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번째 왕 이야기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해동 장량이라 불리며 조선의 개국에 큰 역활을 한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또한 이성계와 영원한 라이벌로 회자되는 최영 장군과 정도전과 같은 신진사대부 세력이었지만 입장을 달리한 정몽주의 이야기를 같이 풀어볼까 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 최영, 정몽주의 파란만장한 고려 후기에서 조선 개국까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처음 생각보다 길어져 버린 이 이야기는 정말 차일 피일 쓰는것을 미루어 왔었습니다. 왕이야기를 시작할 당시의 이름인 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의 첫번째 주인공은 세종대왕 이었습니다. 이후에 거꾸로 그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로 거슬러 올라가며 한번은 이야기를 풀어야지 생각 했었는데 생각뿐이고 차일 피일 미루어 두다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겨우 귀차니즘을 극복하고 글을 써보려는 의욕을 만들어준것은 얼마 전 방영하기 시작한 오랜만의 정통사극 "정도전"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의 첫번째 주인공 세종대왕
[Story of Kings] - 좋은 왕 나쁜 왕 이상한 왕 1 -세종대왕 편-
현재의 대한민국 성립 이전의 이 땅의 왕조 였던 조선은 일본에 국권을 잃었던 점과 중국왕조에 대한 사대정책 때문에 현대의 해석으로 인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엄연히 500년간 중, 근세를 관통하며 존재하여 우리의 근간과 문화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남긴 이 땅의 마지막 왕조 입니다. 후세의 평가가 어찌되었던 역사적으로도 500년 이상이나 유지된 왕조는 생각보다 흔하지는 않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이러한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 파트너로써 조선의 성립에 실질적 기틀을 닦은 정도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 각각의 라이벌로 언급되는 최영과 정몽주의 이야기도 같이 다루어 볼까 합니다.
이성계의 전반기
태조 이성계 어진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조선의 개국은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비롯된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모든것을 연쇄적으로 격발시킨 방아쇠가 되었을뿐, 이미 고려 말의 동북 아시아는 원명교체기로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와 왜구의 창궐로 한반도에 대한 수많은 외침이 있던 시기로 가뜩이나 약화되어 있던 고려 왕조의 명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 이었습니다.
고려말의 개혁군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초기에는 그 효과를 나타내어 고려 왕조의 수명을 더 연장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하지만 노국 공주의 죽음후의 실의에 빠진 공민왕의 후반기 치세는 사실상 실정으로 일관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공민왕의 치세가 고려 왕조의 수명을 더 단축한 계기가 된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공민왕 치세에 발탁되어 무인으로 큰 활약을 한 최영과 또 다른 신진 무인인 이성계는 고려말의 잦은 외침속에서 전쟁을 통해 무장으로 그 실력을 발휘하여 명성과 백성의 신망과 권세를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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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한반도를 종횡 무진한 무인 이성계의 활약
신진 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는 나중에 결국 역성 혁명을 통하여 고려 왕조를 멸하고 결국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됩니다. 어느 시대에나 난세에는 군인이 권력을 얻는일이 비일비재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군사력과 명성을 가진것 만으로 왕이 될수는 없습니다. 보통 왕조의 개창은 그러한 힘을 지지하는 새로운 사상 및 신진 세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데 이러한 역활을 하고 이성계의 파트너로써 개국에 가장 공로가 크다고 평가되는 사람이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류 입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어떻게 변방의 시골 무인에서 왕위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일생을 한번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
태조 이성계의 왕이 된 후의 정식 이름은 이단 입니다.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의 이름으로 1335년 음력 10월 11일에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 있던 함경도 영흥 에서 이자춘의 적자로 태어났습니다. 이자춘은 당시 쌍성총관부의 관리였습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안의 간도 지방에서 터를 닦았던 사람이며 증조부, 조부, 부친이 모두 원나라 관리를 지냈습니다.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격당시 이자춘은 내응하여 공을 세우고 고려에 귀화하여 동북면상만호라는 관직을 얻었습니다. 만호는 고려시대의 외관직으로 정4품에 해당하는 무관의 벼슬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이미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격시에 아버지와 함께 내응하여 공을 세웠고 1361년에는 고려의 함주(함경도) 지방의 경비를 맏는 만호가 되어 전형적인 변방을 지키는 군인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군사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1361년 음력 10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그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한 홍건적에 의해서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자 이성계는 휘화의 고려, 여진인 2000명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도 참여하여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전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써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1362년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고려 북부로 쳐들어오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파견하였는데 함흥평야에서 나하추의 원나라군을 격파하여 퇴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364년에는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신왕으로 세우고자 침공하자 최영의 휘하에서 이를 저지 했으며 1370년에는 현재의 평안도 지방에 있다가 그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요동에 새로 설치되었던 원나라 동녕부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말에는 북방에서의 침입뿐만 아니라 왜구의 활동 또한 왕성한 시기였습니다. 