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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과 소셜미디어, 소식을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

기원전 490년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한 페르시아의 원정군 2만 6천여 명이 아테네와 가까운 마라톤에 상륙했습니다. 아테네의 밀티아데스 장군은 1만의 그리스 중장보병을 이끌고 수적으로 우세하던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밀티아데스는 아네테에 이 승전 소식을 빨리 전하려 하였습니다. 승전 소식을 빠르게 전해야 했던 이유는 사실 아테네에서도 페르시아군에 대한 승리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기에 만약 밀티아데스가 패할 경우 초토화 전술을 이용하여 아테네를 불태우고 후퇴하여 항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루머나 잘못 전달된 소식으로 성급한 행동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승리의 소식이 아테네에 빠르게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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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90. 마라톤 전투 

 

이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페이디피데스가 뽑혀 그는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0여km를 쉬지도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달려 이 소식을 전하고는 그만 쇼크로 인하여 숨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근대의 마라톤 경기는 이 일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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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 소식을 알리는 페이디피데스

 

이처럼 어떤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할 수 있던 방법은 과거에는 사람의 걷거나 달리는 속도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직접 말로 소식을 전달하거나 편지의 형태로 된 기록물을 전달 하였습니다. 이런 소식 전달 방법은 사실 꽤 느린 편이었고 문자가 없던 더 이전의 시대에는 종종 입을 통해 뉴스가 퍼져나가며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소식을 전달하는 방법중 가장 확실한 것은 역시 사람이 직접 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대의 전쟁터에서도 전령들이 말을 타거나 1차 세계대전 시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부대에 명령을 말로 전달하거나 명령서를 배달하는 전령병이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좀더 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고민되고 고안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군사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고대 국가의 판도가 점점 넓어져 적의 침입을 빠르게 알고 수도에서 요격 군이나 동맹군을 최대한 빨리 소집하여 대응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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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기록되는 초기부터 산꼭대기에 봉화대를 만들고 적군의 침입이나 국경에 발생한 문제를 봉화대에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자나 전령의 입을 통한 소식 전달처럼 상세한 내용을 알리지는 못했지만 연기의 형태나 색, 횃불의 형태로 그래도 다급한 몇가지 정도의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봉화를 통한 소식 전달에 대한 기록은 꽤 오래 전 시기부터 발견되는데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서주의 12대 왕인 유왕(?~BC 771)은 포나라의 미인이던 포사를 맞이하고 그녀를 매우 총애합니다. 그 총애가 매우 지나쳐서 포사가 아들을 낳자 원래의 왕후였던 신나라에서 온 신후와 태자를 폐하고 맙니다. 신나라가 원한을 품었음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포사는 잘 웃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번 웃으면 그 웃음은 남자의 애간장이 녹이는 듯한 웃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웃음을 못 견디게 보고 싶어하던 유왕은 결국 왕으로써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는 여산으로 행차하여 나라의 변고가 일어났다는 봉화를 올립니다. 이에 서주의 제후들은 모두 군사를 이끌고 허겁지겁 왕을 구하기 위해 달려옵니다. 이렇게 열심히 달려온 제후들에게 유왕은 장난이었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제후들이 어이없어 하며 군사들을 이끌고 하릴없이 돌아가는데 이 꼴이 매우 우스웠는지 포사는 그제서야 깔깔 웃으며 그 사람을 녹인다는 웃음을 유왕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훗날 이 웃음을 한번 보려 한 장난은 매우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앞서 원한을 품었던 신나라가 견융족과 연대해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옵니다. 유왕은 다급히 봉화를 올리게 하였지만 이미 한번 속은 경험이 있는 제후들은 아무도 달려오지 않습니다. 결국 서주의 수도는 함락되고 유왕은 견융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포사는 그 미모 때문에 죽이지 않고 견융의 추장이 데려갔다는 설이 입니다.

 

봉화뿐 아니라 큰 종, 북과 같은 음향 신호 역시 같은 수단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호동 왕자를 위해 낙랑 공주가 자명고를 찢었다는 이야기는 실제로는 자명고라는 북을 통해 전달되는 국가의 급변 신호체계를 무력화 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러한 봉화나 소리 신호는 빠르게 급변의 소식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쓰였지만 정확한 내용이나 상세한 소식을 전달하기는 어려운 방법이었습니다. 결국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상세한 소식은 사람이나 말과 같은 수단을 이용하여 전달해야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잘 닦여진 로마식 가도는 군사의 이동을 위해 필요한 도로이기도 했지만 황제의 명령서가 제국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전달되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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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년전 부부의 정담을 간직한 나신걸의 부인 신창맹씨의 무덤에서 출토된 한글 편지. 남편인 나신걸이 멀리 국경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며 고향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인데 부인의 안부를 묻고 농사 집안 대소사를 이야기한 한 편지인데 부인이 보물처럼 간직하여 그 무덤에 까지 넣어진 걸로 보입니다.

