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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광해군 현대에 재평가 받은 왕, 왕 이야기 16

조선 시대 왕중에 제왕의 묘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명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 입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생전에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라는 점입니다. 즉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에서 끌어내려진 왕들이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폭군으로 여겨졌던 왕들이었습니다. 

 

연산군도 최근에는 왕권강화 시도에 실패한 왕이라는 견해로 재조명 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광해군은 조금 더 일찍부터 재평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관련글 : 연산군, 모정에 굶주렸던 폭군. 왕 이야기 9

 

어린시절 역사 사적등을 방문하는 일이 있으면 의아했던 부분중 하나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많은 역사 유적들의 재건시기가 그 포악하다는 혼군의 이미지를 가진 광해군 시기라는 점입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 포악하다던 폭군이 왜 이렇게 많은 건물과 시설들을 재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해군의 이미지는 현대에 점점 뛰어났으나 불운했던 군주의 이미지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최근 드라마 "불의여신 정이"의 광해군(이상윤). 이미지 출처 : imbc 

 

세자 책봉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1575년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혼(李琿) 입니다. 어린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습니다. 생모 공빈 김씨는 광해군 출산후의 산후병으로 2년 후인 1577년 5월에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인 선조가 정비인 의인 왕후에게서 적자를 보지 못하자 광해군의 친형이며 서 장자인 임해군은 일찍부터 그 성정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계승 후보에 탈락하고 자연히 광해군이 세자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공빈이 사망한 후 총애하는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으므로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하였습니다. 더구나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의 왕인 선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서자와 방계 출신 왕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적장자라는 출신성분에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역시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게 탐탁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선조의 이 출신에 대한 열등감은 재위 내내 표출되는 그의 의심 많은 성격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신하고 아들이고 가리지 않게 속된 말로 찌질하게 느껴질 만큼 시샘하고 견제했던 모습의 원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 세자 책봉을 미루던 선조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신성군이 15세의 나이에 병사한데다가 그 자신의 무능한 통치력도 있었지만 전쟁을 원할하게 수행하기 위해 조정을 나누는 이른바 "분조"를 행하기 위해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기 힘들어 졌습니다. 결국 광해군을 왕세자에 책봉 하고 후에는 의인 왕후의 양자로 입적하게 됩니다.

 

 

임진왜란중 전시 조정을 이끈 광해군

 

임진왜란 중 광해군의 행적은 "분조"로 대표됩니다. 분조란 의주와 평양에 머물던 선조와 원래의 조정(심지어 선조는 임란초기에 의주에서 명나라로의 망명까지 고려합니다) 과 달리 광해군이 주도하는 전쟁 극복을 위한 이른바 전시 조정을 말합니다.

 

