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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연산군, 모정에 굶주렸던 폭군. 왕 이야기 9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 입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광해군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평가되었으나 최근 광해군은 재평가를 받으며 그 위상이 많이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여전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의 재위 2/3 에 해당하는 전반기의 기록만보았을때는 성군의 자질에 손색이 없는 기록입니다. 그런 그가 왜 역사에 폭군으로 남게 되었을까요

 

 

연산군은 폐위되어 영정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진은 안재모씨가 연산군으로 분하여 연기한 KBS 사극 왕과 비 중 한장면

 

출생 과 어머니의 사사

 

연산군은 1476년 음력 11월7일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종은 첫아들을 총애하여 태어나자 마자 원자에 책봉되고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종과 폐비 윤씨는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의 질투심이 심하여 왕이 다른 후궁과 있는데 갑자기 방문을 한 일 과 격한 부부 싸움 끝에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야사)으로 인하여 그 자리를 노리던 후궁들의 참소를 불러왔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진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에 분노를 샀습니다. 결국 윤씨는 성종의 명에 의하여 궁궐에서 축출 되어 사사 당합니다.(1479년)

 

 

성장과정

 

저도 아이들이 있다보니 경험적으로 3~5세의 아이들은 엄마에 대해 유착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엄마를 대신 할 수 없는 이 시기에 연산군은 어머니를 잃고 계모인 정현왕후의 아들로 자라납니다. 하지만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와 육촌이 폐비 윤씨 축출에 앞장섰던 만큼, 일반인으로 비유 하자면 쫓아낸 전처소생 아들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을 주며 키웠을지는 의문이 아닐수 없습니다.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어느시점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친모가 아니며, 친모인 윤씨는 폐출된것 정도는 알게된듯 합니다. 그게 어떤 충격 이었을지는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한 단면을 살펴 보자면 사춘기 소년 시절의 일탈로 나타나 부왕이 아끼던 애완용 사슴을 활로 쏘아죽이는 등의 행위로 표출 됩니다.

성종도 이 아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었는지 이 사건을 묵인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와 후궁들, 할머니(인수대비)에 대한 적개심이 이런 일탈로 표출되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즉위 초의 업적

 

앞서 말씀드렸듯 그도 처음 부터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즉위 초 비용사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게 하고 건주의 야만족을 회유 및 토벌하는등 국방에 주력하였습니다.

국조보감등의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사창,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치적들을 볼때 흔히 묘사되듯 그가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삼사를 적절히 억누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구파 대신들과 정치를 이끌어 가던 시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배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하고 어머니 폐비 윤씨를 복권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사림의 반대에 부딛히게 됩니다.

 

 

두 차례의 사화 와 복수

 

1498년 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인용해 세조의 계유정난(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가 왕위에 오른 사건)을 비난하는 내용을 남겼다는 참소가 있게 됩니다. 사림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연산군은 이를 기회삼아 많은 사림을 처형하거나 유배시키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 참시(관속에서 시신을 꺼내어 목을 베는 징벌)합니다. 이를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이는 사림을 제거하려던 연산군과 훈구파 대신들의 사실상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들로 언급되는 경연 및 사헌부의 축소, 상소 등 여론 수렴의 제도들을 축소한 일, 성균관을 기생 양성소로 만들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그가 방탕 해서라기 보다는 사실 사림의 세력을 꺽고 조롱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집니다.

 

1504년에는 다시 한번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추가로 제거하는 한편 이번에는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훈구파 대신들도 살아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죽었다면 부관 참시하였습니다. 또 폐비 사건을 주도했다고 의심되는 부친의 후궁 정씨를 그 아들 들인 안양군, 봉안군에게 직접 곤장을 치게 해서 때려 죽이는 폐륜적인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사실상 모친을 폐출시키는데 큰 역활을 한 할머니 인수대비와 크게 다투고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쳐서(또는 들이 받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합니다. 이 인수대비의 장례를 삼년상 대신에 25일장으로 끝내버려 후에 많은 지탄을 받게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 드라마에서 고두심씨가 연기한 인수대비

아주 어린 시절에 본 드라마 였지만 인수대비의 마지막을 연기한 부분은 그 연기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인수대비는 나중에 한번 별도의 글로 다루려 하는데 세조의 며느리이자 유학적 소양이 풍부한 여성으로 세조의 반정 및 이후의 정치에도 관여하며 많은 영향력을 미친 여성 입니다.

 

왕과 비 에서 인수대비 역활의 채시라씨 그 강인한 여성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캐스팅이었을지도...

 

 

그는 정말 폭군이었나?

 

두번의 사화로 피바람을 일으킨 그는 사림뿐만 아니라 훈구파도 분열시켜 일부를 제거하여 사실상 왕권을 매우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자면 강력한 왕권을 가지려 했던 제왕들이 걸어간 길과 비슷해 보입니다. 실제로 연산군을 재 평가하려는 견해에서는 연산군을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다 실패하여 폭군으로 격하된 왕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또한 그가 폭군으로 격하된 부분은 지나치게 성급했던 개혁적인 성향으로 보기도 합니다.  연산군은 사헌부를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해 있던 성균관과 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하였고 문관과 무관을 공정하게 대우하려고 하였습니다.

