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 시리즈 명칭을 왕 이야기로 변경 합니다. 제목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조금 줄여 보았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국 춘추시대의 서막을 연 정장공 입니다.
사실 정장공은 엄밀히 이야기 하면 왕이 아닌 공으로 주나라 왕의 제후의 신분 입니다.
하지만 제글에서는 명칭보다는 왕(King)을 한나라를 통제한 군주라는 넒은 의미로 봅니다.
실제로 춘추시대의 제후국의 공들은 후에 전국시대에는 모두 왕으로 칭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은 주나라 왕을 천자로 모시는 수백개의 제후국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의 질서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주나라의 지배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천자로써의 권위는 아직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왕실의 힘은 약해지고 점차 제후국들의 힘이 강성해지던 시기에 최초로 종주국인 주나라 왕의 정벌에 맞서서 전쟁을 벌인 이가 정장공입니다. 천자인 주환왕은 정장공에 패배했을뿐만 아니라 정나라 장수 축담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치욕을 겪습니다. 더군다나 정장공이 "자신을 지킬뿐이지 천자를 욕보여서는 안된다"며 추격하지 않았기에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는것을 간신히 면하였습니다.
결국 주나라는 종주국으로써의 지위와 위신이 땅에 떨어져 이후 역사에서 다시는 예전의 위신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이후의 시대에는 약해진 주왕실을 대신하여 제후국중 가장 강한 나라의 제후가 패자가 되어 회맹을 열고 주나라를 받드는 척하면서 사실상 다른 제후국들의 지배자가 됩니다.
춘추시대의 중국지도
정장공은 상당히 영민한 군주이자 지략가입니다.
북융의 침입을 격파하고 송,위를 쳐서 굴복시키고 허와 대, 성나라들을 점령하거나 굴복시켜 춘추시대 초기의 정나라를 강대국으로 성장 시킨 군주 입니다.
이 과정에서의 주위 제후국들과의 연합을 만드는 과정이나 적대국을 고립시키고 상대국들에 불화를 일으켜 동맹을 깨어지게 만든 후 공격을 가하는 등 정치적, 외교적으로 놀라운 수완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러한 정장공의 화려한 업적 보다는 그가 살아서 어머니를 황천에서 만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정장공의 어머니 강씨(무강)는 정장공보다 동생인 공숙 단을 더 편애 하였습니다. 정장공의 아버지인 정무공에게 세자로 공숙 단을 세우라고 졸랐으나 정무공은 허락치 않고 장자인 오생(정장공)을 세자에 책봉 합니다.
정무공이 죽고 정장공이 즉위한 뒤에도 무강은 공숙 단을 군위에 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해 당시 작은 공성에 봉해져 있는 공숙 단에게 경성이라는 대읍을 주라고 정장공을 핍박합니다. 심지어 곡기를 끊고 죽겠다는 위협까지 하니 정장공은 어쩔수 없이 공숙 단에게 요지인 경성을 봉지로 나눠줍니다.
공숙 단은 경성을 영지로 얻은 후에는 군대를 모으고 군마를 사들이며 세력키우기에 몰두합니다. 정나라 신하들이 이는 장차 문제가 될거라고 판단해서 정장공에게 우환을 제거하자고 여러차례 간하였으나 정장공은 기다리라고만 합니다.
얼마뒤에는 공숙 단이 무단으로 군사를 움직여 경성부근의 성들을 차지하자 대부 공자 여가 "한나라에 두개의 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라며 공숙 단을 제거할것을 강경하게 주장 하였으나 정장공은 처음에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물리칩니다. 하지만 이는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 앞에서 모후의 말을 거역하고 형제를 죽이는 계책을 논하는게 싫었던 정장공의 깊은 뜻으로 공자 여가 다시 은밀하게 찾았을때 내심을 털어놓습니다. 즉 어설프게 손을 써서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에게 불의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던 것 입니다.
공자 여와 논의한 후 정장공은 주나라 조정에 입조한다며 대부 제족에게 정사를 맡기고 주나라로 출발합니다.
정장공의 어머니 무강은 드디어 정장공을 죽이고 공숙 단을 군위에 세울 기회가 왔다고 매우 기뻐하며 밀서를 공숙 단에게 보냅니다. 무강을 철저히 감시하던 공자 여가 밀사를 살해하고 밀서를 빼앗아 정장공에게 보고하자 정장공은 밀서를 다시 봉하여 이를 공숙 단에게 보냅니다.
공숙 단의 답장에는 5월에 정나라 도성을 공격하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음모의 증거를 손에 넣은 정장공은 행동을 취하여 공숙 단이 군사를 이끌고 경성을 출발하자 공자 여에게 군사를주어 즉시 경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합니다. 경성을 점령한 후에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언론플레이를 통해 정장공의 정당함과 공숙 단의 신의없음, 음모의 비열함을 백성들에게 선전하며 홍보합니다.
사태가 잘못된것을 안 공숙 단이 황급히 경성으로 회군하였으나 이미 이지역에 널리 퍼진 민심을 접한 공숙 단의 병사들은 역적을 따르지 않겠다며 대다수가 달아났습니다. 황급해진 공숙단이 언읍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미 그곳에는 정장공이 군사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숙단은 "아아 모후가 나를 망쳤구나. 무슨 낯으로 형님을 대하겠는가?" 라고 탄식한뒤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정장공은 골육의 정이 있었던 사람인지라 동생의 시체를 안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의 편애로 비롯된 비극은 정장공을 매우 분노케 합니다.