광해군은 전쟁 기간중 각지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경상도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는등 선조를 대신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임진왜란 극복의 한 요인으로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꼽기도 합니다. 전쟁시에 보여준 전시 수반으로서의 광해군의 행적은 백성과 신료들의 신망과 지지를 얻게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두각을 드러낼수록 부왕인 선조는 더 더욱 광해군을 경계하고 의심하여 견제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르다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습니다. 이는 왕세자로써 입지를 굳혔다고 생각되던 광해군의 세자 자리를 다시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광해군을 미워하고 견제하던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더구나 소북파이던 유경영은 선조의 이런 심정을 지지하여 "적통론"을 내세우며 영창대군을 왕위에 세우고자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608년 병석에 있던 선조가 약밥을 먹다 체하여 승하하자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세자 교체 시도를 했던 유경영은 탄핵으로 주살되고 이를 반대했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등은 광해군 즉위에 공로를 인정받아 중용되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북이라 하였고 이후 소북파는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즉위 초기 광해군은 어머니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당쟁의 폐해를 알고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남인계 인사와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 않게 대우하는등 당쟁을 수습하려 노력하였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만큼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필자가 어릴때 본 많은 유적들이 이때에 재건 되었습니다. 임란때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등을 재건하고 역시 임란때 소실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등을 다시 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재건 사업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불타버린 궁궐의 재건과 새로운 궁궐을 세움으로 민생을 더 어렵게 했다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국왕으로 불타버린 궁궐과 시설을 재건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대동법을 시행한 부분에 대해서도 민생을 챙기려 한것이다와 대동법을 이해 못해 오히려 과한 세금을 매겨 전란을 치룬지 얼마 안된 백성들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해군이 왕이 된 후의 정책은 잘했다 잘못했다로 한마디로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재도 경제정책은 잘했다 잘못했다로 쉽게 판단 내리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실리외교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략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 김경서등을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명나라를 돕되 적극적으로 돕지는 말고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후 명나라군이 잇달아 패주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강홍립이 후금에게 조선의 출병의 본의가 아님을 해명하게 함으로써 후금과의 전쟁을 막고자 한 실리적인 외교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명분을 앞세워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가 두차례의 전화와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온것을 보면 이는 국제정세를 살피고 나라를 전란에서 회피하게 한 탁월한 외교였지만 임진왜란시 명나라의 원조에 대한 의를 앞세우는 당시 사대부의 명분론에는 배치되는 외교 정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린시절 본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재조명하여 그전 까지의 폭군에 대한 이미지와 관점을 바꾼 최초의 사극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혈 시청자이던 어머니가 읽으시던 "조선왕조 500년" 소설은 당시 판본에서는 드라마와 관점이 달라서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소설에는 초등학생이 읽기엔 유해한 부분이 많아서 몰래 훔쳐 보았던 저와 어머니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보아서 폭군 광해군에 대한 인식이 희석된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제가 몰래 보는걸 아셨을것 같습니다. ^^

 

실은 이 실리외교라는 부분도 그저 우유부단했을 뿐이며 파견된 13,000명이나 되는 병사들중 9,000명이 죽게 만들고 나머지도 포로로 노예생활을 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견해도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실리외교론 쪽이 아직은 납득이 가는 편입니다.

 

 

실정

 

모든 사람에게는 공이 있으면 과도 있는 법입니다. 광해군은 부왕인 선조와 비교하자면 그 행적으로 보아 왕으로써의 통치능력 및 외교적 자질은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몇가지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되는 패륜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1609년 광해군은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다는 상소에 따라 교동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임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진언과 상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공식적으로는 곧 병사하였습니다. 정황상으로는 이이첨등 대북파에 의해 살해당한것으로 보입니다. 광해군이 연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연루되었다면 친형제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 할 수 있고 연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방조했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613년 서얼 출신들이 조령에서 은 상인을 죽이고 돈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자신들을 강변칠우라 하며 서얼차별을 폐하는 논지의 상소를 했다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전국을 돌며 화적질과 악행을 저지르다 이러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대북은 이들을 심문하여 영창군을 옹립하려 역모를 일으키려 했으며 그 우두머리가 인목 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고 인목 왕후 역시 가담했다는 허위 자백을 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1614년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도 폐서인되어 강화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된 영창대군은 방안에 가두어진채 장작불을 지펴 열기로 죽게 합니다. 당시 9세 였던 영창대군은 열기로 달아오른 방바닥때문에 않지도 눕지도 못하고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로 잔혹한 살해 방법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에 본 드라마에서 영창대군역의 아역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온 방안을 뛰어다니다 죽는 장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비록 연기였지만 30년가까이 흐른 지금도 제 기억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이는 이이첨일파가 강화부사를 시켜 저지른 일로 조정에는 병사했다고 보고 합니다.

과연 이일도 광해군이 정말 몰랐고 이이첨등 대북파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일까요?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역시 1615년 역모 고변이 있자 유배하여 목을 매어 자결하도록 강요합니다.