1380년에는 왜구가 대규모로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자 이성계는 삼도 도원수가 되어 정확한 왜구의 행군로를 예측하여 초전에 승리를 거두었고 황산에서 왜구의 본대와 교전하여 이른바 황산대첩으로 알려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당시 침입했던 1만의 왜구중 태반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동 시기에 다발적으로 발생한 외침은 일개 변방의 수비장수로 끝날수도 있었던 이성계가 자신의 실력을 펼칠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명성과 백성들의 신망을 가질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서의 지도 이미지에서도 보았듯 고려말 수많은 외침에 초기부터 전공을 세우고 무장으로써의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실력을 보여주었던 이성계는 무인으로써 실력은 있었지만 중앙정부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 대한 욕망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대두되었던 신진사대부 세력 역시 자신들의 이념인 성리학에 기반한 개혁을 추진하고 기존의 고려의 훈구파에 대항할 힘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이상의 실현을 뒷받침 해줄 인물이 필요했던 신진사대부세력 역시 떠오르는 신진 무인세력인 이성계를 주목하게 됩니다. 이렇게 후에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 두 세력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서서히 접근하게 됩니다.
이성계가 동북면에 머물고 있을때는 정몽주가 그를 찾아 왔었고 정도전 역시 이성계의 막사를 주시로 방문하며 정사를 논하였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이 두사람을 통해 이색, 권근 등의 신진사대부의 핵심 인사들과도 친분을 넓히고 인맥을 형성해 나가는 행보를 보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보면 이성계가 싸움만 아는 평범한 무장은 결코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왕위까지 꿈꾸지는 않았겠지만 고려조정의 핵심권력에 접근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치밀하게 인맥과 세력을 갖추어 두려한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성계도 처음부터 신진사대부의 생각과 사상에 공감해 이를 지원해 나가려 한것이라기 보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활용하려 했을것으로 추측됩니다.
최영
흔히 이성계와 역사의 라이벌로 언급되는 최영의 경우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의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최영의 딸이 우왕의 왕비가 되어 왕의 장인이라는 신분 이었습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신흥세력이라면 최영은 현재의 권력을 가진 훈구파의 등불과 같은 존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최영은 1316년에 태어났습니다. 부친인 최원직은 최영이 16세때에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유훈을 남겼고 이는 최영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어려서 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던 그는 문신가문에 태어났지만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며 무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최영 장군 영정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화에서 무관으로 출발하여 왜구 토벌전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웠고 공민왕 1352년 음력9월에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면서 출세길에 들게 됩니다. 1354년에는 장사성의 홍건적이 산동지방에서 원에 반기를 들자 원나라의 요청으로 대장군에 임명되어 2천명의 병력으로 출정해서 원에서 대기중이던 고려인 2만명과 합류하여 이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아 홍건적 토벌에 파병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1355년에는 고려로 복귀하여 공민왕의 왕명으로 유인우의 휘하에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이를 수복하게 됩니다. 앞서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때 이자춘과 이성계가 내응하였습니다.
최영 역시 압록강을 넘어 요양까지 원정하기도 하였으며 원나라와 실지회복을 위한 전쟁뿐 아니라 1358년에는 오예포에 침입한 왜선 4백여척을 격파하였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1362년 개경이 함락되는 사태에서는 안우 이방실 등과 개경 수복전에 참전하여 이 공로로 공신의 위를 받습니다. 1363년에는 흥왕사의 변란에서 공민왕이 위기에 처하자 최영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반적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왕을 구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쌍성총관부를 잃은데다가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 덕에 고려내에서 권세를 잡고 있던 기철 일파 마저 공민왕이 제거해 버리면서 반원 정책을 분명히 하자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게된 원나라는 홍건적과 내부적인 제위 싸움으로 국세가 점차 기울어가던 와중에도 이 괘씸한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행동을 개시합니다. 결국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가 덕흥군을 받들고 군사 1만명을 이끌고 1364년 고려를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한때 의주를 점령하며 기세를 돋우며 남하하였으나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이를 현재의 평안북도의 한 지방인 달천에서 격파와여 결국 원나라로 회군하게 만들었습니다.
