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덟번째 왕 이야기는 두 번째 왕이야기에서 다루었던 "블러디 메리" 의 동생이며 헨리 8세와 앤 블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입니다. 그녀는 재위동안 반 에스파니아 정책을 통해 저 유명한 에스파니아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고 추밀원을 중심으로 균형적이고 집단적 지성을 통한 정치와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든 왕입니다.
같이 불행한 과거를 겪었지만 다소 어두운 면을 가진 언니 메리 1세와는 달리 천성적인 밝은 성격과 활기찬 태도로 인해 주변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성격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복 자매 사이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성격 만큼 상반된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들도 극명하게 갈립니다. 언니인 메리 1세가 블러디 메리(Bloody Mary)로 불리우며 두려움과 압제의 상징이 된 반면 앨리자베스 1세는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상반된 치세와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도 말년에는 의회와 충돌을 빚기도 하고 때때로 절대군주의 권위를 드러내는 까다로운 성격이 되긴 했지만 전반적인 치세를 보면 그녀의 재위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대영제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을 닦은 "엘리자베스의 황금 시대"로 기억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 출처 wikipedia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8세와 "천일의 앤" 으로 유명한 앤 블린의 딸로 테어났습니다. 앤 블린은 원래 헨리8세의 전처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헨리 8세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카톨릭과 결별하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까지 에스파니아 왕녀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블린과 재혼을 합니다.
헨리 8세와 앤 블린 : 출처 wikipedia
아라곤의 캐서린 : 출처 wikipedia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후에 블러디 메리라 불리는 메리 1세를 슬하에 두었습니다. 한때 웨일즈 여공작으로 왕위 계승자로 대우 받고 귀여움을 받던 메리 1세도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으로 한때는 이복 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봉사하도록 명 받는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혼을 하고도 스페인의 왕녀로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캐서린과는 달리 비록 시녀지만 귀족신분이기도 했던 앤 블린은 아들을 원한 헨리 8세의 염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 죄로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쓰고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습니다. 엘리자베스 역시 신분이 서자로 격하되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에드워드 6세 : 출처 wikipedia
헨리 8세는 3번째 부인인 제인 시무어로 부터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 아들이 바로 마크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의 모델이 된 에드워드 6세로 병약한 몸으로 인해서 재위기간내 이복 누나인 메리 1세에게 항상 왕위에 대한 위협을 받으며 짧은 치세를 보내야 했습니다. 신교도 인 그가 생질인 제인 그레이를 다음 왕위 후보자로 지목한 것은 당시 호국경이던 존 더들리 공작이 자신의 아들을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키며 정권을 유지하려 한 술책이 있기도 했지만 왕위 계승법상 우위인 메리 1세는 열렬한 카톨릭 교도 였고, 엘리자베스는 모종의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기에 독실한 신교도인 제인 그레이를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가 휘말렸던 스캔들이란 그녀가 헨리8세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져 재혼한 캐서린 파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의부였던 토마스 시모어와 포응하고 있는것을 발견한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쫒아내고 토머스시모어와 이혼한 사건을 말합니다.
엘리자베스가 평생 처녀여왕으로 독신주의를 고수한데는 아들을 얻기 위해 쉴새 없이 배우자를 갈아치우며 때로는 죽여서라도 목적을 이루려 했던, 아들이 아닌 딸들에게는 냉담했던 아버지 헨리 8세에 대한 기억, 이러한 스캔들 등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 6세 이후 여왕에 오른 제인 시무어는 불과 9일간의 여왕에 머물렀고 서포크 지방으로 잠시 몸을 피했던 메리 1세가 민중들의 동정과 더들리 반대파 귀족들의 호응을 받으며 런던으로 진격하여 더들리 부자를 몰아내고 여왕에 즉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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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메리 1세 : 위키피디아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1세는 제인 그레이와 이복 동생인 엘리자베스에게 카톨릭 교도로 개종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 하지만 제인 그레이는 개종을 거절하고 죽임을 당했고, 역시 신교도 였던 엘리자베스는 카톨릭교도로 거짓 개종을 하여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엘리자베스가 그 시기에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에드워드 1세 사후 제인 그레이 대신 신교도 였던 그녀가 후계자로 지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죽임을 당한것은 엘리자베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카톨릭 교도로 개종을 했다고 하더라도 잠시라도 여왕에 올랐던 사람을 살려두기엔 항상 찬탈에 대한 의심과 공포를 가진 왕들의 세계에서는 쉽지 않은 일 입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역시 메리1세의 치세 동안 끊임 없는 견제를 받으며 때로는 런던탑에 갇히기도 하고 고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며 블러디 메리의 치하를 견뎌낸 그녀는 말년에 압제자로써 악명을 떨쳤던 메리 1세가 1558년 병으로 사망하자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 즉위 합니다.