능양군과 능창군은 인빈김씨 소생인 정원군의 아들들로 선조의 서손입니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아들이며 역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의 형인 신성군이 후손 없이 일찍 죽자 그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으므로 왕위계승 순위로는 형인 능양군(훗날의 인조)보다 앞서 있기때문에 먼저 목숨을 잃은 셈 입니다.

 

최근 드라마 불의여신 정이 에서 인빈 김씨(한고은), 어찌 보면 신성군을 세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인빈의 야망은 손주인 인조(능양군)로 인해 결국 어느정도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이미지 출처 :imbc

 

이이첨등 대북파는 끈질긴 상소로 1618년에는 계모인 인목 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게 합니다. 비록 계모라고 하지만 효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이일은 광해군의 도덕성에 대한 평판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이러한 일련의 왕권을 위협하는 왕족들에 대한 숙청 작업은 필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졸렬하고 성급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대북파인 이이첨일파의 주도로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광해군의 교사가 있었다고 보이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비난은 피할수 없습니다.

 

아마도 똑같이 역모를 대하여 친형제를 죽게만들고 어머니를 유폐하였지만 땅속에서 어머니를 재회하여 효를 칭송받은 정장공의 고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것 같습니다.

 

관련글 : 살아서 황천에서 어머니를 만난 정장공, 왕 이야기 6

 

위에서 언급한 이이첨과 총애받은 상궁인 김개시, 정인홍 등은 많은 옥사를 일으켜 왕족들 뿐만 아니라 많은 반대파 신료들도 무자비 하게 숙청하였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남용하였습니다. 위의 임해군이나 영창대군, 능창대군을 죽게 만든것이 정말 이이첨등의 소행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측근도 제어하지 못한 왕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측근들의 권력 남용도 민심과 신료들이 등을 돌리는 이유의 한가지가 되었습니다.

 

 

멪으며

 

결국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 당하였다가 제주도로 옮긴 후 67세에 사망(인조19년)하였습니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광해군의 "패륜" 입니다. 두번째는 명과 청에 대한 외교적인 태도에 대한 당시 사대부의 반발로 설명 되지만 되지만 글쓴이의 생각에는 두번째 명분만으로는 폐위까지 가기 위한 명분으로는 약하다는 생각입니다. 연산군도 그렇지만 동아시아에서 왕을 폐하는 가장 큰 명분은 옜날부터 효를 저버리거나 일가를 살해하는 등의 "패륜" 인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성급한 왕권 강화의 과정에서 친형제와 종친을 살해하고 계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행위로 인하여 "패륜 군주" 라는 큰 명분을 반정세력에게 준 셈입니다.

 

광해군은 서자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거기다가 왕위에 오르기전에는 인빈 김씨 소생의 신성군과 세자 자리를 다투었고 서 장자인 형 임해군도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세자가 된 후에도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 세자 교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부왕인 선조는 세자로 삼고나서도 견제와 미움을 숨기지 않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던지라 승하 직전에도 광해군이 문안을 오자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광해군으로서는 부왕인 선조와 마찬가지의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에 더하여 자신의 왕위에 대한 위협에 더 더욱 예민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선조의 변덕과 견제는 광해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것 같습니다. 그가 보여준 통치능력과 외교적 판단력과 비교해 보면 그는 유달리 이러한 왕권의 위협에 대해서는 전혀 이성적이고 냉정한 대처를 하지 못하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와 왕권 위협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바로 광해군이 폐위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요?

 

현대에서 와서는 재조명 되다 보니 광해군을 지나치게 미화하려고 하는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과 과가 있습니다. 광해군의 경우에도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그 과는 분명 왕위에서 끌어내려질 명분을 주었습니다.

