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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제환공 춘추시대의 첫 패자 그리고 관중과 포숙아, 왕이야기 15-1

15번째 왕이야기는 중국 춘추시대 5패의 으뜸인 제환공 이야기 입니다. 제환공의 이야기는 조금 긴편이라서 2~3편으로 글을 나누어 포스팅 할 계획 입니다.

 

우선은 이 글의 프롤로그 성격을 지닌 제 양공 관련 글을 먼저 읽으시면 이야기가 이어지기 쉬울듯 합니다.

 

2013/04/17 - [King Story] - 제 양공, 먼저 인간이 되었어야... 왕 이야기 11

 

일반적으로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패자라면 지배력이 약해진 주나라를 대신하여 제후국들과 회맹을 통해 맹주로써 그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제후국의 군주를 말합니다. 제 환공, 진(晉) 문공, 초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 일반적으로 춘추5패에 들어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진(秦) 목공, 송 양공, 오나라 부차, 또는 정 장공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회맹이라는 일종의 동맹을 통해 맹주로서 패권국(마치 현대의 미국처럼)으로 군림했던 이 특이한 체제는 제환공으로 부터, 정확하게는 제환공의 재상이던 관중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춘추시대의 청동검, 출처 Flicker

 

 

춘추시대와 이후 주 왕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각자가 왕을 칭하는 전국시대 까지 제 나라는 항상 주요한 강대국 중 하나로 존재했습니다.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의 나라이기도 했고 전국 7웅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제나라가 제환공의 시대에 갑자기 강력한 국가가 된것은 아닙니다. 정 장공 시대에 정나라와 동맹을 통해 이미 제후국 중 2인자에 가까운 위치로 성장 했었고 제환공의 아버지인 제희공 시대를 거쳐 인간으로 평가하자면 말종에 가깝지만 전쟁실력과 영토 욕심에서만은 발군이었던 제 양공이 기나라를 병합하여 제나라의 국력은 이미 주변 제후국 중 가장 강력하다고 할만큼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나라가 한단계 더 올라서 열국들의 패자의 지위를 가지게 된것은 제환공, 관중, 포숙아라는 3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춘추5패와 전국7웅

 

 

관포지교

 

관중, 관이오는 집안이 넉넉하지 않은 평민에 가까운 집안이었고 포숙아의 경우는 제나라의 명문인 포씨집안의 자제 였습니다. 이러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어려서 부터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관중의 초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포숙아는 일찍이 관중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항상 그의 편에 서고 포용해 주었습니다. 관중은 후에 포숙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몫을 더 크게 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 흐름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내게 늙으신 어머니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생아자(生我者) 부모(父母), 지아자(知我者) 포숙아야(鮑叔兒也)).”

 

더구나 포숙아는 관중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때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때가 있는 법이다. 관이오가 그때를 만난다면 백가지중 단 한가지도 잃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두사람은 이와 같이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낼 정도의 위대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실제로 후에 관중은 제환공이 "중부"라고 부를 만큼 그의 정략를 믿고 신뢰하여 패자의 지위에 오르는데 큰 역활을 하였으니 포숙아가 친구를 제대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관중이 병석에 누워 제환공이 관중의 후임으로 포숙이 어떠한지 물었을때 관중은 "안됩니다. 포숙아의 사람됨이 너무 결벽하고 강직함이 지나쳐 백성들을 난폭하게 다스리고 인심을 잃으며 아랫사람을 부리지 못합니다. 패자의 보좌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관중은 자신의 모든것을 포용해준 친구인 포숙아에 대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는 친구로 부터 받기만 한 이기적인 사람이었을까요? 하지만 필자는 관중이 포숙아의 사람됨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제환공을 적절히 보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식견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뛰어난 안목으로 적절한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 활용하는 용인술에 기반하고 있음을 여러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지나치게 원리원칙주의자 거나 결벽이 있는 경우에 그 사람됨은 존경할만 하나 실제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원칙을 따지느라 지나치게 더뎌지거나 예외를 인정하지 않아 오히려 업무를 꼬이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더구나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는 역사를 통해 봐도 원리원칙만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고 결벽이 지나치면 때때로 백성이나 아랫사람을 괴롭게 하거나 국익을 해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에 적절하지 않은 자리는 자칫 자신을 망친 경우가 역사속에 비일비재 합니다. 아마도 포숙아라면 관중의 이러한 자신에 대한 평가마저도 거부감 없이 받아 들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두사람은 무도한 제양공이 군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반드시 난이 있을것이라 예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각각 제양공의 이복형제인 공자 규와 공자 소백(제환공)을 보좌하고 후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군위에 오를 경우 서로를 구해 주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앞서의 제양공의 이야기에서 다루었듯이 포숙아는 거나라로 망명한 소백을 따라 떠나고 관중 역시 제양공이 시해되고 공손무지가 군위를 차지하자 목숨의 위협을 느껴 노나라로 달아난 공자 규를 따라 노나라로 가게 됩니다.

