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째 왕이야기의 주인공은 연개소문 입니다. "어 왕이 아니잖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글에서도 밝혔지만 왕이야기는 실제 왕호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왕에 가까운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 이야기의 정장공이나 제환공도 명확하게 따지자면 주나라 왕의 신하인 제후의 한 사람이지 "왕"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독립국의 왕과 다름없는 위치였기 때문에 왕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막리지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뒤 고구려 멸망까지 실제로 고구려를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지고 지배했던 것은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이었습니다. 그 집권기에 수차례의 대당 전쟁을 치루었던 연개소문은 20세기 이전과 그 이후의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의 변화
전통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왕을 죽이고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기울게한 역신" 이었습니다.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인 "삼국사기"의 경우 그와 대적했던 당나라의 기록인 "당서"를 참고로 하였기에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잔인하고 흉폭한 모습으로 투영되었습니다. 삼국유사 역시 연개소문은 수나라 장수인 양명의 환생으로 수와 고구려 전쟁중 양명이 "고구려의 신하로 환생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하고 죽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당나라에서 도사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산천의 지맥을 약화시키고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개조하면서 천리장성과 같은 부역을 일으켜 고구려가 멸망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서"야 연개소문의 고구려와 수차례 전쟁을 치룬 중국 당나라의 사서이니 그렇다고 치면 승려인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그에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이유는 연개소문이 불교세력을 꺽기 위하여 중국으로 부터 도교를 수입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연개소문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을 남긴 주체들이 모두 그와 적대했던 세력이나 계층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한 이유로 연개소문이 비범했기 때문이라는 송나라 신종과의 문답에서의 왕안석의 인물평과 연개소문에 대한 당서의 부정적인 입장을 그대로 기술하면서도 "그 생김새가 웅위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라는 기록을 남긴 김부식과 같이 아주 약간은 기존 평가와 상반된 의견도 남아 있습니다. 물론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이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는 용인되기 어려웠던것 같습니다. 조선 초의 최보와 같은 경우에 "동국통감"에서 왕안석과 김부식의 긍정적인 의견에 대하여 "춘추의 대의를 모르는 말"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유학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신하로써 왕을 시해하고 전횡을 휘두른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최근 드라마 칼과 꽃 에서 연개소문(최민수), 출처 KBS
의외로 최민수의 연개소문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들어 민족적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시대에 그에 대한 평가와 견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박은식은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론 일제 강점기와 외세에 시달리던 시대에 민족의 자주성와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대당 전쟁을 통해 외세에 저항하였던 부분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SBS 드라마 "연개소문" 에서의 연개소문(유동근), 출처 : SBS
즉 20세기 이전에는 연개소문을 "왕을 시해한 역신으로 나라를 기울게 한 인물"로 20세기 이후에는 "외세인 당나라에 당당히 맞서싸워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킨 민족 영웅"으로 변한 셈입니다.
영류왕
영류왕은 요즘으로 치자면 전쟁 영웅 출신의 지도자 입니다. 영양왕의 동생으로 영양왕 사후 27대 고구려 왕위에 올랐습니다. 휘는 건무로써 고구려 왕족의 성은 고씨 였으므로 고건무로 불리웁니다.
저 유명한 수양제가 100만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을때 요동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한편 30만의 별동대를 고구려 평양성으로 남하 시킵니다. 수나라 수군총관 내호아에게는 수군 4만명으로 바닷길로 별동대의 군량을 수송하면서 나중에는 합류하여 함께 평양을 공격하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고건무는 당나라 수군과 별동대를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대동강에 머물던 내호아의 수군을 거짓 패배로 평양성으로 유인하여 수나라 수군을 격파 하였습니다. 이는 남하하던 별동대의 군량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줍니다. 결국 이 전쟁은 퇴각하는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을지문덕이 저 유명한 살수대첩으로 몰살시켜 승전하게 되지만 고건무의 승전 또한 전쟁의 향방을 정한 주요한 분수령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건무는 618년 형인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으로 즉위 합니다. 하지만 이 전쟁 영웅인 영류왕은 왕위에 오른뒤에는 수,당 교체기에 평화를 원하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수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여러차례 승리를 했지만 그 전쟁들은 고구려의 영토안에서 벌어졌기에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에는 피할수 없어 보이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외교적 양보를 계속한 것을 보면 전쟁에 염증을 느켜 정말 평화를 원하지 않았나 보이기도 합니다. 글쓴이의 생각에는 어쩌면 당과의 국력의 차이를 현실적으로 보고 장기적으로는 결국 고구려가 이기기 어려운 전쟁으로 내다보았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KBS 드라마 칼과 꽃의 영류왕(김영철)
연개소문의 쿠데타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연자유, 연태조 모두 막리지를 역임한 강력한 귀족의 집안 으로 막리지라는 최고 권력이 세습될 만큼 고구려내의 명문 귀족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이 자리의 뒤를 이으려 했을때는 그 품성이 좋지않다는 이유로 귀족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세습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은 정치적으로 당나라와 평화를 유지 하려는 영류왕과는 달리 대당 강경파에 속하였습니다.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할수 없는 것으로 보고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며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여 영류왕의 대당 화평책과는 끊임 없이 충돌하였습니다.
