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입니다.
루이16세는 루이 15세의 장남인 루이 페르디낭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들이 요절하고 아버지 마저 1765년에 사망하여 11세에 왕세손이 되었으며 할아버지인 루이15세가 사망하자 1775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루이16세는 루이14세, 15세 시대를 거쳐 프랑스가 각종 대외 전쟁에 개입하고도 효과적인 성과 보다 엄청난 재정 적자만 안게된 결과물인 빚 투성이의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루이15세 때 부터는 적국이었으며 숙적으로 여겨진 오스트리아와 동맹이 진행되어 오스트리아의 황녀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정략 결혼을 하였습니다.
루이16세는 선량한 성품을 가졌으며 아마 좋은 시기에 왕이 되었다면 평범한 왕으로 치세를 마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루이 16세, 선량하며 다소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그가 왕이 된 시기에 이미 선대가 저질러 놓은 엄청난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아메리카 독립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국비가 끝없이 투입되고 있어 국력이 쇠약해진 어려운 시기에 왕이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출처 : Wikipedia
이 당시의 프랑스 민중의 생활은 경제의 침체와 무거운 세금이라는 이중고에 허덕이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귀족계급과 사회 자체에 불만이 팽배해 있어 개혁이 시급한 상황이었으며 그 불만이 왕과 얼마전까지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황녀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향하게 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강력한 오스트리아제국의 황녀로 부족함 없이 자라 밝고 명량한 귀족 여성이었을뿐이지만 프랑스의 재정 위기와 바로 얼마전까지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황녀를 곱지않게 보던 시선과 맞물려 "적자부인"이라는 비난 어린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국민의 안티가 된 셈인데 "빵이 없으면 케이크(과자)를 먹으라 하라" 라는 말은 실제로는 한적이 없지만 후에 혁명군들은 이말을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렸습니다. 이 말과 관련된 글들이 아직도 여러 서적에서 회자되니 만큼 적어도 이 발언과 관련한 루머에서 만큼은 그녀는 타블로 만큼 억울 할지도 모릅니다.
루이 16세 역시 조세 개혁을 통해 난관을 타개하려고 생각을 했던 만큼 어리석은 왕은 아니었으나 타고난 성품이 우유부단하고 강력한 추진력이 부족하여 시간만 끌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결국 재정 마련을 위해 1614년 이래로 열지 않았던 각 계급이 참석하는 삼부회의를 열어 급격히 성장한 부르조아 계급으로 부터 재정지원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무가 주어지면 권리도 요구하는법 기술, 학식, 재산등으로 실력을 가지게 된 브루조아 계급은 무능해도 단지 문벌로만 자신들의 위에 서 있는 귀족층에 대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 하려 하였습니다. 이 삼부회의가 결국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말앗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최근의 미국의 재정 절벽 관련 내용이 연일 보도 되었는데 현대의 미국과 같은 영향력이 있는 국가가 재정위기를 타개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이미 우리는 역사에서 짐작해 볼 수 있지 않나 생각 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어떻게 보면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불필요한 살육과 파괴, 전쟁이라는 결과물이 따라야 했습니다.
루이 16세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의 활동을 방해하자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1789년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물러난 루이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국경 근처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이송되어 탕플 탑에 유페되었습니다.
이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자신들의 나라에 까지 미칠까 두려웠던 유럽의 군주들은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는 이러한 대외 전쟁을 치루며 식량부족과 물가 상승으로 허덕여야 하였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는 다소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의 정권이 탄생하는건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어온 일인듯 합니다.
왕을 연금하고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국민의회와는 달리 1792년 9월 국민공회라는 새로운 의회는 공화제 선포와 함께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기로 의결 합니다.
루이 16세의 처형
출처 : Wikipedia
우리가 자주 접한 추하게 발버둥치며 단두대로 끌려 올라가 처형당했다는 마지막 모습과는 달리 실제 기록상에서는 왕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고 냉정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출처:Wikipedia
같은해 10월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역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녀 역시 마지막 까지 왕비로써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두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흔히 무능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결정적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여 프랑스혁명을 유발한 어리석은 왕과 사치스러운 여자로 국민의 증오를 받은 왕비라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여 왔습니다.
하지만 좀더 중립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당시의 재정 문제는 선대의 루이14세와 루이15세가 이미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으며 미국의 재정 절벽 협상 및 의료보험 개선 문제에서 보여주듯 재정 문제는 각계 각층의 반발을 무마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쉬운 일은 아닙니다.
루이 16세가 재정위기를 해결 하지 못했다고 쉽게 비난할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이 그렇게 단순한 해결법으로 해소될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의 우유부단함이 사태를 더 악화시킨 부분은 확실한 사실 입니다.
왕의 자리는 선량함만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다소의 반발이 있어도 결단해야하고 누군가에는 희생도 강요해야만 하는 폭력성을 가진것이 국가이며 그 수장이 왕 입니다.
그의 선량한 성격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는 왕으로써 책임을 져야 할 만한 사람이기에 그의 죽음에는 통치에 책임을 물은게 있다고 하지만 안타까운건 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 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는 많이 안타까운 부분이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로써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한 사실이 거의 없다는 점 입니다. 대부분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은 지어낸 이야기거나 루머에 불과합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에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더욱 부풀려 졌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있을때 국고가 파산지경이었던건 그녀의 화려한 생활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루이16세는 검소한 성격으로 선대들과 달리 왕실 재정 예산중 1/10만 사용하였으므로 그녀 역시 검소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 않게 배려한 사람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역대 프랑스 왕비중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에 관심을 가진 왕비 입니다.
더구나 그녀의 딸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을 이해시키려 교육하다가 딸의 불만을 샀을 정도로 자애로운 마음도 지녔던걸로 보입니다.
그녀의 "사치와 향락의 궁전"으로 널리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은 실제로는 시골처럼 꾸며져 있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한 수수한 궁이었습니다.
특히 유명한 "빵이 없으면 과자(또는 케이크)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겨 시종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슈(눈사람 모양의 서양식 단과자빵)를 주세요"라고 한 말을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퍼뜨렸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위엄과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주려 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은 증오와 미움을 받으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립니다.
죽은 뒤에도 그녀에게 씌어진 오명은 확대 재 생산 되어 드라마 영화 만화등에서 다루어 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가 이런 근거 없는 루머로 미움을 받게 된것은 적국 출신의 외국인 왕비였다는 점. 직접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담스러운 왕(혁명전까지 왕으로 모셨던) 보다는 좀더 편리한 왕비라는 점, 당시의 남성들의 영역인 정치 및 국사에 관여 했다는 점 때문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현대 민주주의 근간이 된 사건으로 이념주의 시대에 이 왕과 왕비는 없는 오명까지 모두 덮어써야 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이념은 꼭 이 두 사람을 악당으로 몰아가지 않아도 그 가치가 훼손 되리라 생각 되지는 않습니다.
역사속에서는 극단적인 방법인 혁명은 파괴적으로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도 합니다만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은 극단적인 파괴에 따르는 무고한 희생과 피가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이념주의 시대가 가고 보니 많은 피를 흘리고 쟁취해낸 프랑스 혁명 보다 왕 한명의 추방으로 끝난 명예혁명이 더 가치있게 느껴지는건 제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사는 동안 대한민국에서는 혁명과 같은 과격한 사건 없이 개혁과 합의로 부드러운 사회변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 초 첨부 : 바로 내가 꿈꾸던 변혁, 피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그녀를 몰아낸 촛불 혁명을 목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