신돈의 치세 시기에는 신돈의 모함으로 잠시 좌천되기도 하였지만 신돈이 몰락하자 곧 고려 조정에 다시 복귀 하였습니다. 1374년에는 제주에서 일어난 목호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1376년에는 홍산에서 내륙 깊숙히 침입한 왜군을 대파하였습니다. 1377년에는 서강에 침입한 왜구를물리치고 1378년에는 왜구가 승천부까지 쳐들어와 개경까지 위태로운 지경을 당했으나 이성계등과 함께 이를 섬멸하였습니다.
이처럼 최영 역시 고려말의 잦은 외침에 남북으로 종횡무진 전투로 일생을 보내며 백성들의 신망과 명성을 얻은 무장입니다. 공민왕이 홍윤등에 시해당한 후에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은 성장하자 최영의 서녀인 최씨를 자신으로 비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최영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왕이 끝끝내 뜻을 꺽지 않자 마지못해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이는 우왕의 끊임없이 제기되던 자신의 출생에 대한 잡음(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잠재우고 불안한 왕권를 지키려는 한수이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신하의 서녀를 비로 삼으면서 까지 의지하려 들만큼 명망과 실력을 가진 무인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후 최영은 공민왕 사후 우왕을 세운 공으로 전횡을 일삼던 권문세족인 이인임 일파에 분노하여 이성계와 협력해 이들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마치 그가 훈구파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그가 고려 왕권을 지켜려고 취한 입장 때문입니다.
위화도 회군
1388년에는 2월에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통보를 해옵니다. 이는 원래 원의 영토였던 쌍성총관부를 명나라 땅으로 귀속 시켜려한 조치 였습니다. 최영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였고 최영과 우왕은 이 기회에 요동을 공격해 명나라의 야심을 꺽자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요동 정벌론이 대두되자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 불가함을 들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때 즈음 배운 이성계의 4불가론이 기억나시나요?
작은것으로 큰것을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함이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것이 둘째 불가하고
원정에 병사를 동원하면 왜구가 틈을 노릴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여 활의 아교가 녹고 군사들이 질병을 앓을것이니 넷째 불가합니다.
하지만 결국 요동정벌은 최영과 우왕에 의해 강행되었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정벌군을 맡겨 출병 하도록 합니다. 이 요동 정벌군은 10만이라고 칭해졌지만 실제로는 3만~5만 정도의 병력으로 추정됩니다. 압록강을 넘어 진격하라는 최영의 영이 있었지만 장마로 인하여 위화도에 머물러 있던 이성계는 결국 군사를 돌려 회군하여 개경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고 이것이 조선의 개국까지 이어지는 사건들의 방아쇠가 됩니다.
4 불가론을 보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면 이성계의 의견이 크게 불합리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뜻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역사에는 눈으로 보이는 합리성 외에도 많은 이면이 존재합니다. 이 4불가론은 조선의 창건 이후에 태조의 위화도 회군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다듬어 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많은 논란이 존재하는 명나라의 철령위 통보와 요동정벌, 위화도 회군은 사실 아직도 역사의 미스터리 입니다. 결국 조선 왕조가 성립된 이후 철령위 설치는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필자가 가장 그럴듯하게 받아들이는 설은 애초에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에 그다지 미련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설 입니다. 요동지역은 이미 공민왕 시절에 몇차례에 걸쳐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마치 영국에 침입하던 데인족을 연상케 하는 잦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서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사실상 요동을 완전히 소유하는것은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결국 요동을 실제로 지배하던 나하추를 굴복시켜 당시의 동아시아의 독특한 외교 형태인 명목상의 종주권을 주장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즉 나하추가 고려 제1의 관직인 삼중대광사도 라는 관직을 제수 받고 고려의 신하가 되었지만 이는 명목상의 관계이고 실질적으로는 요동은 나하추가 지배하는 독립적인 지역이었습니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고려가 아니라 북으로 쫒겨갔으나 아직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진 북원이 향후 요동의 나하추와 연대하여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명군은 대대적으로 요동을 공격하였고 나하추는 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항복을 하였습니다. 요동을 손에 넣은 명은 곧바로 1388년 3월에 북원에 출병하여 4월 이후, 명의 북벌군은 북원의 잔존세력을 격파하고 위협이 될만한 북원의 주력을 완전히 섬멸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명의 철령위 통보는 1388년 2월, 명나라 북벌군이 북원으로 진공한 것이 3월 입니다. 