 

역사는 하나이지만 시대에 따라서 다른 해석과 당시의 사람들에 기준에 의거한 기록이 남습니다. 사상의 변화와 시대에 따라 해석이 변할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반대급부의 논리로 급변 되는것은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아닐수 없습니다. 분명 광해군은 뛰어난 통치력과 외교적 감각을 지닌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운의 명군으로 미화될 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폐위될만한 과실도 저지른 왕으로 공정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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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3.10.19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다지 통치력 있는 왕이란 생각은 안 들어요. 정치가에게 무릇 제일 기본인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인데 광해군은 그 기본에서 실패했죠. 통치력이 있다면 반정세력의 싹이 틔었을 리 있었을까요? 나라운영은 무릇 사람운영에서 시작하는 법인데 광해군은 그 기본에서 무너졌다는 점에서 그다지 능력 있는 왕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후대 재조명되면서 사람들이 IF 가정법을 쓰며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 했을 것이다라며 애석해하지만 사실 그건 사람들 희망사항일 뿐이고요...

    그리고 광해 같은 아동살해자 패륜남을 몇몇 정치적 업적으로 '성군'으로 추켜세운다면 박정희나 전두환도 후대에 성군으로 평가받겠죠-_- 단순한 사대주의 때문에 정약용 같은 조선 유학자들이 광해군을 비판하진 않았을 겁니다.

    • 맞습니다 재평가 되어야 할 부분도 있지만 분명 당파에 휘둘려 아랫사람을 제어하지 못한것이 권력을 잃은 가장 큰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 편견다메요 2013.11.09 2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재조명되어야하는 인물인건 맞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미화시키지 말라는 말도 맞다고 생각되네요. 너무 흑백 논리로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면 편견이 생겨버리죠.
    하지만 제가 어릴때 배웠던 것처럼 간신배에 놀아나고 폐륜을 저지른 폭군이다라고 하기엔 분명 뛰어난 점도 보인 왕인거 같습니다. 모 어차피 정확한건 알수없지만요 ㅇㅅㅇ;

    • 남겨주신 의견에 감사합니다.
      광해군이 폭군의 이미지를 많이 벗었지만 그렇다고 성군으로 볼 수는 없다는 관점을 적어보았습니다.

  •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 글이었네요.
    요즘 인터넷에 광해군 쳐 보면 지나친 재평가와 미화된 드라마, 영화의 영향으로 광해군이 광종으로 까지 추앙받으며 지나치게 성군화되는 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도 광해군은 성군은 아니며, 다소 운이 없었던 왕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왕의 자질로만 따지면 평범했다...라고요. 세자시절의 행적으로 보면 성군 가능성이 컸지만 폐모살제, 지나친 궁궐 공사 등으로 망쳐버린...

    • 감사합니다.
      반동이 일어나면 그 것이 지나쳐 재평가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성군으로의 미화까지 되는 부분이 편치않아 적어보았던 의견이었습니다.

  • 2013.11.28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광해군이 성군이다 폭군이다 떠나서 분명한건 임란이후 국가전후 복구사업에 상당한 힘들 쏟았으며,
    무엇보다 당시 떠오르는 새로운강자 후금의 국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는 실리적인 외교덕분에 광해군 치세때는 후금의 창끝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후금과의 전쟁을 피했다.. 이것만해도 엄청난 치적이라
    생각합니다. 임란을 치른지 얼마안된 피폐해진 상황에서 또다시 후금의 침략을 받았다면 조선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망했을 겁니다. 광해군 앞뒤로 선조와 인조를 경우를 보세요 국제정세를 재대로
    파악못하고 그놈의 명분만 쫓다 나라꼴 어떻게 파탄냈는지를....

    광해군의 과라면 글쓴이분 말씀대로 왕권강화과정에서 부왕이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은폐한 사건과
    영창대군 사사, 임해군 사사등이 광해군의 과라면 과일 것입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친모는 아니지만 엄현이 부왕의 왕후로써 광해한테는 부모가 되는건 사실이고
    그 부모를 서궁에 가둔 효를 범한일, 그리고 친형인 임해군사사 그리고 영창대군 사사해서 친형제를
    범한일 등등...