정장공은 모후를 영 땅에 유폐시키고 "내가 황천에 가기 전까지는 결코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정장공은 동생을 죽이고 모후를 유폐시킨 일로 늘 마음이 늘 언짢았고 영 땅에 유폐된 모후가 마음쓰였습니다. 동생을 편애 했고는 자신을 죽이고자 했지만 그래도 친어머니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미 내뱉은 황천에 가기 전까지 만나지 않겠다는 선언 때문에 모후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정장공은 군주가 내뱉은 말을 쉽게 번복하면 이후로는 어떤 군주의 발언이나 말도 신하들이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을 잘 아는 군주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곡을 다스리던 영고숙이 정장공을 찾아와 올빼미를 바칩니다.
정장공이 "이 새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묻자 영고숙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 왕을 간접적으로 나무랍니다.
"올빼미라는 새이옵니다. 올빼미는 어릴때 어미가 먹여주는 먹이를 먹고 자라지만 다 자란 뒤에는 그 어미를 쪼아 먹기 때문에 불효한 새라고 하옵니다."
얼핏들으면 현재의 왕이 처한 상황을 살짝 비꼬는 이야기 입니다. 왕의 성격에 따라서는 분노하여 당장 처벌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정장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때마침 시녀들이 염소고기를 가져오자 정장공이 염소다리 하나를 떼어 영고숙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영고숙은 부드럽고 맛있는 부분을 따로 떼어내 정성껏 싸서 소매속에 넣었습니다.
"그대는 왜 먹지 않고 고기를 싸는가?"
정장공이 의아해 하며 묻자 영고숙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어머니가 한분 있사온데, 집안이 가난해서 좋은 고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좋은 고기를 신에게 주셨사오나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신은 차마 먹을 수 없습니다"
정장공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결국 정장공은 영고숙에게 어머니를 황천이 아니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실은 말하며 영고숙에게 지혜를 구합니다.
영고숙은 정장공에게 땅을 파서 샘물이 솟아나면 그곳에 지하실을 만들어 모후를 만나라고 합니다. 원래 황천은 땅속의 강, 죽은 후에 간다는 사후세계를 뜻하는 의미이지만 사실 글자의 뜻 자체는 황토속의 샘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장공은 영고숙에게 명하여 곡유땅 우비산에 땅을 깊게파고 샘물이 솟아나오자 샘물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그 방안에서 어머니를 만납니다.
모자는 서로 지난날을 후회하며 눈물로 상봉했고 정장공은 어머니를 모시고 도읍으로 돌아갑니다. 백성들은 정장공을 지극한 효심을 가진 사람으로 칭송했고 영고숙은 대부의 벼슬과 병권을 맡게 됩니다.
이 멋진 이야기는 두가지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시선은 정장공을 송, 위를 굴복시키고 종주국 주나라마저 패퇴시킨 모습에서 보여준 지략가이자 현실적인 감각의 정치가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이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될 정도였다는 건 그만큼 널리 퍼진 이야기이며 정장공 자신이 전국에 선전 하였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효가 중요한 가치이던 시대에 한나라의 군주가 비록 반역을 계획했다고는 하지만 어머니를 유폐하고 골육인 동생을 죽게 만든 부분은 군주로써 약점일 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조선시대 광해군 폐위의 최대 명분이 비록 서모 이지만 명목상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한것과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폐륜이었다는 사실로 볼때 비록 정당하게 반란을 진압하였다고는 하나 이런 민심이 자신의 군위를 위협할만한 명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장공 같이 똑똑한 인물이 몰랐을리 없다는 점 입니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바 있듯이 뛰어난 지도자들은 모두 휴먼코미디나 휴먼드라마를 능숙하게 연기할줄 아는 사람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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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던 이 한편의 휴먼드라마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고숙은 대부 벼슬과 정나라의 병권을 쥐는 높은 지위로 보상을 받았고 정장공은 불효, 불의한 군주에서 효성이 지극한 군주로 이미지 변신과 함께 민심을 얻어 군위를 단단하게 굳히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정장공과 영고숙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시선 입니다.
정말 왕의 불효를 막기 위해 이러한 계책을 생각해 낼 만큼 왕을 위하는 충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어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인 아름다운 군주로 바라보는 것 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감동 실화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켜 널리 후세에 까지 자연스레 전해져오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가지 시선 모두 사실이다. 라는 생각 입니다.
아무리 많이 선전하고 홍보해도 실제의 감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널리 퍼져 나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습니다.
역사상의 뛰어난 왕들은 명분과 실리, 자신이 원하는 것 사이의 타협점이나 방법을 찾아내는데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며 한가지 목적으로 한가지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평범하거나 무지한 군주와 명군의 차이점은 명군들은 하나의 일을 행함으로 두 세개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아닐까요?
살아서 황천에서 어머니를 만난 정장공의 이야기는 그의 뛰어난 지략을 보여줌과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의 주요한 도덕적 덕목인 효심에 대해서 군주가 폐륜에서 벗어나 백성들에게 민심을 얻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