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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의친왕,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왕이야기 12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 입니다.

 

사실 이분은 의친왕이란 왕의 명칭을 가지고 있으나 왕이야기에 소개한 다른 왕들과 달리 실제 왕위에 근접하는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못했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왕 이야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조선시대 망국의 원인중 하나로 지탄 받는 왕족들이 망국 이후의 친일을 하기도 하면서 삶을 영위한 반면, 일제에 억압된 불행하고 수동적인 삶속에서도 그나마 왕족으로써 마지막 의기를 지니고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거의 유일한 조선의 마지막 왕족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의친왕의 삶

 

의친왕 이강은 고종의 다섯때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한때 궐밖으로 축출 되기도 하였습니다. 궁밖에서 살던 귀인 장씨는 1900년에 숙원에 추증받고 1906년에 귀인에 다시 추증 되었습니다.

 

성인이된 후 1893년 김사준의 딸 김수덕을 아내로 맞았고 청일전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대사로 일본을 방문한길로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 하다가 버지니아주 로노크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합니다. 1898년에 아버지 고종이 일제에 의해 허울 좋은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자 의화군에서 의친왕으로 봉해졌습니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으며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습니다. 원래는 황자 서열로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의심많은 고종의 견제와 후궁으로 귀인이된 엄귀비, 일제에 협력하여 권력을 쥔 이완용으로 인해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결정한 순종의 황태자로 의친왕이 아닌 이복 동생인 영친왕 이은이 세워지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이는 녹녹치 않고 순종적이지 않은 아들이었던 이강과 조카 이준용(고종의 조카, 대원군의 장손)등을 의심하고 견제하려는 고종의 못난 마음과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의 책략, 혹여 실권을 잃을까 두려워한 이완용의 계산등이 영합하여 맞아 떨어진 결과 였습니다.

 

의친왕,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의친왕 이강

 

한일 합방 직후에는 친왕에서 공으로 강등 당하여 이강 공이 됩니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 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지원 하였습니다. 실제로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여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을 정도로 자신과 왕족의 왕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 자신도 미국 유학등의 생활을 통해 왕족으로써 보다 지식인으로써 조국의 자주 독립을 염원했던 걸로 보입니다. 결국 1919년 의친왕 이강은 변장을 하고 신의주를 출발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는 시도를 하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친왕 일행이 만주 안동에 도착할즈음 결국 일경에게 적발되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구 황족들에게 허용되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의친왕 이강의 공 작위도 박탈되어 그의 공위는 장남인 이건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후 일본으로 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아야 했던 그는 끝까지 거절하며 저항하였으나 그로 인해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후 주색에 빠진것을 가장(또는 실제로 실의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역사의 여러 예를 보면 망국의 왕족들은 주색에 빠진듯 연기하며 일생을 보낸 경우가 많은듯 합니다.

유명한 삼국지의 유비의 아들 유선이 촉의 망국 후에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목숨을 부지하고 의심을 걷어내는 최선의 방법 이었을까요?

 

그는 정비 외에도 13명의 후실들이 있었는데 무려 12남 9녀의 자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마저도 일제에 의해 황족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다산을 통한 저항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지나친 확대 해석인듯 합니다. 그 보다는 위장이었던는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실의에 의해서였던 주색에 빠져있는 동안의 결과로 봐야 할듯 합니다. 그것이 연기였던 실제였던 말입니다.

 

광복 직후에는 임정 요인들인 김구, 김규식 등과 면담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을 삼가 하였습니다. 이 역시 황족으로써 전면에 나서질 않기를 바랬기 때문인듯 합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에 의해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6.25 피난 이후에는 사동궁 별궁에 거주하였습니다. 단 황족으로 어떠한 예우도 없는 조건이 었습니다. 1955년 8월 16일 79살의 나이로 타계 하였습니다.

 

 

그의 자식들

 

장남인 이건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의 중좌의 계급을 가집니다. 후에 일본에 귀화하여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합니다.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하였으며 일본 군부에서 인정 받으며 사실상 일본인으로 군인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아버지 의친왕은 사실 이 아들과는 거의 의절 상태였던 걸로 보입니다. 일제의 패망 후에는 생계를 위해 단팥죽과 산양젖을 팔거나 제과점을 운영하는 등의 장사를 하였습니다. 가족과 시영주택을 임대하여 살았으며 1990년 12월에 일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의친왕,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이건과 마쓰다이라 요시코

 

둘째 아들인 이우는 매우 잘생긴 왕자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 황족이 아닌 조선인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의친왕의 뜻을 받아들여 박영효의 서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을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과는 달리 나름의 저항을 한 셈이지만 그 역시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어 일본 제국 육군으로 복무해야 했습니다. 1945년 6월 패망을 앞둔 시점 일제는 그를 중좌로 진급시키고 일본으로 전출시킵니다. 이미 일본의 패망을 직감하고 있던 그는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일본으로 가지 않거나 전출을 지연시키려 노력했으나 결국은 히로시마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1945년 8월 6일 부임지로 출근하는 도중 원폭에 피폭되어 8월 7일 고열로 신음하다 사망합니다.

 

의친왕,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이우

 

 

의친왕,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이우와 박찬주

 

의친왕이 61살이 되던해 그에게 19살의 창덕궁의 전화 교환원인 홍정순이 마음에 들어 옵니다.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신여성이던 홍정순씨도 의친왕이 싫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그녀는 의친왕의 13번째 후실이 됩니다.  전화 교환수와 사랑에 빠진 의친왕,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자주 듣다가 정이 들었을까요?  어쩌면 조선 최초의 폰팅을 통해 맺어진 인연으로 기록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홍정순씨의 아들 중 이석씨는 "비둘기 집"이란 노래를 부른 바로 그 가수 이석씨 입니다. 이석씨 역시 생계를 위해 노래를 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의친왕,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가수 생활 당시의 이석

이 에피소드는 책-사라진 직업의 역사에서 참조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의친왕의 12남 9녀중 사망한 사람을 제외해도 이석씨 및 한 두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해외에서 거주 한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사정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볼 따름 입니다.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족들

 

망국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이후에 나라가 망했는데도 일본에서 잘 살고 있다던가 일본의 귀족, 군인이 되어 잘 먹고 산다 등의 비난을 받기도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족들,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의 사망시 필자의 기억에도 국내 어디의 뉴스에도 그 소식을 볼 수 없었던듯 합니다. 약간은 의도된 듯한 철저한 무관심이었는데 요즘 재 조명되는 불행한 삶을 산 덕혜옹주나 황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들은 동정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모두 가슴아픈 고난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그들도 결국 희생자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의친왕과 같이 적어도 일부 지식인들의 변절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고 의기를 보여줬던 황족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재 조명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드라마등의 영향으로 왕족에 대해 흥미위주의 접근이나 또는 역사의 결과로 그들을 단죄하는 의견도 많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다시는 겪지 않아야 할 망국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떠 올리고 그들 역시 한 인간의 불행한 삶으로 돌아봐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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