    • 2015.02.23 0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목대비 와 영창대군이 그렇게 된 이유을 알고 글을쓰셈 인목대비 아버지 김재남이 영창대군을 왕에 올리겠다는 역모를 꾸민것임 살아 남을수 없는 죄목임 패륜이 아니라는 말임

  • 2013.11.28 1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명 광해군의 잘못한일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볼까요? 멀리 갈것없이 조선3대왕 태종 이방원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은 국왕입니다.그는 조선역사상 명군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 이방원이도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대립을 하였고 왕위를 차지하기위해 2차례걸쳐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등극한 인물입니다. 부왕의 계비인 신덕왕후 능을파헤치는 폐륜을를 저질렀구요 세조를 볼까요?
    세조는 더하죠..... 조카를 내쫓아 왕위를 찬탈하였고 더 나아가 친조카를 죽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적통을 깨뜨린 인물이 바로 수양대군 세조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조선왕조계보에서 한동안 명군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광해군은 양반이고 당시 상황으로도 어쩔수없는 선택이였습니다. 그만큼 권력은 냉정하고
    잔인하거든요. 광해군이 아니더라도 누가 왕이됬던 왕권을 지키기위해선 광해군과 같은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을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인조는 승자였고 괭해는 패자였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이 폭군으로 기록되어질수 밖에 없었구요... 광해군은 제가 볼때 운은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재평가되서 성군이였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 봉화산 2014.03.09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패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인조를 추종했던 세력들이
    왕권을 이어가다보니 광해군에 대해 성군으로 표기할만한
    임금이 없었다
    병자호란 하나만 보더라도
    광해군은 너무도 훌륭한 외교전술을 폈으며
    국가를 잘 다스린 왕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5000년 역사에 나라를 대표하는 국왕이
    손들고나가 적장수에게 항복을 했던적이 있었는가?
    그 머저리 인조뿐이다
    인조 그 자슥은 큰아들 큰 며느리도 죽이고
    손자세명중 두명까지 죽였던 임금이다
    시도때도없이 자리를 노리는 반대파들을 숙청한
    광해군과 비교했을때 누가 폭군이고 현군인가?
    광해군은 분명 재조명 되어야 하며
    정치와 외교를 잘한 성군으로 지금 이라도
    왕의 칭호를 부여하여야 한다.

  • 광해군 2014.03.11 0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0년대 중반이전엔 광해군을 흡사 연산군 비슷하게 그려서 답답하게 하더니 이시대엔 광해를 너무 출중한 명군으로 그려서 오히려 역겹지요. 성격이 유약했으며 측근들 즉 북인들에게 너무 휘둘리던 왕입니다. 대대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서인들을 일거에 쓸어내자는 북인들에 제동을 걸어야 했는데도 심지어 역모사건을 조작하고 자신의 인척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북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면서도 외교에서만큼은 자신이 전권을 행사하려다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죠. 아마도 광해는 또다른 국가적 전란을 두려워했으며 가능한한 피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아들 광해와 비교하면 아버지 선조는 재질이 뛰어나 신하들을 능숙하게 다루었습니다. 권력의 균형추를 유지해 한부류 신하들의 권력 독점을 막았지요. 그럼에도 아들 광해군은 북인에 휩쓸려 파탄을 보고 말았으니 어쩌면 세자를 두고 주저 하던 선조의 안목이 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인천하 조정에 북인을 발탁한건 아버지 선조였지만 서인과 북인들을 적절히 조절해 내치가 극단으로 치닫는 걸 막았지요. 아들은 그것에 실패하여 패주가 된것입니다.