문묘에서 공자에게 예를 표할때는 공자의 신분이 신하였다는 이유로 재배만 하고 공자묘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성리학 사회이던 조선에 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부분도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실질적인 절차를 권장하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개혁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난행으로 일컬어지는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등을 기생들이 거하거나 양성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부분들도 사실과는 다른 부분 입니다. 해당 기생의 집단은 고려시대 부터 있어왔던 조직이며 가무 악단과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이런 소문은 이후에 반정 세력이 그를 격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 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성리학에서 벗어난 듯한 태도와 성균관등에 대한 조치에 사림들이 반발하고 그런 소문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즉 당시로는 다소 파격적인 유교의 허례의식을 타파하고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사회구조로 조선을 개혁하려 한것인데 만약에 그가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고 개혁에 성공했다면 역사속에서 폭군 연산군이 아닌 위인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폭군으로 만든것은 강력한 왕권의 남용으로 인한 후반기의 폭정과 잦은 숙청으로 훈구파마저 적으로 돌려 외로운 처지가 되어 결국 신권의 반격에 의해 무너졌다는 사실 입니다. 또 그 반격을 당할 약점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 인데 그 약점은 바로 사화로 반대파를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구실도 하었지만 끝내 왕 자신이 극복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폐비 윤씨와 관련된 마더 컴플렉스 였습니다.

 

 

장녹수 

 

연산군 하면 빠질 수 없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장녹수 입니다.

 

연산군의 후궁인 장녹수는 장한필의 첩(노비로 추정되는)의 딸로 태어났으며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기도 한 노비의 신분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몸을 파는 일을 하기도 했던 그녀는 춤과 노래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춤과 노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연산군에 의해 입궐하여 노비에서 왕의 후궁이 된 파란만장한 신분 변화를 겪은 여인 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정진영) 과 장녹수(강성연)

개인적으로 모정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잘 표현한 정진영씨의 연기력을 높이 삽니다.

장녹수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서만은 강성연씨의 저 표정만으로도 가장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닌가 합니다.

 

예술가적 소양을 지녔던 연산군은 이 연상의 여인에게서 예술적 교감과 모정을 충족시켰던 듯 합니다.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왕이 아무리 노했다가도 녹수만 보면 기뻐서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라는 『실록』의 기록은 일국의 왕인 연산군이 자신을 마치 아이처럼 다루고 꾸지람 듣는데서 비틀린 방식으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충족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하지만 장녹수는 이렇게 얻은 신분과 권력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는 모르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집 주변 민가를 철거하게 하여 새로 단장시키고 본인의 일가의 부를 불리기 위한 뇌물을 받는등 사리사욕과 탐욕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그대로 연산군의 악정으로 연결 되었습니다. 이는 중종반정에 더욱 명분을 실어 주었습니다.

 

 

모정에 굶주렸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제왕

 

 

앞서 장녹수의 이야기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연산군은 모정에 대한 집착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듯 보입니다. 심지어는 오갈데 없는 분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 된듯 합니다. 아무래도 그저 단순히 어머니가 폐출되어 죽은 경위 정도만 알고 있었던 것과 왕이 되어 점점 그 저변의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그 분노와 한의 크기을 더 키웠으리라 짐작은 됩니다.

 

무오사화의 경우에는 사림의 제거도 그 목적이지만 어머니를 위한 복수의 성격도 짙습니다.

이 사화를 통해 훈구파마저 분열시켜 일부를 제거해 버린 연산군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어머니를 죽게 만든 원흉이라는 생각에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죽게하고 그 상을 25일로 줄여 버림으로써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효를 저버린 군왕이라는 자충수를 둡니다.

후대의 광해군을 폐위한 최대의 명분도 서모에 대한 불효임을 볼때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탈이었습니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자신을 죽이려한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당한 반격을 하고도 효를 저버림이 군위에 치명적인 위협임을 알고 결국은 어머니와 화해하여 이 과정을 오히려 왕권강화에 활용한 정장공의 예를 알지 못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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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게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은 모정을 느껴 자주 방문하다가 그녀를 범하여 천륜을 어지럽힌 자가 됩니다. 사실 이부분은 현재는 상대가 50대의 노인임을 감안하여 연산군이 자주 방문하여 머문 사실을 중종 반정이후에 부풀린 이야기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반정의 명분중 가장 큰 명분이 되는 효와 천륜에 대한 일들 및 실정의 상당부분을  모정에 굶주렸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가 그렇게 왕권 강화에 집착한 것도 어떻게 보면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방해받지 않고 완수하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무오사화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얻은 연산군은 그 힘을 국정개혁이나 경제발전 같은 건설적인 부분에 활용하지 않고 왕권을 사냥, 연회, 음행, 금표난발, 민가철거 등의 자의적인 욕구를 만족하기 위한 행위와 혼동하여 행사 하면서 후반부의 그의 치세는 강화된 왕권 만큼 악정으로 표출되고 맙니다. 이는 장녹수의 일과 더불어 더 더욱 민심을 이반 시켰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자신을 지지하던 나머지 훈구파도 돌아서게 만듦으로써 중종반정으로 축출되어 유배지에서 쓸쓸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왜 즉위 초의 제법 영민해 보였던 국정운영에 대한 능력과 의지를 갑자기 잃고 강력한 왕권을 얻은 후반부에는 이렇게 사람이 달라진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마도 어머니의 복수를 한 후의 허탈감과 복수를 해도 해소되지 않는 분노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연산군이 역사의 폭군으로 남게된것은 어머니가 폐출되어 사사된 가족사의 불행의 굴레에서 결국 벗어나기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서 이글은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역사에 흥미를 가진 개인으로써의 견해를 피력해 본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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