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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주사위는 던져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실 지난주에는 블로그를 꽤 오래 쉬었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한 후 일주일 가까이 포스팅 하지 못한 경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기 때문에 그 고민으로 인해서 도저히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고민의 끝에 나도 모르게 내 뱉은 말이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내 뱉은 이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 일까요? 바로 로마 제정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넘어 진군 할 때 던진 말이었습니다. 이 카이사르는 생전에 결코 왕이나 황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결국 로마의 공화정을 무력화 시키고 제정을 창시했으며 카이사르란 이름은 로마 황제를 뜻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트의 정식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이며 원래는 로마 군단 최고 사령관울 일컫던 임페라토르와 원로원의 제1인자를 뜻하는 프린켑스 칭호도 가집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트는 황제의 이름으로 임페라토르, 프린켑스는 로마 황제가 물려받는 칭호가 되며 훗날의 황제를 뜻하는 단어들의 기원이 됩니다. 예를 들면 그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식 이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이었고 임페라토르이며 프린켑스였습니다. )

 

이 말을 가지고 카이사르에 대해 쓰고자 자료들을 뒤져보다 보니 처음 생각과 달리 매우 긴 포스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글을 적다 보니 지금의 한국의 상황이 마치 데자뷰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중산층의 몰락과 완전히 게층 별, 세대 별, 이념 등으로 갈라져 증오를 뿜어내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대비해 보면서 과거의 역사속에서 생각할 거리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카이사르 이전의 로마의 상황 요약

 

지금 서술하는 내용들은 아마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줄여 보겠습니다.

 

카이사르 등장 이전에 로마의 공화정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포에니 전쟁을 통해 카르카고와의 전쟁에 승리하였으나 긴 전쟁에 동원되었던 로마군단을 이루는 핵심이었던 이탈리아 반도의 자작농들은 자신의 토지를 돌볼 수 없어 생활이 궁핍해졌고 대표적인 밀 산지이던 시칠리아가 로마의 영토가 되면서 값싼 곡물이 수입되어 가격 경쟁력이 없던 자작농들은 토지를 팔고 도시의 빈민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런 토지들을 헐값에 사들여 대토지를 사유하는(라티푼디움) 기득권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군단의 핵인 중무장 보병은 일정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자작농이 몰락하면서 그 재산의 하한선이 점점 내려가 원래는 병역을 치룰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까지 병역 대상이 되면서 로마 군단의 질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는 더 넓은 영토와 경계선의 이민족들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 로마에 심각한 안보의 위협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기원전 134년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123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 두 형제는 각각 호민관에 당선되어 농지법을 제정하여 국유지의 공정한 분배와 자작농을 육성하고자 하였고 식민법을 제정해서 새로운 식민도시에 시민들을 이주시켜 경제 부흥을 꾀했습니다. 또 곡물법으로 빈민들에게 싼 값으로 밀을 제공하고 로마시민권을 이탈리아내의 동맹국으로 확대하는 등의 법안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기존 기득권층인 원로원 세력을 자극하여 그들에 의해 그라쿠스 형제는 각각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비록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하였지만 로마가 당면한 문제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 후 로마는 동맹시 전쟁을 겪으며 민중파와 원로원파로 국론이 분열되고 민중파였던 마리우스와 원로원 체제를 수선하여 유지하려 했던 술라 간의 내전으로 로마인 끼리 피를 뿌리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카이사르

 

영어로 "시저", 독일어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 러시아의 "짜르" 모두 카이사르라는 이 인물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이사르 자신은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양자이며 로마에 제정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물려줌으로 제위 계승권을 주기 시작한 것이 유래이기도 합니다. 또다른 황제를 뜻하는 임페리얼은 로마의 군단장을 뜻하는 임페라토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두꺼운 4권과 5권 두권을 할애해서 다루어지는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다 보니 블로그에서 그의 이야기를 모두 다루는 것은 어려울듯 합니다. 그래서 생략과 비약이 좀 있더라도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그의 생의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고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18번째 왕이야기를 채워보려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흉상

 

카이사르가 태어난 시기의 로마는 공화정이었으나 광대해진 로마를 다스리기에 원로원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리우스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루키우스 코넬리우스 술라)는 로마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반도에 오리엔트 원정군을 이끌고 상륙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를 무력으로 장악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원로원의 허가가 없으면 북쪽의 루비콘 강과 남쪽의 브란디시에서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국내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권력을 잡은 술라는 독재관으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체제개혁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술라는 원로원과 공화정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독재관을 스스로 내어놓고 권력을 원로원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원로원 체제를 수선하여 조금 더 그 수명을 연장 시켰을 뿐이었습니다.