 

 

특히 국가의 공문이나 명령서 등을 전달하기 위해서 역참제와 파발제가 운영되었습니다. 역참은 그 역사가 오래되어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의 기록에 이미 등장하며 한국에서도 삼국 시대에부터 이미 역참제도에 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역참의 운송수단은 반드시 말은 아니었습니다. 역참에는 역원과 역마가 존재했으며 말을 주로 이용한 역마 및 파발은 고려시대에 자리를 잡습니다.

 

흔히 암행어사 출두 때 보여지는 손에 들고 보여주는 마패는 이 역참에서 급마 규정에 따라 말과 역졸을 동원할 수 있는 동원명령서와 같았습니다. 암행어사의 인장으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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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이러한 문자를 기록한 기록물을 통해 전달하기 여의치 않았던 배 위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깃발을 이용한 신호를 통신으로 사용하였는데 나폴레옹 전쟁시기의 해전에서는 이러한 깃발 신호를 이용해 전투시와 평시에 빠르게 배와 배 사이의 통신과 소식을 전달 하였습니다.

 

아래의 깃발 신호는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의지를 좌절 시킨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이 전투 직전 신호로 전달한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이라는 유명한 깃발 신호 입니다. "잉글랜드는 제군들이 각자의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 정도로 번역되는데 원래 넬슨이 이야기 한것은 "Nelson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로 믿는다(confides)라는 조금 더 부드러운 표현 이었지만 훨씬 더 간단하고 더 빠르게 계양할 수 있는 위의 문구로 변경할 것을 신호담당 장교가 제안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기대한다(expect) 란 조금더 압박감을 주는 문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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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의 유명한 깃발 신호, 당시에는 신호담당관은 이러한 신호체계를 외우고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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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기념 행사에 계양된 England expects...  신호

 

이 나폴레옹 시기의 육지에서는 세마포어라는 현대의 컴퓨터 계통에 남아있는 용어와 같은 이름의 수기 신호를 이용하는 세마포어 신호대가 육지에 가시거리 간격으로 설치되어 소식을 빠르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 세마포어 수기 신호는 신호대에 근무하는 담당자가 수기신호를 보고 신호대에서 신호대로 릴레이 형태로 소식을 전달하였는데 전신이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소식의 전달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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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포어 신호체계

 

 

세마포어 신호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1815년 웰링턴 공작이 프러시아 군과 함께 엘바 섬을 탈출하여 재기를 꿈꾸던 나폴레옹을 좌절시킨 워털루 전투 직후, 그 소식을 신속하게 영국 런던에 전달할 때도 이 신호대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거부였던 로스차일드가 그 신호대의 사관을 매수하여 'Wellington defeated Napoleon'의 문장에서 Napoleon이라는 목적어를 빼먹게 함으로써 마치 영국군이 패한 것처럼 전달하여 런던 주식 시장이 폭락한 틈에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 전 해에 실제로 있었던 1814년의 나폴레옹 전사 루머에 의한 주식상승으로 큰 차익을 취한 주식시장 사기 사건에 빗대어 누군가 잘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입니다. 

 

1814년 루머로 주식 시장을 뒤흔든 사건과 관련한 Nasica님의 블로그 글

http://blog.daum.net/costmgr/3941

 

글쓴이가 생각하기에 당시에 세마포어 신호대에 근무하는 사관을 매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잘못된 루머가 전달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세마포어 신호대가 활약하던 시기로부터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미국의 발명가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가 고안하였으며, 1844년 최초로 볼티모어와 워싱턴 D.C. 사이 전신 연락에 사용된 전신의 등장은 인류 역사에서 소식의 전달에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보입니다. 이 전신은 모스가 만든 부호와 전기신호를 통해 지금까지의 그 어떤 통신 수단보다 가장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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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 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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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telegraphy의 구조도

 

