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 전투까지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블로그 하는 한정된 지면상 많은 생략이 있으니 이 부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글
[Story of Kings] - 오다 노부나가 제육천마왕으로 불린 남자, 왕 이야기 19-1
미노 공략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동쪽의 방비를 굳힌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로 가는 길목인 미노에 대한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오다와의 동맹을 통해 서쪽에 대해 안심하게 되어 동쪽의 구 이마가와 영지를 잠식해 들어가 미카와 지역을 점진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즐겼던 천하통일이라는 게임으로 역사와 유사하게 진행하면서 잠시 운영했던 네이버 블로그에 남긴 2007년 즈음의 게임 플레이기 입니다, 꽤 오래 되고 아이도 없던 시기라 게임이 그나마 가능하던 시기 였는데 지금 보니 글이 매우 졸렬하긴 합니다. 게임상의 변수로 역사와 똑같이 진행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smart7599/70017694225
한편 미노는 아비인 사이토 도산을 죽이고 미노를 차지했던 사이토 요시타쓰가 1561년 급사하여 요시타쓰의 적 장자인 사이토 다쓰오키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쓰오키의 미노 통치는 조부나 부친에 미치지 못하였던것 같습니다. 다쓰오키가 집권하면서 사이토의 가신단은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1564년에는 미노의 서쪽에 있는 오미의 일부를 지배하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접근해 동맹을 맺어 미노를 압박하기도 하였습니다. 훗날 노부나가는 자신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보내어 결혼 동맹을 맺기도 합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여러차례 미노 공략을 시도했지만 나가라 강이라는 지형적 장애물과 다쓰오키의 과감한 반격으로 여러차례 실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에 쌓았다는 일야성(하룻밤 사이에 쌓은 성)이라는 약간은 과장되기도 한 일화에서 사이토가가 방심한 틈을 타서 현지의 목재와 특유의 인심 장악력으로 현지 인력을 이용하여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성이라기 보다는 미노방면에 작은 요새를 짓는데 성공하여 마침내 미노로 진입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합니다. 실제로는 3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축성에 사쿠마 노부모리, 시바다 가츠이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 전공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오다 진영에서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566년 오다노부나가는 결국 미노의 여러성을 손에 넣었고 사이토가의 중신이던 서 미노의 3인방을 회유하는데 성공하여 1567년에는 마침내 사이토 다쓰오키를 이세 나가시마로 추방하고 미노 국을 손에 넣게 됩니다.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의 거성이었던 이나바야마성을 중국 주나라의 고사에서 딴 천하인의 발상지란 의미로 기후로 개명하고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으며 이때 부터 천하포무(天下布武) 라는 직인을 사용하며 자신의 일본 천하통일에 대한 야망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잘 아시겠지만 주나라는 은나라을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기에 많은 후세의 중국의 군웅들이 자신의 왕조를 세우려 할 때 그 고사들을 참조하거나 인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볼때 아직 일본내 고만 고만한 영주들이 서로 치고 받는 혼란속에 지역 패권 정도를 꿈꿨다면 그는 일찌감치 일본의 통일이라는 자신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기요스 공원 오다 노부나가 동상
무로마치 막부
당시 명목상으로나마 일본을 지배하는 것은 무사들의 우두머리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1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 였습니다. 일본사를 읽어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대리정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치 형태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천황과 일본 조정이 권력을 잃기 전에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이 상황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거나 실질적으로 천황이나 조정이 완전히 힘을 잃은 후에도 이를 왕조 교체 없이 막부라는 기관을 통해 무사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쇼군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실질적으로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지고 다스렸다거나 하는 점들이 참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당시의 무로마치 막부도 이미 실질적으로 전국을 통제하는 힘을 오래전에 잃은 상태였는데 이 권위를 되찾으려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실질적으로 교토를 중심으로 당시 일본의 중심부인 기나이 지역을 지배하던 미요시 가문의 세 유력자(통칭 미요시 3인방)및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충돌하여 결국 요시테루는 살해 되었고 미요시 3인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요시테루의 사촌 동생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14대 쇼군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1565년)
요시테루에게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사실 서열상으로 보면 14대 쇼군인 요시히데보다 쇼군직에 명분상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이 요시아키도 암살하려 하였으나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간신히 달아나 에치젠을 지배하던 아사쿠라 요시카게 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하지만 아시쿠라 요시카게는 미요시가를 공격하거나 상경하여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만드는 일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듯 합니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1568년 미노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접근 하였고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미노로 맞아 들입니다. 이는 마치 삼국지에서 조조가 이곽, 곽사에게서 탈출한 헌제를 허창으로 맞아 들인것과 유사해 보여 재미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기억해 둘 인물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에 등용됩니다. 그는 원래 미노 출신이었으나 사이토가 몰락이후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가신이 되었다가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의탁하는데 공적을 세운걸로 보입니다. 축성, 철포등 군사적으로 뛰어난 재능및 교양을 가져 후에 일명 노부나가의 사천왕중 한 사람이 되고 노부나가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됩니다.
노부나가의 상경
노부나가는 미노 동쪽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가이의 다케다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와 자신의 양녀를 결혼시켜 결혼 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그 양녀가 가쓰요리의 아들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요절하여 노부나가 자신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다와 다케다 신겐의 6녀 마쓰히메를 혼인시켜 우호관계를 가집니다. 오와리 동쪽인 미카와는 이미 동맹을 맺은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었기에 오다 노무나가는 동쪽에 대한 방비를 든든하게 만든 셈인데 이것은 전력을 다해 서쪽인 교토로 상경전을 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입니다.
