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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광해군 현대에 재평가 받은 왕, 왕 이야기 16

조선 시대 왕중에 제왕의 묘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명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 입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생전에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라는 점입니다. 즉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에서 끌어내려진 왕들이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폭군으로 여겨졌던 왕들이었습니다. 

 

연산군도 최근에는 왕권강화 시도에 실패한 왕이라는 견해로 재조명 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광해군은 조금 더 일찍부터 재평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관련글 : 연산군, 모정에 굶주렸던 폭군. 왕 이야기 9

 

어린시절 역사 사적등을 방문하는 일이 있으면 의아했던 부분중 하나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많은 역사 유적들의 재건시기가 그 포악하다는 혼군의 이미지를 가진 광해군 시기라는 점입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 포악하다던 폭군이 왜 이렇게 많은 건물과 시설들을 재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해군의 이미지는 현대에 점점 뛰어났으나 불운했던 군주의 이미지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최근 드라마 "불의여신 정이"의 광해군(이상윤). 이미지 출처 : imbc 

 

세자 책봉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1575년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혼(李琿) 입니다. 어린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습니다. 생모 공빈 김씨는 광해군 출산후의 산후병으로 2년 후인 1577년 5월에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인 선조가 정비인 의인 왕후에게서 적자를 보지 못하자 광해군의 친형이며 서 장자인 임해군은 일찍부터 그 성정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계승 후보에 탈락하고 자연히 광해군이 세자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공빈이 사망한 후 총애하는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으므로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하였습니다. 더구나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의 왕인 선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서자와 방계 출신 왕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적장자라는 출신성분에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역시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게 탐탁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선조의 이 출신에 대한 열등감은 재위 내내 표출되는 그의 의심 많은 성격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신하고 아들이고 가리지 않게 속된 말로 찌질하게 느껴질 만큼 시샘하고 견제했던 모습의 원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 세자 책봉을 미루던 선조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신성군이 15세의 나이에 병사한데다가 그 자신의 무능한 통치력도 있었지만 전쟁을 원할하게 수행하기 위해 조정을 나누는 이른바 "분조"를 행하기 위해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기 힘들어 졌습니다. 결국 광해군을 왕세자에 책봉 하고 후에는 의인 왕후의 양자로 입적하게 됩니다.

 

 

임진왜란중 전시 조정을 이끈 광해군

 

임진왜란 중 광해군의 행적은 "분조"로 대표됩니다. 분조란 의주와 평양에 머물던 선조와 원래의 조정(심지어 선조는 임란초기에 의주에서 명나라로의 망명까지 고려합니다) 과 달리 광해군이 주도하는 전쟁 극복을 위한 이른바 전시 조정을 말합니다.

 