사실상 전신 이후에는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경우 거의 즉시에 가깝게 원거리 전달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등장한 전기신호를 통한 통신 방식들,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나 현대의 휴대폰 같이 무선으로도 음성을 직접 전달 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이 눈부시게 발전 했습니다. 음성뿐 아니라 영상과 소리를 함께 전달하는 방식도 크게 발전 하였지요. 하지만 전신 이후에는 이러한 통신 속도에 대해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과거보다 통신 수단이 고도로 발달하고 그 전달 속도도 더 빨라졌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통신의 속도는 전신의 발명과 함께 머나먼 먼 우주와 통신을 하지 않는 이상 큰 의미 없는 속도가 되었습니다. 전신 이후에는 이러한 통신 수단 적인 부분에서 잠시 관점을 바꾸어 소식을 전달하는 주체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환해 보겠습니다.

 

필자는 걸프전 발발 소식을 전하던 속보를 아직 기억 합니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초기에는 "페르시아만 사태" 였다가 "걸프만 사태"로 이름이 바뀌고 결국은 "걸프전"으로 변경되었던 이 사건에서 가장 스타가 된 것은 역시 "CNN" 이라는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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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CNN은 당시 걸프전을 현지에서 어떤 언론보다 빠르게 현지의 소식과 영상을 전달하여 전쟁을 생중계 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 국내 언론이나 유서 깊은 유럽의 뉴스 매체들도 CNN 채널의 방송을 인용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현장의 뉴스를 가장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언론, 뉴스 매체였고 걸프전 이후 꽤 오랫동안 이 지위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소식을 전하는 주체가 요 몇년 사이에 큰 변화를 겪고 있는 듯 합니다. 바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블로그나 웹사이트, 그리고 스마트폰의 확산과 함께 등장한 트위터등으로 대표되는 소셜 미디어가 등장했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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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어난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을 가장 먼저 전달한 것은 언론 매체가 아닌 바로 트위터라는 SNS였습니다.

 

전령과 소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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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현장에 있던 당사자나 목격자가 바로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공유한 트윗이 리트윗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언론 보도전에 사고 소식이 훨씬 빠르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예는 소식을 바로 현장에서 빠르게 전달하는 특징 외에도 앞서에 소개했었던 소식을 전달하는 수단들을 통제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국가나 군대에서 언론 매체라는 전문 조직으로 그리고 결국은 인터넷과 손안에 든 스마트폰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개인에게로 일부 넘어왔다는데 의의를 가집니다.

 

물론 과거에도 동네의 아주머니들이나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개인이 소식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여전히 존재했으나 오늘날처럼 개인이 전하는 소식이 이처럼 넓고 파급력 있는 수단이 된 적은 인류 역사상 없었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2010년 후반부터 시작되었던 이른바 "아랍의 봄" 이라 불리 우는 일련의 아랍권의 변화들도 인터넷과 스마트폰, SNS의 확산으로 설명하려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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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권의 민주화의 바람

 

과거에는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 정부나 군대 언론매체의 전유물로 이들을 통제 할 수 있었다면 소식 역시 통제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쩌면 우리는 IT 기술의 발달로 소식을 전달하는 주체가 어떤 조직, 권력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역사상의 의미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기존 매체들의 힘이 약화되긴 했지만 아직은 큰 영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이 소식을 만들고 전달하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는 더 이상 소식이나 언론은 특정 세력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 입니다. 물론 개인이 만들어 내는 거짓 소식이나 루머 등의 부작용도 고려되어야 될 것이지만 말입니다. 

 

이글을 보시는 여러분의 손에는 대부분 지금 즉시 소식을 만들어내고 널리 전파시킬 수 있는 스마트폰과 무선 인터넷, SNS라는 도구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찍이 일개 개인이 가져본 적이 없는 놀라운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도구를 써서 올바른 소식과 견해를 만들어 낼지, 루머나 거짓을 만들어낼지는 개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식을 만들어 내는 권력 만큼 중요한 의무와 책임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가지게 된 소식을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권력에 대가에 대해서는 위의 넬슨의 문구를 인용하여 같은 개개인의 의무와 책임에 기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we belive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지 및 내용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43012&cid=4375&categoryId=4375

http://cafe.naver.com/doulkim/560
http://blog.naver.com/shim4ro?Redirect=Log&logNo=9015747072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0750&cid=1608&categoryId=1608
http://blog.daum.net/nasica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52022335100890
http://cafe.naver.com/hj2009/234

http://cafe.naver.com/dieselmania/689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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