 

군위를 향한 경주

 

제양공을 시해한 공손무지는 공자 규나 소백에 비해 정통성이 사실 부족 하였습니다. 제양공을 대신해 군위에 오를 인물인가? 더구나 폭정을 일삼긴 했지만 적법한 왕을 시해한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나라 신하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대부 옹름과 예전에 다툰적이 있던 공손 무지는 군위에 오른뒤에 보복성으로 그를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홀대하였기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옹름은 공손무지를 시해할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역시 공손무지는 군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동곽아를 찾아가 서로 모의한 끝에 공손무지와 연칭과 관지보를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공손무지가 죽자 제나라의 대부들은 망명중인 공자 규와 소백 중에 연장자인 규를 군위에 올리기로 결정하고 노나라에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소백의 인물됨이 더 낫다고 믿고 그가 군위에 오르는 것이 제나라의 발전을 가져올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대부 고혜는 소백에게도 밀서를 보냅니다.

 

이제 공자 규와 공자 소백은 공손 무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위에 잠재적인 경쟁자가 있는 상태이니 제나라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진것 입니다. 사신으로 부터 상황을 들은 노나라 군주 노장공은 친히 병거 300승을 동원하여 공자 규를 호위하여 제나라로 출발합니다. 공자 소백 역시 거나라에서 병겨 100승을 빌려 제나라 수도 임치로 향하였습니다. 제나라 군위를 향한 경주가 시작된 셈입니다.

 

노나라의 병력이 대군이다 보니 그 진군 속도가 비교적 더뎠고 관중은 비교적 약소국인 거나라에서 출발한 소백의 병력이 적고 거나라가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와 더 가까우므로 소백이 먼저 도착하지 않을까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노장공과 논의 하며 병거 30승을 얻어 노나라의 주력 병력보다 먼저 달려가서 소백이 임치로 향해 오고있는 길목에 먼저 도착하여 군사를 매복하였습니다.

 

소백 역시 공자 규의 병력이 임치로 향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매복하고 있다가 수레위의 소백을 발견한 관중은 멀리서 신중하게 겨냥하여 그에게 활을 쏘았습니다. 활을 맞은 소백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고 관중은 즉시 되돌아가 소백이 활을 맞고 죽었다는 사실을 공자 규와 노장공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경쟁자가 사라져 걱정이 없어진 공자 규와 노장공은 급한 마음이 사라져 느긋하게 임치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허리에 쇠로 된 허리띠를 맞추었기 때문에 소백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활을 맞고 관중을 발견한 소백이 그의 활 솜씨를 알고 있었기에 또 화살을 날릴것이 두려워 쓰러져 있었고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공자 규의 진군 속도를 늦출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계속 죽은척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제나라 군주가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만약 화살이 허리띠를 맞추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거나 적어도 중상을 입어 임치로 달려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중했던 소백은 자신의 시신을 옮기는 것처럼 위장하여 빠르게 임치로 달려갑니다.

 

결국 먼저 임치에 도착한것은 소백이었습니다. 공자 규를 군위에 세우고자 했던 대부들도 막상 소백이 눈앞에 나타나고 대부 고혜가 적극 소백을 지원하자 결국 제나라의 군주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공자 규와 노나라의 대군 역시 임치를 향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소백은 군사를 보내 길목을 막고 자신이 제나라 군위에 올랐음을 알리고 노나라군을 물러가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노장공은 이런 사태를 대비하여 병거 300승이라는 병력을 이끌고 온것이었기 때문에 계속 임치로 향합니다. 병거 300승을 앞세워 내분으로 분열되고 약해진 제나라를 위협하여 공자 규를 군위에 올릴 생각으로 거침 없이 진격하였습니다. 소백은 상대적으로 군사수가 부족했기에 노나라군이 진군하는 길목인 건시에 매복하였다가 노나라군이 나타나자 기습을 가하였습니다. 소백의 병력이 적어 임치를 나와 요격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노나라 군은 이 기습 한번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노장공은 그 자신도 간신히 탈출 할정도로 군사의 태반을 잃고 공자 규와 함께 노나라로 회군하고 말았습니다.

 

노나라 군을 물리치고 임치로 개선한 소백은 마침내 즉위식을 갖고 제나라 군위에 오릅니다. 이가 바로 "제환공" 입니다.

 

-다음편에 계속-

다음글 : 제환공 관중을 등용하고 날개를 펴다. 왕 이야기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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