즉 철령위 통보는 북원을 공격하기전의 성동격서적인 성격으로 고려를 공격할듯한 입장을 보이며 요동에 집중한 명의 군사력으로 북원을 공격하는데 이용한 것으로 해석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아직 친원적인 색채가 있다고 보이는 고려를 찔러보고 북원에 협력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명의 북벌군은 북원군에 비교적 신속한 승리를 얻은 편이었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 드넓은 사막과 북녘에서 펼쳐지는 명과 북원의 전쟁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봐야합니다. 최영과 우왕은 명의 북벌로 비어 있다시피한 요동을 신속하게 공격하면 정벌에 성공하여 요동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점령한 요동은 북원과 전쟁중인 명나라군의 후방을 위협하여 북원과 함께 명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고려의 위치를 격상 시킬수도 있고 여의치 않으면 철령위 통보를 철회시키는 외교적인 협상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한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명이 북원과 전쟁을 마치기 전에 신속하게 요동을 정벌해야 했으므로 최영과 우왕이 일부 허술하게 느껴질만큼 서둘러서 요동정벌을 추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을까도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명이 의외로 신속하게 북원에 대승을 거두어 버렸으므로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고려는 명과의 전쟁에 홀로 돌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냉정하게 당시의 명과 고려의 국력차를 생각하면 어쩌면 우리 선조는 이후 엄청난 전쟁의 환란을 겪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전쟁과 같이 나라의 중요한 명운을 결정하는 일은 민족주의적 선동이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질러버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계기로 전쟁을 시작했다가 나라가 사라져버린 일들은 사실 역사상에 비일 비재 합니다. 위의 언급한 설이 맞다면 최영과 우왕은 나름의 계산과 생각을 가지고 전쟁을 결심한 것이지 그저 고토회복이라는 민족의 기상에 입각해 전쟁을 결심한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위화도 회군을 고토회복을 위한 마지막 기회와 민족의 기상을 꺽은 불미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논하는 단순하고 감정적인 견해보다는 역사를 지나친 감성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접근하여 어떻게 그런일이 그런방식으로 진행 되었나를 논리적으로 추론해주는 글 한 줄이 없다는 부분이 제게는 무척 아쉽게 느껴집니다.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를 두둔할 마음은 없습니다. 당시의 소식 전달의 속도로 볼때 북원에 대한 명의 승리가 5월에 위화도에 머물다 회군한 이성계에게 알려졌을지는 사실 모호하지만, 이성계가 회군한 목적중 분명한 한가지는 이것이 자신이 권력의 최정점에 설 수 있는 일생 일대 도박의 기회라는 생각이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접수한 이성계는 백성의 신망과 명망을 가져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한 최영을 일단은 유배 하였다가 개경으로 다시 압송하여 결국 참수합니다. 이때 최영에게 여러가지 죄목을 붙였는데 최영은 "자신이 평생에 사사로운 욕심을 부린 일이 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날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것"이라는 저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랫동안 풀이나지 않아 "적분"으로 불리웠습니다. 최영이 죽던날 백성들은 매우 슬퍼했다고 하며 개경의 상인들이 철시하여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명망 높은 고려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 무장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신망을 증명하듯 최영은 죽은 후 무속신앙의 최고 장군신중 하나로 남습니다.
정도전의 영정
이러한 위화도 회군과 이후 이어지는 이성계의 조선 창건까지는 사실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도전 입니다. 정도전은 역성혁명이라는 수단으로 새로운 왕조를 창조하고 세상을 개혁하려한 급진적인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셨다면 드라마에서 세종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는 삼봉 선생에 대해 알고 계실듯 합니다. 이 삼봉이 바로 정도전의 호 입니다. 반면에 정몽주는 현재의 고려 조정을 개혁해야 한다는데는 뜻을 같이했으나 고려 왕조를 뒤엎을 마음까지는 없었던 비교적 온건한 신진사대부의 대표로 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한때 동지였던 이들 역시 위화도회군과 왕권을 향한 이성계의 행보로 인해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좀더 글을 더 짧게 쓰고 싶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지나치게 또 길어졌습니다. 이번편에서는 정도전과 정몽주는 다루지도 못했군요. 정몽주와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와 조선의 개국에 대해서는 2편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다음 글
[Story of Kings]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2,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이미지 및 일부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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