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어느새 계절이 가을의 문턱에 온 것 같습니다. 8월 말에 라섹 수술을 하고 나서 회복중인 동안은 사실 멀리 나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해서 최근에는 아이들과 주말 나들이를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늘 아파트 단지 안에서만 놀다 보니 아이들이 살짝 지루해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오늘은 이사 오고 나서도 3년 내내 한번도 안 가 본 아파트 맞은편 길 건너로 산책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채 300m도 안되는 거리에 불과 하지만 아이들은 마치 탐험을 떠나는 기분인가 봅니다. 기분이 상당히 업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3개의 브랜드 아파트가 모여서 소규모의 신규 단지촌을 구성하고 있지만 원래는 완전히 시골이었던 곳이라 단지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시골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앞 길 건너 편은 사실 미 개발 지구여서 3년 넘게 살면서도 이상하게 한번도 발길이 가지 않은 곳인데, 사실 저 뿐만 아니라 아무도 발길을 하지 않는... 곳이긴 합니다. 이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박! 뜻밖의 장소들을 발견해서 약 2~300m의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탐험을 하고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흐르는 서호천의 발원지 쪽이기도 합니다. 단지 주변을 흐르는 이 하천은 아파트들 주변은 정비되고 예전에 공원화 되었지만 이 길 건너 상류쪽은 최근에야 시에서 관심을 가지고 짧은 거리나마 정비를 하고 있습니다.
길을 건너보니 일단 못 보던 나무 다리가 생겼습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불상사가 있었던 큰 아이도 늘 같이 다니면 매사에 아무 방향으로 전력 질주만 하고 있는 둘째 녀석을 데리고 다리를 건너 봅니다.
아이들 키우다 보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것 같습니다. 생전 가 볼일 없던 병원도 자주 가보게 되구요. 뭐 손가락 골절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큰 아이는 생각 없이 명랑 합니다. 엄마, 아빠만 마음이 아프지요.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하늘은 완전히 가을 하늘 같습니다.
길 건너에는 아직 예전의 농가와 철거 지역이 된 집들의 흔적이 좀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 빈집이지만 아직 사람이 사는 집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실 아파트 단지와 그 주변으로 생성된 학교와 상가 주변만 돌아 다니다 보니 건널목 바로 너머로 펼쳐지는 이런 생소한 풍경도 매우 흥미로운가 봅니다.
집앞 텃밭에 심어져 있는 호박꽃도 신기하고 배추나 가지도 아이들은 그저 신기해 하는데 전 어쩐지 아련한 향수가 생깁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도시에 주택가도 길은 포장되어 있지 않는 흙 바닥 골목길 앞에는 이렇게 텃밭이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나 저나 하늘과 구름은 정말 기가 막힌 날이었습니다. 사시 사철 이런 날씨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m도 안되는 짧은 길인데 아이들에게는 신기한게 많은 길 입니다. 이름 모를 들꽃부터 나팔 꽃, 제비 꽃 다양한 꽃들마다 걸음을 멈추고 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동화책에서는 나팔꽃에서 소리가 났는데 왜 소리가 안 나느냐는 아들...
강아지풀 펜싱도 아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정말 제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주변에 흔해 빠진 사물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장난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길을 나서기 전에는 이렇게 짧은 산책길에서 마추치는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즐거운 것들이 가득찬 모험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동안 참 멀리만 놀러 다녔는데, 얼마전에는 용인에 캠핑을 가기도 했구요. 그런데 집 코앞에 캠핑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거리상으로는 한 300m도 안되는 거리입니다. 집 코 앞에 캠핑장을 두고 맨날 멀리만 돌아 다녔군요.
그렇다고 물론 집 앞에 있는 캠핑장을 갈 거 같지는 않습니다. 원래 여행은 떠나는 맛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길이 없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길 끝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다리가 하나 보입니다. 아이들은 저기까지 가보자고 성화 입니다.
다리로 가는 길에 보게 된 수영장, 헉 물놀이도 늘 멀리만 다녔는데 이런 야외 수영장이 코 앞에 있는 줄은 역시 몰랐습니다. 내년 여름에는 워낙 가까우니 한번 가 봐야 겠습니다.
오래 되어 삐걱거리는 철제 다리를 건너는 아이들, 다리를 건너 인적 없는 밀림으로 향하는 해적이 된 듯 탐험심이 넘칩니다. 그래도 다리가 무너질까 겁이 나나 봅니다. 아빠는 무거우니까 자기들 다 건너면 혼자 건너오랍니다.
다리 곳곳에 쳐져 있는 거미줄을 보면 오랫동안 사람들이 건너 다닌적 없는 다리인것 같습니다. 삐걱삐걱 소리가 색다른 아련함을 느끼게 해 주는 예쁜 다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더 위쪽에도 다리가 하나 더 있는데 연수원이 있는 쪽으로 더 돌아서 올라가야 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보고 다음에 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멀리 아파트 단지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데 마치 숨은 비경 속에 들어온 기분 입니다. 다리를 건너 도착한 맞은 편에는 커다란 잉어가 헤엄치고 있는 연못과 분수, 물레방아가 있었고, 수목이 울창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건널목 건너에 이런 곳이 펼쳐져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숨겨져 있는 비밀의 정원을 발견한 기분 이랄까요?
인적이 없는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나중에 보니 잘 쓰이지 않지만 경기대학교 연수원? 교육원 인 것 같습니다. 네이버, 다음 지도 모두 나오지 않는 곳이라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경기대학교 XX원 이라는 글자가 일부 지워진 간판을 하나 보았습니다.
인적도 없고, 거미줄도 많아서 사람이 오랫동안 찾지 않은 곳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방치되지는 않은 듯 최소한의 관리의 손길이 보입니다.
어떤 지도 어플에도 나오지 않고, 정원의 수목들이 너무 울창해서 전체적으로 그늘지고 어두워서 공포 영화 촬영장소로 쓰이기 딱 좋아보이는 장소 입니다.
비밀의 정원을 벗어나 현실로 가기 위해 다시 다리를 건넜습니다.
여기서도 보이는 아파트 단지, 정말 가까운 곳에 이런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비밀스러운 정원이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듯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도, 날아다니는 나비, 잠자리도, 어느집 담장의 무궁화 등이 아이들 발길을 멈추게 해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길가에 죽어 있는 거대한 말벌도 아이들에게는 상상속의 이야기 거리가 되나 봅니다.
다시 건널목을 건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 옵니다. 길 건너에 신비한 정원과 커다란 벌들이 살고 있는 숲들을 뒤로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1시간 남짓 느릿 느릿한 산책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나 봅니다.
길을 건너 오면서도 쉴새 없이 조잘 조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주로 둘째 녀석의 상상 속 이야기인데 누나가 잘 받아 주는군요.
오늘 집 주변 탐험으로 아이들은 꼭 멀리 어딘가를 여행 가야만 즐거워 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운 곳이라도 아이들이 충분히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할 만한 것들이 집 주변에 많은데, 꼭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야만 된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말 아이들과 주변을 여행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가끔은 가까운 주변을 산책하며 천천히 탐험하는 것도 하나의 아이들과의 즐거운 놀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눈이 완전히 회복되면 아마도 주말마다 또 열심히 싸돌아 다닐거 같습니다. 부산 사람들이 해운대 잘 안가고 서울 사람들이 한강 잘 안 가듯이 말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사실 이 포스팅도 아직 눈이 완전히 회복 안 되어서 사진으로 때우는 포스팅 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