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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성종, 연산군이라는 파국을 잉태한 성군 -1-

성종은 그 치세에 신하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은 사랑 받은 군주였습니다. 율곡 이이는 "그 영특함과 슬기로움이 우리나라 천년에 우뚝 솟아오를 만큼 참으로 성스러운 주상" 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극찬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연산군은 조선 역사에서 최초로 반정으로 폐위된 폭군의 상징이기도 하고 성종 본인도 현대에 와서는 신하들에게 성군으로 추앙 받지만 아무것에도 도전하지 않은 왕으로 그 리더십이 의심받고 있는 양면성을 가진 왕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쓰는 이번 왕이야기는 조선의 사대부가 사랑한 성군이지만 폭군이라는 연산군을 잉태하게 된 이 성종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다루어 볼까 합니다.


성종은 세조의 왕비였던 할머니 정희왕후와, 세조의 공신이었던 장인 한명회, 그리고 어머니 인수대비의 절대적인 비호속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력한 외척의 힘과 권력, 수렴청정이라는 조선 사대부들이 혐오하던 힘이 결탁한 뒷 배경으로 왕위에 오른 왕입니다.


성종의 아버지는 덕종(의경세자)이고 세조의 첫째 아들입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기대를 받던 맏아들이자 세자였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의 둘째 아들인데 이 역시 4살 원자(제안대군)를 남기고 요절했습니다.


성종의 묘 선릉, 이미지 출처 : 주알주동 포토에세이


서열대로라면 원자가 왕위를 이어야 하지만 원자의 나이는 겨우 4살, 이미 50대였던 정희왕후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수명을 볼때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더라도 어쩌면 원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 입니다. 어린 단종의 최후에도 세조의 동반자로 관여한 정희왕후로서는 역사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였고 이때문에 정희왕후의 선택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13세이던 자산대군(성종)을 왕으로 삼고 스스로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정희왕후


정희왕후는 세조의 비이며 성종의 할머니 입니다.


정상적인 서열에 따른 왕위 계승자도 아니었던 성종(자산대군)은 강력한 외척세력이었던 한명회가 장인이었고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청주 한씨 집안의 인수대비가 어머니였습니다. 더구나 계유정난때 세조에게 직접 갑옷을 입혀주며 독려했다는 강단있는 할머니 정희왕후는 인품으로는 적격자 판정을 받았던 성종의 형이였던 월산대군은 그를 뒷받침 해줄 세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동생인 자산 대군(성종)을 다음 왕으로 선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의경세자의 첫째 아들, 즉 정희왕후의 맏 손자인 월산군은 명문가이긴 하지만 권세가는 아닌 다소 세력이 미약한 병조판서 박중선의 사위였는데 이는 둘째아들 예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있어 세손이었던 월산군이 걸림돌이 될까바 미리 안배한 세조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둘째 아들 예종이 1년 2개월 만에 자신을 따라 졸 할 줄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둘째 였던 자산군은 13세로 장인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과 외가의 힘이 충분히 왕권을 지켜줄수 있었고 정희왕후가 최소 5~7년 정도만 수렴청정을 해도 충분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계유정난때 수양대군(세조)에게 갑옷을 입히는 정희왕후

계유정난의 밤 내부 인사들의 의견 충돌로 거병를 망설이던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받쳐들고 기다리는 행위로 남편을 독려한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화로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남편의 정치적 야심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남편의 결심이 굳어지고 거병일이 잡힌것을 알자 태도를 바꾸어 남편을 격려하는 강단을 보였습니다.


또 다른 설로는 정희왕후의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16세로 이미 성인에 가까운 월산대군을 왕으로 택할 경우 자신은 뒷방에 머무르며 대왕대비로 예우를 받는데 만족해야 하나 어린 자산대군을 택하면 수렴청정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오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왕이 될수 없음을 한탄하던 수양대군(세조)을 도와 결국 왕위를 차지한 철의 여인 정희왕후의 성정을 볼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로도 생각됩니다.


신숙주 등이 굳이 이를 청하고, 이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전략)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니 온 나라 신민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자성왕대비전하(정희왕후)께서는 슬픈 정리를 조금 억제하시고, 종사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중략) 모든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들어 재단하여 사군(성종을 이름)이 능히 스스로 정사를 총람하기를 기다려 환정(還政)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를 허락하였다.


-[성종실록] 1권, 즉위년(1469 기축) 11월 28일(무신)


결국 정희왕후는 469년부터 7년 동안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종친 정리작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정희왕후 개인적으로는 단종과 종실에 대한 죄책감으로 불교에 귀의하고 이를 신봉하였지만, 정책면에서는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을 더 강화시켰고 또한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고 농업과 잠업을 육성하는등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를 정돈하는 등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한 공정한 정치를 통해 훗날 성종이 친정을 하기 위한 문물제도의 추춧돌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를 도운 것은 세조의 근신이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었습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던 해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미련없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세조가 거둥(擧動)하던 온양온천에 자주 내려가 있었고 죽음도 온양에서 맞이하였는데 진퇴가 분명하고 사리 분별이 명확한 사람의 본보기와 같습니다.


인수대비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그녀는 사후에 주어진소혜왕후라는 시호보다 인수대비라는 명칭과 연산군의 할머니로 더 유명한 여인 입니다. 예전 조선왕조 500년 드라마에서 설중매라는 부제로 고두심씨가 연기했던 인수대비에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비중있는 여배우들이 인수대비 역을 많이 한것 같습니다. 특히 채시라씨는 2번이나 인수대비 역을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대하사극매니아 카페 http://cafe.naver.com/sakcafe/83348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韓確, 1403~1456)의 6째 막내딸 입니다.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는습니다.

인수대비의 집안 배경은 엄청납니다. 그녀의 고모 2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습니다. 부친인 한확의 누이가 명나라 공녀로 갔다가 명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여비(麗妃)였습니다. 말하자면 인수대비 한씨의 큰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었는데다가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宣宗) 또한 한확의 또다른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명나라 왕실과의 이 관계는 인수대비의 집안에 큰 세력을 안겨주었고 세조 역시 한확을 중히여겼습니다. 나중에 세조 자신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명나라로 보낸 사신도 한확이었습니다.


친정의 이런 집안 배경때문에 자연스레 그녀의 집안은 종실과 연을 맺게 됩니다. 그녀 역시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와 혼인하여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설중매(雪中梅)... 눈속에 피어난 매화라는 단어가 잘 어울릴 정도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 했으며 폐비윤씨 그리고 연산군과의 이야기들은 다음 이야기들의 스포일러가 될수 있어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며 좀더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성종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오늘은 본편의 프리퀄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용 참조

www.wikipedia.org

조선왕조 잔혹사 - 책비출판사, 조민기 지음-

성종 - 해냄출판사, 이한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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