1568년 9월에 오다 노부나가는 잘못된 쇼군직을 바로잡고 적법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상경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맞아들인지 불과 2달 후로 이미 노부나가는 상경을 위한 준비를 해두고 이제나 저제나 상경할 계기나 명분이 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처럼 보입니다.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동안 미적 거리기만 한것에 비하면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교토로 가는 길목인 오미 남부를 지배하던 롯카쿠 요시카타, 롯카쿠 요시하루 부자를 격파하여 이가로 달아나게 만들고 결국 교토로 상경하자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실력에 눌리어 편을 바꾸어 종속합니다. 그 외의 미요시 3인방은 아와로 도주하였습니다. 이렇게하여 노부나가는 결국 교토와 기나이를 장악했던 미요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 하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결국 이후의 몇 차례에 걸쳐 미요시의 잔당의 반격을 격파하고 실질적으로 일본 중심부를 지배하는 세력이 됩니다.
노부나가 포위망 1차
여러 책이나 글에서 보통 노부나가가 그 경쟁자들인 유력한 전국 대명이던 이마가와, 다케다, 우에스기, 모리 등과 달리 상경을 성공한 이유중 하나를 지리적으로 이들 보다 교토에 가까웠다는 점을 들어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하지만 교토와 가까웠던 세력은 교토 주변에도 많았고 앞서에 이야기한 경쟁자인 아사쿠라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경쟁자들이 지방 통일이나 세력 확대에 몰입할때 노부나가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확고하게 천하를 장악하겠다는 야심과 목표를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추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570년 순조롭게 기나이 지방을 장악해 나가던 노부나가는 천하쟁패의 경쟁자 중 하나였던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토벌하기 위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원정길에 오릅니다. 이것은 사전에 또 다른 동맹국이었던 오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는 통보되지 않았는데 아자이 가문이 오미에 세력기반을 잡기까지 아사쿠라 가문의 군사적 원조가 있었고 아자이 가문과의 결혼 동맹시에도 아사쿠라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을 정도로 아자이가와 아사쿠라가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여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가 적어도 중립을 지키리라 판단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 군이 아사쿠라의 여러성을 차례차레 함락시켜 나가는 도중 아자이 나가마사는 배반하여 노부나가는 에치젠과 오미 사이에 갖히게 됩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입장에서는 먼저 맹약을 깬것은 노부나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유명한 "가네가사키 퇴각"에서 후위를 맡은 이케다 가쓰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기노시타 히데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분전으로 노부나가는 간신히 교토로 귀환할 정도로 큰 위기를 겪습니다. 이 사태는 상경 후 거침없던 노부나가의 행보에 제동을 걸게 됩니다. 노부나가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쇼군의 권력을 제한하는 노부나가에게 의심을 가지고 대립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이것을 기회로 보고 타도 노부나가를 호소하는 서찰을 여러 전국 대명들에게 돌립니다.
이로써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 다케다 신겐, 모리 데루모토, 미요시 3인방, 엔라쿠지, 이시야마 혼간지등의 세력들이 호응하여 노부나가의 영지는 사방에서 포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노부나가 1차 포위망
1570년 6월 노부나가는 오미의 아네가와에서 도쿠가와 아에야스와 연합으로 일단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지만 노부나가가 셋쓰에서 미요시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싸우는 사이에 힘을 회복한 아자이, 아사쿠라, 엔라쿠지의 연합군이 오미 사카모토로 재침 합니다. 노부나가는 즉시 돌아와 이들과 대치하지만 이들 연합군은 침범이 불가능 하다는 불교 성지인 히에이 산에 주둔하며 대항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세 나가시마 일향종이 오와리와 이세를 공격하는 등 사면에서 여러 세력에 공격 받아 그야말로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노부나가는 기존의 거침없던 세력 확장 속도에 힘을 잃고 각지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방이 적으로 포위되어 궁지에 몰린 노부나가는 일본 조정에 압력을 넣어 칙명을 받아내어 일단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화친합니다.(1570년),
하지만 1571년 노부나가는 자신에 적대하며 저항하던 불교 성지이던 히에이산의 엔라쿠지를 화공하여 불태워 버리고 신도와 승려들을 학살해 버립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고 오다 노부나가가 제육천마왕이라는 별명을 얻는 계기가 됩니다. 노부나가를 약간 비호하자면 당시의 사원세력은 군사력을 가지고 정치에 공공연히 관여하는 세속적 세력이었기 때문에 가차없이 공격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또 생각 해보면 이러한 일을 해치우는게 가능했던 것은 노부나가가 당시의 종교적, 전통적인 관습이나 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573년에는 전황이 조금씩 노부나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 하였습니다.아사쿠라, 아자이 연합군을 오미에서 서서히 몰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노부나가에게 가장 큰 위기가 닥쳐옵니다. 마침내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궐기하여 총병력 3만을 이끌고 미노 동부와 도쿠가와 령 도토미, 미카와로 총 공세를 취해 왔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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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이야기 일본사
CEO 오다노부나가 경영 10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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