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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공민왕과 노국공주, 왕 이야기 10

-1일 1포스팅을 해보자란 글을 쓰자마자 연이은 악재로 며칠간 블로그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 겨우 여러가지 일들의 가닥이 잡혀 꽤 오래 쓰지 못한 왕 이야기를 씁니다. 


공민왕 이야기는 사실 오래전에 작성해 두었으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민왕 이야기를 다루었고 처음 글이 너무 역사적 사건을 나열한거 같아서 과감하게 역사적인 사건 부분은 축소, 손질 하였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보려 합니다.-

 

왕 이야기의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 입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공민왕은 고려 충숙왕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고려는 원 간섭기로 고려의 왕족이던 그는 원나라 조정의 압력에 의해 몽골에 입조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의 형이던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12세에 후사 없이 요절하고 충정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희비 윤씨와 외척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데 불만을 품은 고려 관료들이 이를 원나라에 고하였고 원나라 황제는 칙서를 내려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귀국시켜 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원나라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그가 고려에 돌아와 한 일은 우리가 국사에서 배웠듯 바로 반원 정책과 개혁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변발을 풀고 원나라 복색을 벗어 자신이 원나라의 허수아비가 아닌 고려의 왕임을 상징적으로 표현 합니다. 즉위한 지 두 달여 만에 정방을 폐지하여 무신 정권의 잔재를 말소하며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가 하면 원나라 기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세도를 누리던 기씨 일족 등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회복하였습니다.

 

공민왕이 이처럼 과감한 개혁 및 반원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에서의 생활로 대륙에서 약해져 가는 원나라의 지배력과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왕후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노국공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국 공주

 

노국공주는 본명은 "보르지긴 보타슈리"로 원의 공주이며 공민왕이 직접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 입니다. 그녀는 원나라 출신이었고 남편인 공민왕이 행하는 반원 정책에 분명 마음이 편하지 않았겠지만, 자신은 고려왕에게 시집왔으니 고려인이라며 고려의 왕후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녀는 여러 기록에서 원나라 출신 왕후로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공민왕의 즉위 초반의 불안한 권력기반은 원나라 공주라는 배우자의 권위로 보호되지 않았다면 사실 유지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생모가 몽골인이 아닌 고려인이어서 고려 왕이 되기 어려웠던 공민왕은 정략적으로 원나라 공주인 노국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고 사실 이를 이용하여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공민왕에게 권력 유지의 수단이 아닌 정치적 동반자이자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이는 역사적 기록 뿐만 아니라 공민왕의 의욕적인 반원, 개혁 정책은 홍건적, 왜구 등의 외침과 반란에도 꺾이지 않았었는데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는 사실로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조롭게 왕권을 강화하고 성공적인 개혁이 추진되던 시기, 두 사람 사이에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노국공주가 임신하였다가 결국 난산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배우자의 사망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은 슬픔이 지나쳐 정신병에 걸렸다 -고려사-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마주 대하여 밥 먹으니… -고려사절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 공민왕은 죽어서도 노국공주와 같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남을 정도로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을 슬퍼하였다는 것은 거꾸로 정략적인 결혼으로 만났지만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부 사이가 좋은 경우는 부부간의 대화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공민왕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 포부 등을 노국공주와 나누었고 노국공주는 남편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칭찬을 해주고 지지해 주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자고로 남자란 아내의 칭찬과 지지에 가장 안정감과 용기를 얻는 법이니까요.

그녀가 만약 원 간섭기의 다른 몽골인 왕후들 처럼 원나라 황족의 지위를 이용해 위세를 부리거나 정치에 참견하였다면 남편을 아래에 두고 굴복시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랑받고 존중받는 여성으로서의 진정한 승리를 얻지는 못하지 않았을까요?

 

치세후반과 죽음

 

노국공주를 잃은 후의 공민왕의 행보는 모든 의욕을 잃은듯합니다. 영혼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위해 그러하듯 노국공주를 추모하는 불사에 힘을 기울이고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을 듣는 신돈을 만나 대담하는 등 종교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신돈을 등용하여 전폭적인 신뢰와 권력을 주어 개혁정책을 실행하게 함으로써 정치를 맡겨 버리고 자신은 노국공주를 추모하기 위한 불사에만 전념합니다. 신돈의 개혁정책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결국 왕에게 노국공주를 대신해서 생각과 대화를 나눌 마음의 동반자도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왕권이란 신하에게 나누어 주면 항상 역사적으로 끝이 좋지 않듯 왕권을 넘어설 정도로 신돈의 세력이 커지고,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신돈이 권력을 남용하여 축첩과 축재를 행하였다는 등에 대한 참소가 이어지자 실망한 공민왕은 신돈을 결국 제거해 버립니다.

 이후 개혁에 대해서도 염증을 느끼고 마음을 의지했던 노국공주와 신돈 두 사람을 모두 잃어버린 공민왕은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제위를 설치하여 미소년들을 뽑아 궁궐에 드나들게 하며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자제위의 홍윤이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와 간통하였고 사실을 고한 최만생에게 술에 취한 채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자신들을 모두 죽일 거라는 두려움에 빠진 홍윤, 최만생들에게 외려 시해당하고 맙니다(향년 44세).

 

맺으며

 

공민왕은 어쩌면 노국공주로 시작되어 노국공주로 끝나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왕위계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 공주인 노국공주와 결혼하면서 계승권에서 우위에 섰기 때문이고 귀국 후 치세 초반에 무신정권의 잔재와 친원파 및 권문세족들을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 황족인 노국공주의 남편이라는 권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노국공주는 이러한 출생 및 지위로 미약하던 공민왕의 왕권을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개혁정책과 정치에 대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로서 지지하여 주었습니다.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공민왕은 신돈이라는 대체자를 통해 그녀를 잃은 후의 고독감을 달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무엇으로도 대체하지 못한 실망감과 깊은 좌절만을 가지게 된 공민왕은 자포자기한 듯 주색에 빠진 삶을 살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여러분 곁에 자신을 이해해주고 대화를 나누는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어쩌면 동반자를 잃은 왕보다도 몇 배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요?

결혼하신 분이라면 오늘은 여러분 곁의 배우자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나의 삶은 어쩌면 그 또는 그녀와 같이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하는 배우자로 인해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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