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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두려움으로 바위산에 하늘궁전을 짓다

14번째 왕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왕국의 왕인 카샤파(카사파, Kashypa) 1세 입니다.

 

뜬금 없이 이번엔 고대 스리랑카의 왕이냐 하실 수 있겠지만 TV를 보다 우연히 보게된 대한항공 CF에 나오는 시기리야와 카샤파왕이 너무 궁금해져서 정보를 찾아보고 나니 이 왕의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될듯하여 왕 이야기로 써볼까 합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출발해서 자료들을 참고 하다보니 오역이나 잘못된 발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한항공의 스리랑카 CF

 

스리랑카의 다수민족인 신할리족의 고대왕국인 아누라다푸라(BC 377 ~ AD 1017) 왕국은 여러 씨족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왕조를 세웠는데 이중 마우리아 왕조 (463-691) 의 두번째 왕인 카샤파는 시기리야(Sigiriya)라는 깍아지른 암벽위에 이른바 하늘궁전을 지은 왕입니다.  시기리아(Sigiriya)는 신할리어로 "사자바위"를 뜻 합니다.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시기리아 궁, 출처 Flickr

 

도대체 이 왕은 무엇때문에 왕국의 수도를 버리고 올라가기도 힘든 이 바위산 꼭대기에 궁과 성을 쌓았을까요?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실론 이라고도 뭅렸던 스리랑카는 독특한 위치와 모양때문에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예전에 실론티라는 음료수도 있어서 실론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생

 

카샤파 왕의 아버지는 다투세나(Dhatusena) 왕으로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마우리아 왕조의 개창자 입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다센케리로도 불리웁니다. 남부 인도세력의 침입으로 무너진 왕과 왕국을 대신해서 저항하여 결국 이 남부 인도 침입자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스스로 힘으로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는 내치에 힘써 8개의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관개 운하를 통해 농업의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투세나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왕위에 오르기전 평민 여인에게서 얻은 카샤파와 왕위에 오르면서 혼인한 왕족 출신의 왕비에게서 얻은 모갈라나(Moggllana)가 있습니다. 즉 카샤파는 왕의 아들이며 맏형이면서도 정식 왕비가 아닌 첩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을 가지게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별 받던 서자, 바스타드, 사생아 뭐라고 불리우던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신분이고 왕위에 적합하지 않는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찬탈

 

모갈라나가 원칙적으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이지만 아마도 카샤파는 여기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출신 때문에 왕의 아들이면서 숨죽이고 사는 것보다는 스스로 왕위를 쟁취하려 마음 먹은 듯 합니다. 그는 왕군의 지휘관인 미가라(Migara)에게 접근하여 그의 지원을 얻어 결국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 반란은 성공해서 아버지인 다투세나왕을 사로잡아 연금한 후  473년에 결국 마우리라 왕조의 두번째 왕이됩니다. 원래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모갈라나는 달아나 남부 인도로 망명을 합니다.

 

미가라와 카샤파는 다투세나에게 숨겨둔 보물이 있을것이라고 믿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다스리려면 통치비용이 필요하고 다투세나가 통치를 하며 사용한 그 자금원의 출처를 두 사람은 다투세나가 숨겨둔 보물에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구나 카샤파는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했으니 이를 무마할 더 많은 재화가 필요 했으리라 짐작 됩니다.

 

카샤파가 보물을 요구하자 다투세나는 그들을 자신의 치세 동안 만들어진 대규모 관개시설로 데려가서 물을 마시고는 이것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보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격분한 카샤파는 아버지인 다투세나를 생매장해서 죽여버리고 맙니다.

 

이 일화로 볼때 다투세나는 매우 현명했던 왕인것 같습니다. 관개를 통해 물을 공급하는것은 농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그로 인한 생산력의 증가는 국부를 가져다 주었을테니까요.

