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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으로 불린 남자, 왕 이야기 19-1

19 번째 왕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본 전국시대의 유명한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 입니다. 이 인물은 '노부나가의 야망' 과 같은 KOEI 게임의 시리즈와 그 파격적이고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적어도 한국 인터넷 세상에서는 메이저급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에 있던 선교사인 프로이스가 "기후 왕" 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일본 천황제와 그 문화의 특성상 왕이나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지는 못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블로그의 왕 이야기에서는 실제의 왕 뿐만 아니라 왕에 근접했던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일본 왕은 보통 명사의 의미로 "천황" 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일 왕실을 존중해 주거나 해서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사실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왕 이야기 초기부터 쓰려했으나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주저했고 한정된 블로그의 지면상으로 다루기에 어려우리라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의 망언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요즈음에 일본 문화의 아이콘이 된 이 인물을 다루는 게 망설여지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워낙 이 인물을 훌륭하게 다룬 블로그 글들이 많아서 굳이 부족한 제 글을 포함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본 전국시대라는 주제는 워낙 전문가를 자처 하시는 사람들도 많아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 되는 댓 글 논쟁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

게임 전국 바사라에서 제육천마왕 오다노부나가

 

그럼에도 이 인물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딱 한가지 이유 입니다. 다른 이유를 떠나서 그저 이 인물에 대해 제가 강한 흥미와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싶어졌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다루려는 노부나가라는 인물의 성격도 다른 이의 시선이나 평가에 개의치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글을 공개로 쓰면서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성향을 가진 제게도 좀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더구나 맞던 틀리던 글을 쓰는 것이 안 쓰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블로그란 한정된 지면상 그의 생애에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금 많은 생략을 하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부합되는 에피소드 위주로만 다루려고 합니다. 해당 글은 몇 가지 책들을 참조했으며 약간의 상이한 내용이 있는 경우는 계속 업데이트 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wikipedia의 견해로 통일하였습니다.

 

이 인물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역시 일본사를 다룬 전문적인 책이 좋겠지만 국내에는 사실 찾아보기 어렵고 지나친 미화가 거슬리지만 실제 역사와의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입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관련 소설들

효웅 오다 노부나가 -아베류타로

오다 노부나가 -야마오카 소하치

대망 - 야마오카 소하치

 

사실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지만 중반부까지 오다 노부나가의 이야기도 많은 부분을 차지 합니다.

관련 드라마

[Movie/Drama] - 토시이에와 마츠, 무사를 샐러리맨에 빗댄 일본 시대극

 

 

사실 제 또래의 분들이라면 대부분 이 인물을 게임을 통해서 먼저 접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

필자가 고등학생 무렵에 즐겼던 노부나가의 야망1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

가장 최근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창조'

 

앞서 소개한 소설이나 게임뿐만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입니다. 일본 특유의 자신의 문화를 컨텐츠로 잘 승화 시키는 능력도 있지만 그 만큼 이 인물이 매력적이라는 이야기 인데 그럼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오와리를 통일 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은 원래 오와리 국의 주인이었던 시바 가문의 신하였던 오다 가문 중에서도 분가로 기요스의 3부교 중 하나에 불과한 단죠노츄 가문이었습니다. 1534년 후루와타리 성 성주이자 힘을 키워 실질적으로 오와리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룬 오다 노부히데의 차남 또는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왕 이야기에서 적, 서자 문제는 자주 다루었 둣 한 명 또는 두 명의 형은 서자로 보이며 노부나가는 적 장자로 키워져 일찌감치 나고야성 성주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무가의 상속자에 맞지 않는 상식에 어긋나는 기괴한 행동으로 "오와리의 바보" 또는 "멍청이" 라고 불리기도 했고 어린시절 특이한 사정으로 인질이 되어 있던 마쓰다이라 다케치요(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어린시절 접촉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1546년 후루와타리 성에서 성인식을 치루고 오다 가스노스케 노부나가로 칭해졌으며 1548년에는 오다 가문과 적대관계였던 미노의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의 관습이나 전통을 무시한 기행으로 멍청이라 불렸습니다. 아마 제왕의 덕목을 중시한 조선이었다면 일치감치 세자 자리를 박탈당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는 다행히도 형제들이라는 경쟁자가 있었음에도 그의 부친이던 노부히데가 병사하자 무사히 가문을 상속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