 

이 술라의 살생부에 18세의 카이사르도 그 이름이 올라있었는데 그가 마리우스의 처조카이며 역시 마리우스파였던 킨나의 사위였기 때문 입니다. 다만 아직 정치적인 행위가 없었던 어린 소년의 구명을 위한 탄원이 이어지자 술라는 킨나의 딸과 이혼하는 조건으로 그를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혼을 거절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도망다니다가 잠시 로마 군단에 들어가 군 생활을 합니다. 결국 22세에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야 겨우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후 변호사로 개업하려던 시도를 하면서 술라파의 거물이었던 인물에 대한 고발과 관련한 소송에 패하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술라파들을 자극하여 결국 로도스로 유학이라 명분으로 다시 로마에서 달아나야 했습니다. 당시 로도스로 가는 해역은 해적이 자주 출몰하였는데 그가 타고가던 배가 그만 해적에 붙들리고 맙니다. 이때의 일화는 "플루다르크 영웅전"에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해적들은 승객에 따라 몸값을 매겨서 몸값을 받은 뒤에야 풀어줬는데 카이사르에게는 20 탈란트의 몸값을 매겼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돈은 당시로는 로마군단 하나를 모병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하는데 카이사르는 "네놈들이 누구를 잡았는지 모르는가 보구나" 하면서 자신의 몸값을 스스로 50 탈란트로 올렸습니다. 그후 그는 거액의 몸값이 매겨진 중요한 포로가 되어 해적들에게 조차 상당히 대접 받으며 지낸 모양입니다. 그는 해적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언젠가는 네놈들의 목을 메달고 말테다"라고 위협까지 했다고 합니다. 해적들은 그 말을 듣고도 농담으로 받아들여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어찌됐던 거액의 돈을 받을 수 있는 포로니 이런 말을 듣고도 참으려 했겠지요. 결국 카이사르의 종자가 몸값을 가지고 돌아와 겨우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카이사르는 가까운 밀레토스로 달려가 배를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 해적선을 기습하여 해적들을 오히려 생포합니다. 해적들의 재물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50탈란트의 돈을 되 찾은 것은 물론이고 카이사르는 그가 한 말대로 해적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이 일화로 볼 때 그는 기지와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몸값을 높여 해적들에게 귀하게 다루어져서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나중에는 그 돈도 되찾을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결국은 로마에 돌아온 그는 37세에야 최고제사장이라는 일종의 국가 요직에 선출됩니다. 이때까지 그가 진 빚은 무려 1천 300탈란트로 11만명의 병력을 1년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돈을 자기자신과 자신의 지지자가 될 친구들에게 아낌 없이 뿌렸다고 합니다. 소심한 일반인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배짱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저 라면 벌써 한강 다리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빚의 크기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빚으로 별로 스트레스를 받은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이후에 한 일은 과거의 그라쿠스 형제가 제정했던 샘프로니우스 법, 즉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사형 선고를 받아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는다는 법에 대한 환기였습니다. 이법은 당시의 기득권층인 원로원 계층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여 재판을 거치지 않고 반역 행위를 저지른다고 판단되는 자를 직접 처형 가능 하게 함으로써 유명무실 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법을 제정한 그라쿠스 형제가 그 첫 희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항소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원로원 최종권고"는 유명한 카탈리나 역모사건에 다시 발동되었고 카이사르는 이 사건에서 로마 시민에 대한무조건 적인 사형 선고인 원로원 최종 권고에 반대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민중파로써의 자신의 입지와 의지를 알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탈리나 역모 사건에서 반란 가담 의심을 받았을 때 취한 연예 편지를 통해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해소한 일화는 그가 유머마저도 활용하는 뛰어난 정치적 소질과 사람들이 빠져들게끔 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군단병의 종군 거부를 "시민 여러분" 이라는 말 한마디로 잠재운 것도 그가 보통 사람들보다 무척 생각이 깊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해당 일화가 소개된 이전 글