광해군은 전쟁 기간중 각지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경상도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는등 선조를 대신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임진왜란 극복의 한 요인으로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꼽기도 합니다. 전쟁시에 보여준 전시 수반으로서의 광해군의 행적은 백성과 신료들의 신망과 지지를 얻게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두각을 드러낼수록 부왕인 선조는 더 더욱 광해군을 경계하고 의심하여 견제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르다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습니다. 이는 왕세자로써 입지를 굳혔다고 생각되던 광해군의 세자 자리를 다시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광해군을 미워하고 견제하던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더구나 소북파이던 유경영은 선조의 이런 심정을 지지하여 "적통론"을 내세우며 영창대군을 왕위에 세우고자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608년 병석에 있던 선조가 약밥을 먹다 체하여 승하하자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세자 교체 시도를 했던 유경영은 탄핵으로 주살되고 이를 반대했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등은 광해군 즉위에 공로를 인정받아 중용되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북이라 하였고 이후 소북파는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즉위 초기 광해군은 어머니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당쟁의 폐해를 알고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남인계 인사와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 않게 대우하는등 당쟁을 수습하려 노력하였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만큼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필자가 어릴때 본 많은 유적들이 이때에 재건 되었습니다. 임란때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등을 재건하고 역시 임란때 소실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등을 다시 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재건 사업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불타버린 궁궐의 재건과 새로운 궁궐을 세움으로 민생을 더 어렵게 했다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국왕으로 불타버린 궁궐과 시설을 재건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대동법을 시행한 부분에 대해서도 민생을 챙기려 한것이다와 대동법을 이해 못해 오히려 과한 세금을 매겨 전란을 치룬지 얼마 안된 백성들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해군이 왕이 된 후의 정책은 잘했다 잘못했다로 한마디로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재도 경제정책은 잘했다 잘못했다로 쉽게 판단 내리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실리외교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략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 김경서등을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명나라를 돕되 적극적으로 돕지는 말고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후 명나라군이 잇달아 패주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강홍립이 후금에게 조선의 출병의 본의가 아님을 해명하게 함으로써 후금과의 전쟁을 막고자 한 실리적인 외교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명분을 앞세워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가 두차례의 전화와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온것을 보면 이는 국제정세를 살피고 나라를 전란에서 회피하게 한 탁월한 외교였지만 임진왜란시 명나라의 원조에 대한 의를 앞세우는 당시 사대부의 명분론에는 배치되는 외교 정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린시절 본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재조명하여 그전 까지의 폭군에 대한 이미지와 관점을 바꾼 최초의 사극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혈 시청자이던 어머니가 읽으시던 "조선왕조 500년" 소설은 당시 판본에서는 드라마와 관점이 달라서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소설에는 초등학생이 읽기엔 유해한 부분이 많아서 몰래 훔쳐 보았던 저와 어머니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보아서 폭군 광해군에 대한 인식이 희석된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제가 몰래 보는걸 아셨을것 같습니다. ^^

 

실은 이 실리외교라는 부분도 그저 우유부단했을 뿐이며 파견된 13,000명이나 되는 병사들중 9,000명이 죽게 만들고 나머지도 포로로 노예생활을 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견해도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실리외교론 쪽이 아직은 납득이 가는 편입니다.

 

 

실정

 

모든 사람에게는 공이 있으면 과도 있는 법입니다. 광해군은 부왕인 선조와 비교하자면 그 행적으로 보아 왕으로써의 통치능력 및 외교적 자질은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몇가지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되는 패륜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1609년 광해군은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다는 상소에 따라 교동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임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진언과 상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공식적으로는 곧 병사하였습니다. 정황상으로는 이이첨등 대북파에 의해 살해당한것으로 보입니다. 광해군이 연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연루되었다면 친형제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 할 수 있고 연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방조했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613년 서얼 출신들이 조령에서 은 상인을 죽이고 돈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자신들을 강변칠우라 하며 서얼차별을 폐하는 논지의 상소를 했다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전국을 돌며 화적질과 악행을 저지르다 이러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대북은 이들을 심문하여 영창군을 옹립하려 역모를 일으키려 했으며 그 우두머리가 인목 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고 인목 왕후 역시 가담했다는 허위 자백을 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1614년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도 폐서인되어 강화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된 영창대군은 방안에 가두어진채 장작불을 지펴 열기로 죽게 합니다. 당시 9세 였던 영창대군은 열기로 달아오른 방바닥때문에 않지도 눕지도 못하고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로 잔혹한 살해 방법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에 본 드라마에서 영창대군역의 아역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온 방안을 뛰어다니다 죽는 장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비록 연기였지만 30년가까이 흐른 지금도 제 기억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이는 이이첨일파가 강화부사를 시켜 저지른 일로 조정에는 병사했다고 보고 합니다.

과연 이일도 광해군이 정말 몰랐고 이이첨등 대북파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일까요?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역시 1615년 역모 고변이 있자 유배하여 목을 매어 자결하도록 강요합니다.

능양군과 능창군은 인빈김씨 소생인 정원군의 아들들로 선조의 서손입니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아들이며 역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의 형인 신성군이 후손 없이 일찍 죽자 그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으므로 왕위계승 순위로는 형인 능양군(훗날의 인조)보다 앞서 있기때문에 먼저 목숨을 잃은 셈 입니다.