오와리국 위치

 

당시 오다의 종가에 가깝던 노부토모가 명목상으로나마 주인으로 모시던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하자 겨우 달아나는데 성공한 요시무네의 아들인 요시카네를 받아들여 노부토모를 "주군을 시해한자"로 몰아 숙부인 오다 노부미쓰와 협력하여 종가이던 노부토모를 토벌하고 기요스로 이전하여 오다 가문의 분가에 불과했던 노부나가는 명실상부하게 오다 가문의 필두가 됩니다.

 

하지만 오다 가문 전체가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았기에 1556년 결혼 동맹으로 이어져 있던 미노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그 아들인 사이토 요시타쓰의 쿠데타로 전사하자 유일한 동맹자를 잃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 쌓이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노부나가의 동생이던 노부카쓰(또는 간쥬로 노부유키)는 이틈을 타 평소의 노부나가의 기행으로 반감을 품었던 가신들에 옹립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지만 노부나가의 신속한 반격으로 패하고 거성이던 스에모리성을 포위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적이 많았던 노부나가는 어머니인 도타 고젠의 중개로 노부카쓰를 용서합니다. 그 후에도 노부카쓰가 계속해서 모반을 꾀하자 병들었다는 핑계로 문병하게 하여 그 자리에서 동생을 살해합니다. 이후에 숙적이던 오다 노부카타와 노부나가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던 시바 요시카네 마저 추방하여 오와리를 거의 통일합니다.(1559년)

 

이처럼 그의 생애 초반은 친척과 가족들과의 다툼을 통해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함으로써 그의 특이한 기행 등에 반발하던 구세력이던 가신들을 정리하고 새로이 자신의 생각에 맞고 자신을 따르는 충실한 가신들로 정리 해고한 정리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대표적인 기행으로는 서민들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농민들과 어울리거나 호기심이 강해 당시의 새로운 무기 체계이던 화약, 조총 등을 가지고 말썽을 피웠던 점, 아버지가 사망한 후 분향에서 향을 내던진 것 들인데 요즘으로 치면 거의 답이 없는 문제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기행은 당시의 질서에 해당하는 기존의 권위나 사상, 후에는 종교까지 무시하는 생각의 발현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도 이러한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생각은 서양식 갑옷을 입거나 당시의 상식으로는 불가침 지역으로 공격이 불가능했던 불교 성지인 히에이산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불적이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제육천마왕 같은 별명을 얻게 되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그만 그만한 세력이 끊임 없이 항쟁하던 당시의 시대를 빠르게 파괴하는 파괴자로써의 역할이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

오다 노부나가

 

오케하자마 전투

 

 

이때까지만 해도 겨우 지방의 일국을 통일한 무장에 불과하던 노부나가에게 큰 위기가 닥쳐 옵니다. 이 역시 국내의 사람들에게도 꽤나 유명한 오케하자마 전투 입니다.

 

당시의 오와리와 인접한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3국을 지배하던 센코쿠 다이묘이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주변 국들을 동맹으로 묶어두고 2만에서 4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1560년 5월 오와리를 침공합니다. 현재에는 이론도 있지만 이 침공은 오와리를 거쳐 당시 일본의 수도인 교토로 상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상경전이란 무력으로 당시의 수도인 교토를 점령하고 비록 명목만 남긴 했지만 천황과 아시카가 막부의 장군, 일본 조정을 손에 넣음으로써 명분을 얻고 단숨에 일본 전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는 수단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헌제를 받아들인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일본에서는 석고라는 쌀 생산량의 단위로 다스리는 영지의 크기를 나타내었습니다.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영지는 100만석에 가까운 생산량을 가졌을 것으로 예상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와리에 침공한 이마가와의 병력을 2만 5천 정도로 보는 것이 가장 많이 취해지고 있는 듯 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인접한 다케다와 호조가와 동맹을 맺은 상태로 수비병력을 제외한 여력을 총 동원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5천명 정도를 야전에 동원이 가능했으리라 추측되며 그 마저 절반 정도는 북쪽의 미노의 사이토 요시타쓰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야전에서 노부나가가 이마가와에 대응해 움직일 수 있었던 군세는 2천~4천명에 불과 했으리라 예상됩니다.