2012/10/06 - [Favorite] - 내가 원하는 지도자에 대한 생각

 

이후 법무관을 거쳐 그는 에스파니아 총독으로 속주 총독을 역임하는 등 마침내 출세의 길에 들었다고 보입니다. 총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민중파에 대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집정관에 출마하여 로마의 정치에 관여하려 합니다. 이시기에 우리는 고등학교 세계사에 본 삼두정치라는 말을 보게 됩니다. 당시의 이미 많은 군사적 업적으로 유명해진 폼페이우스와 명예는 없지만 재력은 가진 크라수스, 뛰어난 정치력을 가졌지만 기반은 없던 카이사르. 세 사람은 비밀 협약을 맺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크라수스는 앞서 언급한바 있는 카이사르의 빚의 최대 채권자였는데 빌려준돈이 많다 보니 계속 카이사르를 도와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가 실패해서 파산한다면 그는 빌려 준 많은 돈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빚이란 참 재미있는 성질을 지닌 것 같습니다.

 

 

이 1차 삼두정치의 시작은 폼페이우스가 그의 휘하에서 제대하는 부하들이 표를 행사하여 카이사르를 집정관에 당선되게 하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입안하고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오리엔트 지역의 재 편성안을 승인한다는 협약이 주였습니다. 여기에다 힘의 균형이 폼페이우스에게 너무 기우니 경제계의 대표인 크라수스를 끼워 넣은 것 이지요.

 

폼페이우스 두상

젊은 시절부터 놀라운 군사적 재능과 업적으로 마그누스(위대한) 폼페이우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기존 기득권의 저항을 받던 농지 분배에 대한 "농지법"을 민회와 삼두 간의 협력으로 통과 시킵니다. 이 법안은 앞서에 언급한 그라쿠스의 형제의 "농지법"을 계승한 정책이었으나 카이사르의 교묘한 전략적인 접근으로 유혈 사태 없이 타협을 통해 가결시키고 맙니다. 제가 그에게서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이런 정치적 능력 입니다. 과거의 토지 분배에 대한 주장들이 결국은 기득권들과의 유혈 충돌로 끝났던 것에 비해 토지에 대해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결국 법안의 동의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점 입니다. 그것도 결코 무력이나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 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 합니다. 당시 원로원의 기득권층들을 심한 패배감을 느겼다고 합니다.

 

1년 간의 집정관을 마친 후 그는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갈리아는 오늘날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만 해도 대부분이 켈트족이 지배하는 어두운 숲의 땅이었습니다. 갈리아로 부임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라는 명저를 남기며 무려 8년에 걸쳐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는 위업을 이룹니다. 이 부분은 제국주의 정복이나 카이사르 개인의 명성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보기 보다는 로마의 안보와 방어선에 대한 카이사르 자신의 확고한 생각과 계획을 완성하기위해서 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것 같습니다. 갈리아 전쟁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진진하지만 한정된 지면상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쉬운 분들에게는 갈리아 전쟁이 생생하게 묘사된 "로마인 이야기" 4 권이나 "갈리아 전쟁기"를 권합니다

 

이 긴 정복의 와중에 루카라는 지방에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세사람이 회담을 가지고 2차 삼두정치라 불리는 체제가 출범합니다.

