왕이 잡기에 힘써 국정이 문란해진다" 라는 대간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신하들 몰래 숨어서 매사냥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성종은 유학적으로 완벽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대간의 압박으로 개인적으로 볼때는 매우 답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대간을 육성한 게 성종 본인이었기에 매우 자승자박인 옥죄인 삶을 살아야 했고 이 때문인지 성종은 문종보다도 일찍 죽었습니다.(37세).

 

술을 많이 마시고, 여색으로 인한 정기 고갈로 피를 자주 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낮에는 많은 시선과 간관이라는 언론의 감시를 받는 왕에게 술과 여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어느 정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 였던걸로 보입니다. 즉 술과 여자 말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처지에 스스로 몰린 것입니다. 그나마 왕의 호색은 곧 후사를 많이 볼 수 있는 결과가 되기에 왕조국가라면 대부분 장려되는 덕목으로 성종이 어느 정도 자유로울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후대에 남긴 불씨

 

성종의 시대가 평화로웠던 이유는 그가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성종이 장수를 했다면 그의 적당주의와 타협적인 문제 해결 방침이 언젠가 문제가 되어 당대에 불거졌을 것이라는 의견들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종은 채 마흔이 되기전에 세상을 떠났고 성종의 치세에 만연된 현실 타협과 적당주의의 부작용은 후대가 짊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 에게 이어지는데 연산군은 왕권 강화라는 그의 아버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합니다. 어쩌면 연산군의 폭주는 바로 성종의 이런 적당주의 타협주의에 대한 반발과 대간들이 아버지인 성종에게 보인 무례함들에 대한 분노, 폐비 윤씨에 대한 마음등이 복합적으로 표출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연산군이라는 파국을 잉태한 폐비윤씨의 이야기로 성종에 대한 이야기를 맺고자 합니다.

 

*역대 사극에서 성종을 연기한 배우들

출처 : 네이버 카페 Sakcafe

 

어릴때부터 부모님 영향으로 사극을 많이 보았는데 나중에 성종에 대해서 찾아보기 전부터 성종 하면 성군이라는 이미지 보다 아내를 죽인 비정한 남편으로 더 기억이 나는 걸 보니 드라마 등에서도 그런 부분을 많이 다루었었나 봅니다.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1984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길용우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1994 kBS2 한명회 -박진성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1995년 KBS2 장녹수 -현석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1998년 왕과 비 -이진우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2007년 SBS 왕과 나 -유승호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2007년 SBS 왕과 나 -고주원

 

성종, 사대부들이 꿈꾸던 완벽한 군주

2015년 영화 어우동 -유장영

 

내용 참조
www.wikipedia.org
조선왕조 잔혹사 - 책비출판사, 조민기 지음-
성종 - 해냄출판사, 이한우 지음-

내용 참조

www.wikipedia.org

조선왕조 잔혹사 - 책비출판사, 조민기 지음-

성종 - 해냄출판사, 이한우 지음-



출처: https://lucy7599.tistory.com/742 [지후대디의 Favo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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