 

전국시대 석고 별 동원 가능한 병력 관련 참고

http://valley.egloos.com/viewer/?url=http://redoctobor.egloos.com/4665438

 

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에 "이야기 일본사" 통해 중학교 3학년 즈음에 접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로 대군을 격파한 전쟁 이야기는 소년이나 남자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힘이 있나 봅니다. 현재도 이 전투는 만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에서 자주 등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링크한 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에도 오케하자마 전투가 등장합니다.

 

워낙 큰 차이의 전력차였고 오다측의 성들이 차례차례 함락되어 가는 불리한 정황이었기 때문에 가신들 조차 노부나가가 굴복하거나 거성에서 농성하리라 생각하였고 당시의 대부분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대응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전력 차이가 나는 약한 측이 궁극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수단인 "기습"을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가신들에게 조차 갑옷을 벗고 쉬고 있으라는 혼란스러운 명을 내린 뒤 깊은 밤에 평소 좋아하던 아쓰모리의 한 구절을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이 매우 유명 합니다.

 

-인생 오십 년

 돌고 도는 인간세상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

 

여러 종류의 번역이 있었는데 가장 문구가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걸로 골랐습니다. 노부나가는 이후 갑옷을 입고 수하 몇 기만 거느리고 달려나갔다고 합니다. 이 출전 소식을 후에야 알게 된 가신들이 허둥지둥 갑옷을 입으며 따라가야 할 정도로 허를 찌르는 출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노부나가 진영에 첩자가 있었더라도 이 것을 전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후 그는 아쓰타 신궁에 참배한 후 젠쇼지 성채에서 뒤따라온 부하들을 수습하여 약 4천명의 군을 이끌고 때마침 쏟아진 빗속을 은밀히 행군하여 갑작스런 악천후로 장막을 치고 오케하자마에서 휴식 중이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진을 기습합니다. 이 당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진은 약 5천명 정도로 나머지 병력들은 신중하게 오다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고 있었으므로 노부나가는 전술의 기본이 되는 각개 격파 전술과 가장 핵심이 되는 전쟁 지휘부만을 목표로 하여 공격한 셈입니다.

 

오로지 요시모토의 목만을 목표로 한 이 기습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목이 잘리고 사실상 이마가와군의 침공 지휘부에 해당하는 수많은 무장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병력 수에서는 아직도 오다군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이마가와 군이지만 결국 지휘부가 괴멸되었기 때문에 스루가로 퇴각하였습니다. 1560년 7월 19일의 이 전투를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유력한 지휘부에 속했던 많은 무장들의 죽음 이후 당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가능 하다던 이마가와 가문은 점차 쇠퇴하였고 원래 이마가와 가문의 휘하에 있었던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세력을 벗어나 독립하게 됩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고립에서 벗어나 모토야스와 동맹을 맺어 동쪽에 대한 걱정을 덜은 후에 미노와 서쪽으로의 진출에 전념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하나의 포스팅으로 마무리 짓기에 글이 길어지는 군요. 역시 두 편 정도로 나누어야 할 듯 합니다.

 

-2편으로 계속-

[Story of Kings] - 오다 노부나가 상경과 포위망. 왕 이야기 19-2

 

 

 

오케하자마 전투는 이러한 일반적인 통설인 이마가와 상경과 기습전이 아닌 다른 관점을 가진 정면 공격 설도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halmi/5000048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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