    광해의 실리외교 또한 오늘날 사람들의 과장이 지나치지요. 유교적 질서와 명분이 치도의 99.99%에 해당하는 그 시대에 사대를 넘어 민족주체를 세웠던 왕이라는 식으로 광해를 그리려는 시도는 역사적 날조에 해당합니다. 광해는 아버지 선조를 닮아 재능이 뛰어나고 명석한 사람이었으나 아버지가 가진 결단력과 정치적 감각을 가지지 못해 실기했던 아까운 왕입니다. 아버지가 크면 대신 아들은 쭈그러들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 선조가 그리 결단력과 정치적 감각이 있는데 일본에 그딴 굴욕을 당했을까요? 그 뒤의 인조도 그렇고..광해가 그 가운데 그나마 끼었으니 다행인거죠. 안그랬음 중간에 중국한테 넘어갔을듯

    • 이기적인 선조 2014.06.13 1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라와 백성은 돌보지 않고 자기 왕권만 생각했던 선조를 뛰어나다면서 칭찬하다니, 이상한 관점이시군요. 왕은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면 안되죠. 하지만 선조는 그런 성향의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이순신, 아들 광해군 등 자기보다 잘난 사람은 시기하고, 의병장까지 죽이고...뭐 이런 찌질한 왕이 다 있는지...

  • 추측성 2014.06.20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당시의 정황과 상황만 가지고는 광해군을 판단 할수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북파 행실에 광해군이 연루 되었다는 확실한 부분은 없고 정말 광해군은 모를수 있다고 생각이 하네요 오히려 대북파의 다른 야심으로(왕권약화등으로) 광해군몰래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려 한것도 임란으로 그 폐해를 잘알았고 그만큼 나라정세를 잘판단한 왕이라고 생각되네요

  • 광해군만 탓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임해군을 유배시킨것 빼곤 아무것도 죄가 없습니다.
    중립외교정책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광해군에게 폭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태종이방원 그리고 세조도 따지고 보면 폭군이죠.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사람들을 많은 희생으로 몰고갔으니까요.
    그리고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사육신을 죽이는 등 따지고 보면 폭군인데 성군으로 평가되지는 않아도 휼륭한 정책을 펼친 광해군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광해군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입니다.
    광해군이 있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신하들은 당파싸움이나 하고 있을때니까 광해군은 따지고 보면 폭군이 아닌 성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세종대왕 못지않은 어쩌면 더 뛰어난 휼륭한 왕입니다.

  • 실정에 대해
    패륜은 사실 반정을 한 왕에게도 적용되는겁니다
    다만 그들은 승자이고 광해군은 패자라는 차이이지요
    태종 세조 모두 패륜을 저질렀어도 대의명분을 내세울 수 있던건 그들이 승자였기 때문일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

    전반적으로 내용에 공감했지만 이 부분은 걸려서 글 남겼습니다
    우연히 보게 됐지만 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님은 광해군의 방조죄를 논죄하고 있지만... 광해군 시절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에 한명이 바로 [홍길동전]을 저술한 허균입니다. 광해군의 실권은 이 허균이 살아 있던 시절과 사형에 처해진 이후로 나뉩니다. 즉, 왕권 강화를 위해 정인홍, 허균 등이 광해군을 지원하면서 이이첨을 쳐 낼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자 이이첨을 지원하게 되어 버렸는데 문제는 이 이이첨이 잘했으면 문제가 하나도 안될건데 이이첨이가 너무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심지어 이이첨의 스승인 정인홍 조차도 이이첨을 말리라고 했는데 광해군에게는 그런 실권이 없었죠. 허균, 이원익.. 등등의 신료들이 낙향하거나 처형당했고 나머지 성리학자들은 광해군의 측위조차 반대햇떤 사람들이라 결코 광해군의 편이 되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허균 사후에는 왕따를 당하며 이이첨을 말릴 수가 없었던 거죠.

    • 2014.11.26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사실은 인조반정의 반정공신이면서 인조반정의 작전계획을 실질적으로 설계했던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자) 지천 최명길이 [나는 광해군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래도 반정을 해야겠다] 라는 말을 보면 당시 광해군이 어떤 입장에 처해 있었는지 알 수 있지요. 광해군이 단순히 김개시 때문에 저리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심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어짜피 김개시가 반정을 막으라고 말해 줘도 광해군의 수족이 되어줄 사람들이 이미 다 처형되거나 유배된 상태였기에 설사 광해군이 반정을 제압하려 했었더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김개시도 반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김자점에게 연주을 대었던 것입니다.