이 협의는 카이사르는 기존대로 갈리아 총독으로 갈리아 정복을 지속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기원전 55년의 집정관으로 당선시키고 임기 이후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각각 10개 군단을 편성하여 각각 로마의 서방과 동방, 북방을 책임지기로 한 셈입니다. 사실상 3인의 권력으로 원로원 체제를 뛰어넘는 권력을 가지게 된 셈입니다. 각자의 이득을 위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원로원이 이루어 내지 못하던 로마 국가 방어선 확립을 3인의 강자들이 책임지기로 협의한 셈입니다. 사실 이정도면 이미 원로원 체제의 로마 공화정은 그 수명을 다했다고 봐야 할듯 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끝내는 전쟁 8년차에 결국 이 삼두 정치는 깨어지게 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삼두의 한 축인 크라수스가 동방 원정중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간의 사이가 악화되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 둘사이의 틈을 파고 든것은 원로원파 였으며 결국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에 서게 됩니다.

 

기원전 49년 로마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지지를 얻어 갈리아 총독인 카이사르에게 귀국 명령에 복종할 것을 명하는 취지의 법안을 통과시키려 합니다. 호민관과 카이사르파가 반대하자 원로원은 결국 앞서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역행위를 꾀하는 자는 로마 시민이라도 재판 없이 사형시킬 수 있다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무기로 꺼내 듭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민중파였던 카이사르와 기득권의 싸움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아 이 중에는 삼두정치등과 같은 수단으로 원로원을 무력화 시킨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독재자가 되리라는 생각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답을 내기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원로원 최종권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가에서 갈리아 정복기간 내내 자신을 따랐던 군단을 이끌고 고민 합니다. 물론 자신의 권력과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생각했겠지만 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큰 인물이 그 이유로만 고민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강을 건너면 내전을 피할 수 없고 내전은 원한과 증오를 남깁니다. 이 증오는 필연적으로 부모 자식간, 형제간의 사이도 가리지 않고 갈라 놓습니다. 이 당시에도 갈리아에서의 거둔 전공과 명쾌한 태도등으로 카이사르는 지도층에서도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원로원 의원인 아버지와 세대간의 갈등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국 사회도 대선 때 마다 출마한 인물을 두고 계층간, 좌 우, 세대간 갈등이 어느 때보다 첨예한 시대를 살고 있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가 강을 건너지 않으면 그가 생각했던 로마의 개혁은 다시 그라쿠스 형제가 사망하고 개혁이 꺽이는 시점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그가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로마 개혁에 대한 신념이 꺽이는 것이기도 했을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 통채로 부정 당하는 것이 어쩌면 목숨이 위협받는 것 보다 더 큰 좌절이 될수도 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고 루비콘 강을 건넙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후 로마의 체제와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건넌 루비콘 강의 위치

 

이후의 이야기는 간략하게 줄이자면 결국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달아나고 이탈리아를 차지한 카이사르는 이를 추격해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결국 원로원파를 사실상 끝장냅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나지만 이집트의 소년왕과 그 측근들에 의해 살해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를 추격해온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저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이번에는 지면 관계상 생략을 하겠습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동방으로 건너가 크라수스가 전사함으로써 확립하지 못했던 동방의 경계선을 확립하게 됩니다.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저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한 줄로 된 전과 보고를 원로원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 전신상

 

이후 원로원파 잔여세력을 탑수스에서, 문다에서 격파하여 완전히 정리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자신의 신념대로 수많은 개혁을 진행합니다. 우선 로마의 방어선 확립은 이미 앞서도 언급 했으니 추가로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달력 개정, 통화 개혁, 로마 시민권의 확대, 정치체제 정비, 금융 개혁, 행정 개혁, 해방 노예 등용, 속주 통치 정비, 사법 개혁, 복지 대책과 실업자 대책 마련, 치안 확립, 교통 정책 수립, 수도를 재개발 하고 의료 수준을 향상하는 등등, 국가 전체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이루어 냅니다. 이처럼 그는 당시 원로원 체제가 해내지 못한 개혁들을 단기간에 해치운 셈입니다. 그 밖에도 카이사르는 광대한 로마의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원로원 체제보다 권력이 집중된 제정이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듯 합니다. 그래서 인지 결국 "카이사르 특권"이라는 것을 부여 받아 사실상 로마 제정의 출발점에 서게됩니다.

