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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 1 -세종대왕 편-

 

우리는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군주제가 보편적이던 시대가 저문지 아직 채 1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자를 선거로 뽑았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로마의 공화정 시대를 예외로 하면 유구한 인간의 역사속에서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던 시대가 더 오랜시기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역사속에서 성군이라 불리는 좋은 왕과 폭군이라 불리는 나쁜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왕이 존재합니다.

그런 왕들의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민했지만 필자도 한국인이다 보니 주인공을 만원지폐에서 볼수 있는 세종 대왕을 첫번째 주인공으로 삼아 볼까 합니다.

 

 

세종 대왕은 여러가지 업적으로 성군으로 불립니다.

제가 블로그에 남기는 생각을 표현하는 문자 자체이며, 인터넷, 스마트폰의 시대에도 우리가  무심코 가장 많이 읽고 쓰는 '한글'이 바로 그분의 작품 입니다.

전 세계의 민족들 중에는 고유의 문자를 갖지 못한 민족들도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이분은 성군으로 불릴만 합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 출처 : wikipedia

 

이름은 '이도'

 

이분은 전주이씨로(당연한 건가?) 성은 '이' 이름은 '도' 즉 '이도' 입니다.

최근의 드라마로 인해서 본명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조선 3대왕인 태종의 셋째 아들입니다. 셋째로 태어났으나 위의 두형들 모두 제치고 조선의 4대왕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셋째가 왕이 되려면 위의 두형들이 자연사, 병사하거나 치열한 권력싸움끝에 살해 또는 잔혹하게 제거 하고 왕이 되거나 하는데 특이하게도 이분은 적어도 형들이 살아는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런 계승이 가능했던 것은 부왕인 태종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선위를 통해 계승하여 즉위 초기의 왕권을 든든하게 받쳐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대표적인 업적

 

앞서에도 말했지만 "훈민정음"으로 일컫어 지는 한민족의 문자 창제가 이분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이 창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천자문을 배우거나 로마자를 문자로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학 기술에서는 혼천의, 양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습니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 최윤덕을 북방에 보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확정 하였습니다. 남으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 하는 군사적으로도 활발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문학, 농업과 양잠, 지리, 의학등의 각분야의 서적을 직접 서술하거나 지원하여 편찬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외교 및 법전 정비에도 직접 참여 하는등 쉴 새 없이 다방면에 많은 일들을 추진하고 국정에 이만큼 전념한 왕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이후에도 없어 보입니다.

 

조선 초기의 안정적인 치세로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닦은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분의 화려한 업적은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에 모두 걸쳐 있어 정말 진정한 엄친아라 볼수 있습니다.

 

업적에 대한 정보는 학교때 부터 배웠고 과연 왕 한사람의 업적인가 싶을 정도로 업적이 너무 많아 나열하기도 힘드니 이쯤에서 간략하게 정리하고 너무나 훌륭한 왕이지만 사람냄새 나는 뒷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합니다.

 

 

아버지

 

드라마의 영향으로 마치 아버지인 태종과 세종의 관계가 긴장감을 가진 관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듯 합니다.

실제로는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태종 역시 가장 사랑한 아들이었습니다.

부자간의 사이는 기록상으로도 매우 양호했고 태종의 셋째아들 편애가 엿보이는 에피소드도 많이 보입니다. 세종 역시 즉위 초기에는 상왕에게 물어보고 처리하겠다는 등의 파파보이의 모습이 실록에 남아있습니다.

 

태종은 왕자의난으로 배다른 형제들이건 친형제건 가차없이 살육하거나 협박하여 왕위를 쟁취해냈고 대권을 얻은 다음에는 조선 초기에 왕권 강화와 국가의 체제 정비에 힘쓴 왕 입니다.

그 아들인 세종이 마음놓고 여러가지 일들을 진행할 수 있었던것은 본인의 탁월한 정치수행능력과 인재 등용 능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아버지인 태종이 튼튼하게 강화해 놓은 왕권의 덕을 보았습니다.

 

왕과 왕비에게 충녕대군(세종의 왕자시절 봉작)은 형제간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각인 되었으며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정진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사려도 깊은 아들을 부모는 어찌 생각 할까요?