 

최근 드라마 불의여신 정이 에서 인빈 김씨(한고은), 어찌 보면 신성군을 세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인빈의 야망은 손주인 인조(능양군)로 인해 결국 어느정도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이미지 출처 :imbc

 

이이첨등 대북파는 끈질긴 상소로 1618년에는 계모인 인목 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게 합니다. 비록 계모라고 하지만 효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이일은 광해군의 도덕성에 대한 평판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이러한 일련의 왕권을 위협하는 왕족들에 대한 숙청 작업은 필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졸렬하고 성급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대북파인 이이첨일파의 주도로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광해군의 교사가 있었다고 보이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비난은 피할수 없습니다.

 

아마도 똑같이 역모를 대하여 친형제를 죽게만들고 어머니를 유폐하였지만 땅속에서 어머니를 재회하여 효를 칭송받은 정장공의 고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것 같습니다.

 

관련글 : 살아서 황천에서 어머니를 만난 정장공, 왕 이야기 6

 

위에서 언급한 이이첨과 총애받은 상궁인 김개시, 정인홍 등은 많은 옥사를 일으켜 왕족들 뿐만 아니라 많은 반대파 신료들도 무자비 하게 숙청하였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남용하였습니다. 위의 임해군이나 영창대군, 능창대군을 죽게 만든것이 정말 이이첨등의 소행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측근도 제어하지 못한 왕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측근들의 권력 남용도 민심과 신료들이 등을 돌리는 이유의 한가지가 되었습니다.

 

 

멪으며

 

결국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 당하였다가 제주도로 옮긴 후 67세에 사망(인조19년)하였습니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광해군의 "패륜" 입니다. 두번째는 명과 청에 대한 외교적인 태도에 대한 당시 사대부의 반발로 설명 되지만 되지만 글쓴이의 생각에는 두번째 명분만으로는 폐위까지 가기 위한 명분으로는 약하다는 생각입니다. 연산군도 그렇지만 동아시아에서 왕을 폐하는 가장 큰 명분은 옜날부터 효를 저버리거나 일가를 살해하는 등의 "패륜" 인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성급한 왕권 강화의 과정에서 친형제와 종친을 살해하고 계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행위로 인하여 "패륜 군주" 라는 큰 명분을 반정세력에게 준 셈입니다.

 

광해군은 서자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거기다가 왕위에 오르기전에는 인빈 김씨 소생의 신성군과 세자 자리를 다투었고 서 장자인 형 임해군도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세자가 된 후에도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 세자 교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부왕인 선조는 세자로 삼고나서도 견제와 미움을 숨기지 않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던지라 승하 직전에도 광해군이 문안을 오자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광해군으로서는 부왕인 선조와 마찬가지의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에 더하여 자신의 왕위에 대한 위협에 더 더욱 예민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선조의 변덕과 견제는 광해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것 같습니다. 그가 보여준 통치능력과 외교적 판단력과 비교해 보면 그는 유달리 이러한 왕권의 위협에 대해서는 전혀 이성적이고 냉정한 대처를 하지 못하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와 왕권 위협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바로 광해군이 폐위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요?

 

현대에서 와서는 재조명 되다 보니 광해군을 지나치게 미화하려고 하는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과 과가 있습니다. 광해군의 경우에도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그 과는 분명 왕위에서 끌어내려질 명분을 주었습니다.

 

역사는 하나이지만 시대에 따라서 다른 해석과 당시의 사람들에 기준에 의거한 기록이 남습니다. 사상의 변화와 시대에 따라 해석이 변할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반대급부의 논리로 급변 되는것은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아닐수 없습니다. 분명 광해군은 뛰어난 통치력과 외교적 감각을 지닌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운의 명군으로 미화될 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폐위될만한 과실도 저지른 왕으로 공정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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