 

하지만 이런 큰 변화들은 필연적으로 반발을 받기 마련 입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단의 암살자들은 원로원에 참석한 카이사르를 단검으로 스물 세 군데를 찔러 살해하고 맙니다. 이렇게 당대의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정치가인 카이사르는 목숨을 읽고 말았습니다. 그가 쓰러지면서 남긴 "브루투스 너마저!" 란 말도 유명 합니다. 다만 이때의 브르투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니라 과거 카이사르의 참모 중 하나 였던 암살자 중에 한 사람인 데키우스 브루투스 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한 이유는 암살에 성공한 후 외친 말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가 회복되었다"

"폭군은 죽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이 암살자들을 뒤는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 하거나 또는 비열한 암살자로 바라보는 시각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대부분의 역사에서 자유를 쟁취 하려 했다고 후에 추앙되는 거사들은 대부분 그렇게 앞뒤를 생각하고 가려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이 암살자들은 공화정이라는 체제를 지키겠다는 신념과 열정을 가진 단순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비록 그 행위가 또 하나의 내전과 오히려 제정의 출발을 더욱 앞당겼다 하더라도 그들의 동기는 분명 황제라는 독재자의 탄생을 막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리려는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노파심에 감히 시오노 나나미를 까다니! 이런 류의 댓 글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분의 책을 꼭 사고 자주 읽는 열성 팬이지만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는것이지요.

 

카이사르의 암살

 

 

 

생각해 볼 거리들

 

카이사르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보면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현재의 한국 사회가 겹쳐 보입니다. 물론 역사의 흐름은 꼭 동일한 상황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에 그 상황과 같다 다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조금 유사함이 있다는 것이지요.

 

중산층에 해당하는 자작농의 몰락. 사회의 계층간 세대간, 또는 체제를 둘러싼 이념간의 심각한 갈등, 기득권의 행태 등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과거의 행위를 영원히 반복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갈등을 해소하고 낡은 체제를 유지하고 보수 하기 위한 술라의 쿠데타는 어떤 쿠데타를 떠오르게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술라와 지금 생각하시는 인물과 동일시 하는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유사성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또 그라쿠스 형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민중의 권리를 확대하려는 시도와 이를 좌절시키고 꺽으려는 기득권의 행태는 수 천년이 지나도 큰 변화가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카이사르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제정을 염두에 둔 부분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로원파와 민중파 둘로 갈라져 심각한 사회 갈등을 빚느라 해결하지 못하던 개혁을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고 이후 몇 백 년간 지속될 국가의 개혁을 한 순간에 이루어내는 효율성을 바라 본다면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배우고 자라온 제 생각이 조금 "흔들"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로마는 이후 제정시대에 안정적이고 또 다른 빛나는 발전을 이루어 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은 나중에 등장하는 폭군들이나 무능한 황제들을 생각하면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진 정치 체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혼란을 주는 부분은 현대의 관점에서 민주주의 체제에 가까워 보이는 원로원파 주도의 공화정이 오히려 당시에는 일반 민중을 억압하고 국가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 입니다. 물론 현재의 국회와 원로원의 구성원들도 똑 같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원로원의 귀족들이나 지금의 투표로 뽑힌 국회의 양반들이나 그 신분이나 가진 기득권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작금의 한국 정치가 한국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어떤 분의 이야기가 생각 나는 군요. 오히려 제정을 확립하고 황제가 되려 한 카이사르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중을 위한 국가 개혁과 정치를 한것 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카이사르는 분명히 제정이라는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볼때 일종의 1인 독재를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과거와 현재의 사정이 똑 같지는 않은 것으로 혼란을 느끼기 보다는 모두가 같이 생각할 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위의 역사 이야기를 통해 보셨듯이 흑과 백, 좌와 우 같이 명백하거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때때로 지나친 증오로 상대를 없애 버리길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옳은 것이 아니고 상대도 모두 틀리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흐리멍텅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필자는 분명 현재의 우리는 위의 역사의 예에서 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해와 타협"이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 입니다. 만약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로마처럼 피를 흘리는 댓가를 치룰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이런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고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 또한 인간이 가진 장점 중 하나 이기 때문 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조 :

카이사르 -wikipedia.org-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그라쿠스 형제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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