 

 

의외의 야심가?

 

세종 대왕 그분이 충녕대군 시절 영민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이 대권을 향한 주자의 한명으로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형들보다 잘 알고 있었고 대권을 향한 이미지 메이킹에서 형들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결국 세종은 분명히 두 형들보다 뛰어나다는 이미지를 태종과 신하들에게 각인 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왕위 계승에도 성공하였습니다.

 

실록에는 "임금의 아들이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라는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태종에게 고하기도 하고 세자이던 형 이제(양녕 대군)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여 이제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왕의 아들은 누구라도 왕이 될수 있다는 다소 위험한 생각을 태종에게 고한 행위는 복잡한 계산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신하의 불손한 생각을 부왕에게 고하게 되면 자신은 그러한 논제에서 한발을 살짝 뺀듯 보이지만 이를 들은 태종은 "아 장자 계승이 아닌 계승을 주장하는 신하도 있구나" 라는 부분을 은연중에 인지하였을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자인 이제(양녕대군)에게 충고한 부분에 대해 후대의 역사학자 박시백은 "충녕대군의 행동이 세자를 위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 이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하였습니다.

필자 또한 대권에 대한 도전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집니다.

 

둘째 형인 이보(효령대군)가 세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는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은 자신도 대권의 자격을 가진자로 인지하고 왕으로서의 덕을 쌓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내가 더 왕으로써 적합한 지식과 자격을 가졌다는것을 어필하는 행위로 유교와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제대로 먹히는 이미지 메이킹 전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뛰어난 사람들은 모든 행위가 한가지만 목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니 만큼 두가지 모두 왕권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었을걸로 생각 합니다.

 

 

대권 경쟁에서 승리하다.

 

1418년 태종은 이제(양녕대군)를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 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 하였다" 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된 비행으로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태종은 왕권 계승에 후환을 남길 사람이 아니었므로 양녕대군을 폐립한 뒤 이천군으로 귀양 보내고 둘째인 효령대군은 당시 조선에서 금하던 불가의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묵인 합니다.

 

세자의 무도한 행동이라 지칭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양녕대군이 자초한 부분도 있지만 또 다른 복잡한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양녕은 태종이 외척 제거 목적으로 행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목격했고 외삼촌들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연루될까 두려워 외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행한 외가의 친척도 가리지 않는 왕권 강화 수단에의 두려움, 권력에 대한 이해 또는 환멸등을 느끼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가 태종이 지정해준 사부들에게 일부러 미치광이 노릇을 하여 수업을 피하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고 일부 일탈을 한 정황들도 알고 보면 아버지에게 소심하게 반항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비행을 훈계하는 태종에게 반박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노하게도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도 제 태도나 행위를 나무라는 아버지에게 어릴때는 반발심을 느껴 본적이 있어 이러한 부분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양녕의 불행은 그저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아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 대권을 물려받을 1순위인 조선 왕의 장자었다는 점 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양녕의 일탈행위가 부친인 태종과 원경왕후가 "충녕의 자질이 뛰어나나 셋째라서 아쉽다" 는 대화를 엿들은 후 부터라고도 합니다.

부친뿐 아니라 모친의 자신에 대한 인물 평가는 어떤 괴로움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후에 양녕대군은 형이 폐립되면 혹시 하는 마음을 품었던 효령대군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고 말하며 부친의 뜻이 이미 충녕대군에 있으니 다른마음을 먹지 말라고 충고 하였습니다. 위의 일화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미 부친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나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처신으로 보면 결코 양녕대군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역사속에서는 저러한 자유분방함과 격한 성격등이 즉위 후에 통치자로써 시너지를 내면서 훌륭한 통치를 해낸 경우도 많이 존재합니다. 물론 반대로 폭군으로 남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조선시대나 현재나 약간 건들거리고 자유분방한 사람보다는 공부 잘하고 효심깊은 사람을 높이 평가하게 되어 있는게 또한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 태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자신이 계승자에서 제외되었음을 알았다면 양녕의 처사는 자포자기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입니다. 둘째 효령도 낙담하여 자진해서 승려로 출가한 것을 보면 태종은 냉혹한 아버지라기 보다는 그 무엇보다도 왕권을 우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두 형제가 잘 알고 있었다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대권을 순조롭게 물려주는데는 실패하다

 

부왕인 태종의 전례를 따랐다면 문종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후에 계유정난으로 세조로 즉위하는 "수양대군"은 사회적인 지위를 박탈 하거나 적어도 관직이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여 혹시라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지 못하게 싹을 잘랐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세종은 태종과는 다른 철학을 가졌습니다.