 

 

시기리야에 궁을 짓다

 

 그후 카샤파는 부친 살해에 대한 죄책감과 백성들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또 인도로 달아난 모갈라나가 돌아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통적인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떠날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시기리야라는 바위산 꼭대기에 성채와 궁을 짓고 주변에 도시를 건설하여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시기리야는 모든 방향에 대해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곳으로 적의 공격이 있다면 미리 알아채고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Flickr

 

이 궁전은 1500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한 시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을 받아둘수 있는 저수조와 바위산 주변의 복잡한 지하 관개시스템을 통하여 바위산 꼭대기까지 물을 공급하며 궁전의 풀과 분수들에 물을 공급합니다.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시기리야의 저수조, 출처 : Flickr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시기리야의 분수, 출처 : Flickr

 

궁전으로 통하는 길은 거대한 사자가 업드려 입을 벌린 형태로 돌을 쪼아서 조각했으며 현재는 사자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지만 원래는 사자의 입을 통해 궁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주변의 많은 풀장과 저수조, 분수, 부속건물들로 둘러싸여 궁전이 세워졌습니다.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지금으로 부터 1500년전에 어떻게 저런 산바위산 꼭대기까지 자재를 운반하고 관개 수로를 만들었을까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아마도 스리링카의 고대왕국은 관개와 건축기술을 독점한 세력이 왕권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이 시기리야 궁에는 이른바 꽃을 든 아름다운 처녀들이 묘사된 벽화도 유명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그림들이 훼손되었지만 그 예술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랄수 있습니다.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카샤파 왕과 시기리야 궁

출처 : Flickr

 

카샤파왕은 이 궁전과 도시를 짓는데 거의 11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되어 겨우 6개월 남짓 이 궁에 머물렀을때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집니다.

 

죽음

 

그것은 결국 모갈라나가 남부인도에서 군사를 모아 바다를 건너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공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카샤파왕은 이 난공불락의 바위산을 내려와 모갈라나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패하여 자신의 검으로 자살하고 합니다.

 

많은 기존 글들에서 카샤파가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안전해지기 위해 난공불락인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짓고 틀어박혔다고 말합니다. 실제 그가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는 모르지만 카샤파가 이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지은 이유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난공불락이어서가 아니라 시야에 대한 전략적 이점 때문입니다.

 

이러한 난공불락의 성들은 사실 주변에 변수를 미칠만한 세력이 있을때만 난공불락입니다. 즉 다른 세력이 구원 오거나 장기간 원정중인 적의 빈집을 노리거나 할만한 세력이 있다면 쉽게 함락되지 않고 몇달을 버틸 수 있는데서 그 유용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섬이고 카샤파와 모갈리나외에 다른 세력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시기리야 궁을 그냥 포위만 해도 궁안의 사람들은 아마 몇달안에 굶어죽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그 좁은 바위산위에는 많은 군사를 둘 수도 없습니다.

 

카사파가 시기리야 바위산에 성을 쌓은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방향으로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즉 적이 공격해 온다면 빠르게 발견하고 정보를 얻어 기선을 제압하고 요격하기 위한것입니다. 통신 수단이 발전하지 못한 과거에는 적의 접근을 빠르게 발견하고 대응하는자가 승기를 얻는게 당연 합니다. 실제로도 카샤파는 농성한 것이 아니라 모갈라나를 요격하기 위해 바위산 위의 궁전을 내려옵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부모를 살해하고 이복이긴 하지만 동생과 죽느냐 죽이느냐 하고 끝장을 봐야 하기도 하는 무서운 자리인듯 합니다. 카샤파 왕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까마득한 바위 위에 성벽을 쌓고 궁을 지었지만 결국은 6개월도 머물지 못한 이 궁전은 1500년의 세월이 지나 관광지로 남아 인간의 씁슬한 권력욕과 그 말로만을 전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참조 :

http://en.wikipedia.org/wiki/Sigiriya

http://en.wikipedia.org/wiki/Kashyapa_I_of_Anuradhapura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monarchs_of_Sri_Lanka

http://en.wikipedia.org/wiki/Dhatus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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