  • 하루 2014.11.27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등과는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걸 보면, 조선을 망하게하고 결국엔 식민지까지 겪게 만든 성리학의 심화가 광해군을 왕에서 내리게한 결정적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성리학외에는 전부 이단으로 치부하던 당시 사림들로 인해 이런 평가가 이뤄진것 같습니다. 역사 발전관점이나 자주적 입장에서보면 인조

    가 반정에 성공한게 많이 아쉽긴 합니다. 우리를 소중화라 부르며 명에 대한 사대로 인해 근대화가 늦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이는 일본에 조선은 중국

    의 속국이다는 논리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고요. 결국 인조가 능양군이 되는게 맞지 않았나 싶네요

  • 모른 사이에 댓글로 활발한 토론들이 있었군요. 작성자로 의견을 덧붙인다면 이글 전반에는 광해군의 공을 후반은 과를 적었습니다. 역사는 위인전이 아니라 세종대왕이라도 공과 과가 있다는게 제 입장입니다 냉정하게 봐서 결국 광해군의 가장 큰 죄는 왕위를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건우 2015.04.08 0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광해가 왜 성군인지 모르겠네요? 왕이 된 후 전란으로 민생이 어렵고 후금이 크고 있는데 왕권 강화를 위해 무리하게 궁궐재건에 엄청난 인력과 국가재정을 사용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친형과 이복형제들을 사사하고 중전대비마저 폐위합니다. 이런 패륜은 건국 초기 왕권강화가 절실했던 이방원도 하지 않은 일입니다.

  • 엉터리글이네 나라망친유교에서못벗어나는 양반

    • 글 취지를 전혀 이해 못하신것 같군요 유교를 옹호한게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인의 인식과 기준으로 폐위될 명분이 된다는 겁니다.
      정말 현명했다면 그런 부분은 정정공의 고사처럼 피했을거라는 말입니다. 정장공이 정말 효자라서 그런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 2015.06.07 0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창대군을 저렇게 죽인것에 대해서 사실인지는 알수없습니다.
    왜냐면 광해군은 패자이기 때문에 승자의 취향대로 역사가 다르게 쓰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 상황을 모를왕도아니고.ㅡㅡ; 저렇게 해서 자기한테 좋을게 하나도없거든요.
    물론 불안의 씨앗인 영창대군이 살아있으면 안되는 상황이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일 이유도 없죠.
    그리고 인조반정(<<이것역시 조선에 명분으로보면 잘못이거든요. 역성혁명<<은 왕조가 싫어합니다(정도전을 죽인이유중하나죠)
    명분을 만들기위해서 조작했을 수도 있다는거죠. 이렇게 해서 그 명분으로 반정을 한것이다<<라구요.
    특히 그뒤에 정권을 잡은 인조가 결코 광해군을 좋게 썼을지없을것이고 원칙상 실록.일기는 볼수 없지만 어짜피 그 뒤에 왕때 쓰는것이니 만큼 약간의 조작도 가능하다는거죠.
    자기들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면 조작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 잘보고가요~

  • 구경꾼 2017.08.13 0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대의기준으로보면 백성의 제외된 밥그릇 싸움이네요....그때의 기준으로 봐도 자기들이 손해보니까 패륜명분을 적용한거죠.. 어느시대나 똑같습니다.. 폐위해도 지들에게 유리한 정책으로 그대로 유지했을겁니다..

  • 구경꾼 2017.08.13 0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광해군은 제껴두고 연산군을 봤을때 반정이후에 훈구파들의 만행이 그들의 반정에 문제 있었다는것을 반증합니다.. 인조반정이후에 인조의 행보도 문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