 

세종은 양녕의 폐위와 본인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기용한 예에서처럼 기용에 그치는게 아니라 정승으로 삼아 국정의 파트너로 요직에 활용 했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장영실과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이나 과거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도 주저 없이 등용하는 왕이 었습니다.

왕으로써 너무나도 깨어있는 지도자의 모습이고 이러한 인재 등용으로 황금시대를 만들 수 있었지만 역사에서는 항상 이런 훌륭함이 좋은 결과만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태종은 아무죄가 없는 외척도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 할 수 있었고 비록 아들이라도 한명은 귀양을 한명은 승려로 출가시켜 왕권에 도전할 싹을 잘라버렸지만 세종은 재능이 있는 아들들을 중용하였으며 이는 태종과 가장 닮은 수양대군이 후에 피바람속에 정권을 잡을 수 있게 만든 단초가 되었습니다.

결국 문종이 요절한 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이라는 피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조카인 단종을 귀양지에서 살해하는 잘 알려진 비극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대마도 정벌은 실패한 군사적 업적인가?

 

대마도 정벌은 대마도를 정복하지 못해서 실패한 원정으로 생각 하는 경우가 많은듯 합니다.

이는 대마도 정벌을 대마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행위 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 오해를 그대로 드라마들에서 왜곡되게 보여준 부분들이 많아서 인듯 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대마도 정벌은 고려시대 창왕(1차), 조선 태조 5년(2차), 조선 세종1년(3차)로 이루어 졌습니다.

 

기록을 보면 3번 모두 왜구의 해적 행위에 근절을 위해 그 본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한 군사작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3차 원정의 경우 세종대왕실록 4권의 태종의 말에서 우리 백성을 소란케 하는 왜구의 해적행위에 대한 정벌임을 교유하는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즉 현대의 자국 국민에 대한 위협등에 대해 미국의 보복성 폭격이나 이스라엘의 주변국에 대한 보복 및 제한전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즉 목표는 상대의 외교적인 굴복을 불러오기 위한 군사작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대마도 정벌의 경과는 조선측이 병선 227척에 1만 7천명이라는 병력을 동원하고도 활발한 섬의 정복 활동 보다는 제한적인 군사작전과 위력 과시를 행하는데 주력한걸로 보입니다.

 

이는 아래와 같은 성과를 가져왔으니 일각의 의견처럼 실패한 원정은 아닌듯 합니다.

 

대마도주는 명목상으로는 항복하여 조선왕을 신하의 예로 섬기는 동아시아식의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통상을 허락하여 왜구들로 하여금 평화적인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 하는 정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

<대마도주가 이렇게 항복하는 장면은 우리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항복장면은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자하기만 한 왕이었을까?

 

개인적으로 인자하기만 한 왕이란 무능한 왕이라는 조금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자한 왕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4군6진 개척후 막 개척된 척박한 지역에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워낙 척박한 지역인 4군의 이주는 그 과정에서 죽은자가 수천에 달하고 원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세종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백성을 내몸같이 아꼈다는 성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후 결국 한반도가 한민족의 강역으로 확정된 것을 보면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선의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 하는듯 합니다.

 

무리한 화폐도입 시도 또한 이로 인해 처벌받은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화폐도입 자체는 국가적인 혜안을 가지고 추진한 일이겠으나 당시의 물물교환 사회 환경상으로는 정착하기 어려운 조금 이른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다만 이러한 미래를 내다보며 준비한 정책들은 후세에나 평가 가능한 일이고 근본적으로 옮은 일이 반드시 당시 상황에도 옳다고는 볼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가정의 불행

 

세종 대왕은 여러 치적을 남긴 왕이지만 가정사가 일반 사람의 기준으로 봐서는 행복 하지는 않았습니다.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제위 초기 광평대군 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 합니다. 이후에는 소헌왕후 마저 승하하여 자식 셋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 됩니다.