하지만 영류왕 역시 당나라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의 축조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피할수 있으면 어느선까지 당나라에 양보도 할 생각이었던것 같습니다. 연개소문측의 인물들은 아마 이를 유약함으로 보고 양보로써 평화를 얻을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을듯 합니다.
결국 631년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할 방안을 논의한 끝에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을 명하였는데 이는 적어도 그를 고구려 정계에서 떼어놓거나 멀리 보낸후 제거할 계획이었던것 같습니다.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대신 백여명을 초대하여 이들을 모두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여버리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장"을 보장왕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습니다. 대막리지는 원래는 없던 직책으로 막리지 위의 종신직인 절대권력의 자리입니다. 왕이 될수 없었던 권력자들이 왕을 대신하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통치하듯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쇼군") 연개소문 역시 그러한 직책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KBS 드라마 칼과 꽃의 의 보장왕(온주완), 이미지 출처 KBS
대당 전쟁
당태종 이세민은 수 양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당태종 이세민
당태종은 644년 겨울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선언하고 645년 이세적을 선봉으로 고구려의 신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신성의 저항이 완강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개모성으로 이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요동성으로 이동하여 이를 포위합니다. 요동성의 경우 수나라의 대군도 함락하지 못한 성이었는데 이세적과 당태종 이세민이 대군을 이끌고 합류하여 공격을 시작했을때도 맹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화공으로 요동성이 함락당하고 맙니다. 이는 매우 고구려 지휘부에 큰 중격을 주었지만 신성과 건안성이 잘 버티어주어 당군의 진격은 멈추어 있었습니다. 당군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후방이 걱정스럽지만 계속 평양으로 진격하는것과 안시성과 건안성을 함락시켜 보급로를 확보한 후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군은 결국 안시성을 공격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을 포위합니다. 여기서 부터는 여러분도 잘아시는 안시성의 영웅적인 항전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당군은 68일간 안시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맙니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겨울이 오자 전쟁을 포기하고 습지인 요택을 통하여 철수하였는데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수많은 당군이 목숨을 잃습니다. 요택의 퇴각전은 얼마나 급박하였는지 당태종 자신도 늪을 메우기 위해 장작을 졌다고 합니다. 그후 당태종은 소규모로 고구려를 계속 공격하여 소모시키려는 전략을 썼으나 649년 사망하기전에는 유언으로 요동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아예 중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던 대규모 요동정벌을 중지하라는 명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당태종 사후 당은 작전을 바꾸어 백제를 멸망시켜 신라와 남북에서 협공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서 멸망시켰고 661년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수도 평양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는등 당군의 공격이 집요하게 이어 졌습니다. 더군다나 기존의 요동을 통해 육로로 진군하던 방식외에 주력군은 해군을 동원해 대동강까지 수송해 공격 하는 방식을 취한 661년에는 당나라 장군 방효태와 10만의 당군이 사수(대동강 하구) 강가에서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에 의해 포위되어 몰살당하고 맙니다. (662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사수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난 얼마뒤 연개소문은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권력을 잡은후의 대막리지로 집권한 후반기는 당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을 승리로 방어해냈으나 전쟁터는 고구려 영토내였기 때문에 국력의 피폐가 상당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결국 연개소문 사망후에는 그의 못난 자식들의 후계자 다툼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멸망(668년)하게 됩니다.
맺으며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20세기 이전과 20세기 이후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유학과 사대주의 시대에는 신하로써 왕을 시해한 역적이이자 당나라에 맞서 감히 상국에 치욕을 안겨준 인물로 생각된 경우도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외세에 끝까지 저항한 자주정신을 가진 영웅으로 부각되었으며 최근의 드라마들에서도 그러한 성향이 강했습니다.
시대와 사상의 변화와 보고자 하는 관점에서 역사적 인물의 평이 달라지는것을 보면 재미 있습니다.
연개소문, 과연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기울게한 역신이었을까요? 외세에 맞써 싸워 승리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영웅일까요?, 아니면 그저 권력을 차지 하려한 야심찬 효웅이었을까요?
왕 이야기 이전글
내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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