출처 wikipedia
메리 1세가 절대 군주로써 다수의 국민과 집권층의 바램을 무시하고 친 에스파니아 정책을 펼치고 독실한 카톨릭 군주로 신교를 탄압하고 약 300명의 신교 신자들을 화형 시키는 등의 공포정치를 행했던 것을 기억하던 신교 세력의 영국인 들 중 일부는 신교, 즉 성공회 신자이던 엘리자베스 여왕을 통해 카톨릭에 복수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르네상스식 사고를 가진 독실하지는 않은 성공회 신자로써 종교적 극단성을 혐오하고 종교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일을 재현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비록 잉글랜드의 국교를 신교, 성공회로 다시 되돌리긴 했지만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의 대립을 피하는 중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영화 골든에이지의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와는 달리 적극적인 반 에스파니아 정책을 통해 영국의 국익을 취으려 하였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드러내놓고 에스파니아를 적대하진 않았지만 프렌시스 드레이크 와 같은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니아 상선을 약탈하게 하는 등의 수단으로 견제를 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에스파니아에 국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행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하는 등 이후로도 에스파니아의 대외정책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견제하는 행보를 보였고 결국 에스파니아는 반란에 연루된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어 볼 계획입니다.)을 계기로 당시 유럽 최강으로 알려진 "무적함대"를 파견하여 영국을 제압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저항에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폭풍우를 만나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스파니아의 재해권은 크게 흔들렸고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반면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메리카에 진출해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건설하고 인도에는 동인도 회사를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나서게 되어 후의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게 됩니다.
그녀는 절대군주 답게 추밀원과 정치가들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면서도 추밀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하여 고급 두뇌 집단과 소통하며 그들의 경험과 의견을 신중히 수렴하여 결정하는 균형적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1년에 몇차례 순시를 통해 국민들의 의견과 여론을 수렴에 적극적 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절대군주들과 비교되는 애민정책 이기도 합니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로 극단적인 종교 정책과 친 에스파니아 정책을 펼피며 때때로 압제로 까지 표현되는 불통의 독단적인 치세를 펼친 언니 메리1세와 가장 다르고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엘리자베스의 치세를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로 황금 시대로 기억하고 대영제국의 발판을 닦은 치세로 기억되게 만든 반면 불통과 광신적인 종교 정책을 펼친 언니인 메리 1세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로 불리우며 그녀가 죽은 날을 두려움과 압제에서 해방된 날로 이후 얼마동안 기념되는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역사는 많은 부분에서 형태는 다르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유사한 모습으로 되풀이 되는데 우리는 지금 현재를 불통과 압제의 시대로 기억하게 될까요? 황금의 시대로 기억하게 될까요? 메리의 시대에 비추어야 일까요 엘리자베스의 시대로 기억 할까요? 아마도 후세가 판단하게 될 듯 합니다.
이처럼 메리 1세와 달리 민중의 절대적인 인기에 존경을 받던 엘리자베스 1세 도 나이가 들어 치세 말기에는 총신들에게 쉽게 독점권을 주어 의회와 충돌하는 등 절대군주로서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문제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일랜드 반란진압 실패와 이로 인한 런던의 반란 등으로 심적인 고통을 겪고 말년에 우울증과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 받던 그녀는 급속히 기력을 읽어 1603년 7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독신으로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끝으로 튜더 왕가의 혈통이 단절 되었고 헨리 7세의 후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열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쳐서 통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