 

필자의 경우 얼마전 꿈속에서 큰딸을 잃는 꿈을 꾸고 비록 꿈속에서지만 흔히들 창자가 끊어지는 만큼의 고통이라는 단장(斷腸)의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꿈에서 깨어 얼마나 안도 하였는지요. (꿈해몽을 찾아보니 길몽이라고 해서 로또를 구입 하였습니다 ㅡㅡ;;)

 

자식을 셋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이 어땠을까요?, 말년에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불교에 왕이 귀의하여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한 것은 자신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블로그 처음에도 첨부한 세종 대왕의 영정은 1970년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의뢰로 김기창 화백이 그린 상상화 입니다.

실제 어진(왕의 초상화)는 6.25 전쟁 당시 소실 되었으므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종대왕의 모습은 결국 상상화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럼 실제로 세종 대왕의 모습은 어땠을까?

세종대왕은 육식을 좋아하여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못할정도였으며 운동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습관을 가진 사람은 필연적으로 비만일수 밖에 없으니...부왕인 태종은 세종이 즉위하자 왕의 몸이 비중하여 걱정이어서 사냥등의 운동을 하도록 권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친어머니(원경왕후)의 3년 상 당시에 예를 지켜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세종이 고기없이 밥을 먹어 본적이 없어서 식사에 어려움을 겪어 살이 빠지고 몸이 축났던 것을 기억한 태종은 고기 관련 유언을 남기기 까지 합니다.

 

세종 4년 11월1일 (갑인)

 

 

-중략-

 

유정현, 이원, 정탁등이 육조 당상과 대간과 더불어 청하기를,

 

-중략-

 

"태종 의 유교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쫓아 상제를 마치라' 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어찌 위로 조종의 영을 위로하시고, 아래로는 신민의 바람에 쫓지 아니하십니까"

 

즉 3년상 동안에도 고기를 먹고 식사를 제대로 하라는 유언을 일부러 남긴걸 보면 태종의 세종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식습관과 정무에 무리하면서도 운동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세종대왕께서는 상당히 비만형으로 뚱뚱하셨으리라 예상됩니다.

 

말년의 병들도 요즘으로 치자면 당뇨, 안질, 방광염, 신장염등 비만으로 유발되는 병들과 합병증으로 고통 받은듯 합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

 

세종대왕

 

세종대왕

 

<화페속에서 점점 젊어진 세종 대왕, 세종 대왕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출처 : http://cafe.naver.com/gangneung62/994

 

 

맺으며

 

이글에서는 세종대왕의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모습과 단점, 실패한 정책등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기록으로 남은 명백한 업적과 성군으로써의 치적을 폄훼하거나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글의 약간의 부정적인 내용들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성군이며 우리역사속에 자랑스러운 위인 입니다. 다만 우리가 역사속에서 성군으로 받들고 완전무결한 좋은 왕으로 추앙하는 인물도 단점이나 실패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인물을 미화하기만 한 위인전을 어릴때에만 읽고 나이가 들어서는 독서를 거의 하지 않다보니 점차 현재에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로 세종대왕의 정승으로 유명한 위인 황희 정승도 간통의 혐의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한 사람을 공으로만 찬양하거나 과실로만 비난하거나 하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수 있게 단순하지가 않지만 유난히 현재의 우리사회 분위기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대립의 촉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功)은 공(功)대로 과(過)는 또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왕 나쁜왕 이상한왕 시리즈를 적어나가 보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글을 적는 시점이 오묘하다 보니 혹여나 글의 취지를 왜곡하여 특정한 정치인의 부친을 옹호하 하는데 이용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세종대왕을 한때 이사람과 비견하여 1970년대 부터 이미지형성을 주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익히 인지하고 있으며 설령 해당 인물의 공을 해당 집단에서 주장하는대로 모두 인정하더라도 비견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게 제 개인적인 사견 입니다.

 

해당 글은 사회에 뿌리박힌 인물에 대한 흑백적 이분법에 질려서 적는 글이지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옹호글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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