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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닮았나?, 유전자에 대한 독특한 관점에 대한 잡담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의사인 화자의 친구 M은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로 생식 능력이 상실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결혼을 했는데 뜻밖에도 아내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M은 아들의 발가락을 보면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 소설의 M에 언행을 보면 결혼한 아내와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숨기고 싶은 마음, 결국은 검사를 통해 결혼을 확인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 결국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었으면 하는 생각과 부성애도 겹친 복잡 다난한 심경이 느껴집니다. 그런 M에게 "얼굴도 닮은 데가 있네" 라고 눈길을 피하며 답해주는 화자의 휴머니즘이 드러나는 구성이 흥미롭게 짜인 단편 소설이었습니다.


링크 : 발가락이 닮았다 원문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떠올리면 가끔 드는 생각은 왜 인간이나 동물은 자식에게 모성애나 부성애를 느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습니다. 또 자식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으면 더 즐거워하고 예뻐할까?


왜 M은 아들에게서 자신이 물려준 유전 형질의 어떤 단편이라도 찾으려 애쓰는걸까? 왜 아내의 부정에 분노하고 내 아이가 아니면 모든게 무너진다고 여길까? 사실을 알아내고 쿨하게 아내를 용서하고 아이는 그냥 남의 아이라도 자식같이 예뻐하고 키우면 안되는 걸까?


사실 이런 부분은 인간의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특질과 관련 있는 것은 분명 합니다.


내 아이가 예쁜 것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의 특징은 감상적이거나 철학적인 답변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제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나랑 닮았네


잠깐 이야기를 돌려서, 제 경우에 사진 취미가 있고 사진 보관을 위해 구글 포토에 가족사진을 보관해 두는 편인데 제 어릴 적 오래된 사진도 일부는 보관을 위해서 스캔을 받아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재미있는 것이 구글 포토에 인물별로 자동으로 분류를 해주는 기능을 우연히 보니 어릴 적 제 사진과 아들의 사진을 동일 인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과 아래의 제 사진을 놓고는 "같은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이 떠 있기도 했습니다.


내 어린시절 사진

가장 왼쪽이 어린시절의 저입니다.


구글 포토에서 얼굴 인식을 통해서 인물 별 사진을 분류해주는 기능인데 어린 시절의 저와 제 아들은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을 만큼의 유사성이 있었나 봅니다.


구글 포토 같은 사람인가요?

위 캡쳐는 다른 집 아들 형제를 각각 찍은 사진인데 동일 인물이냐고 묻는 게 재미있습니다.


유전적 형질의 발현은 여러 가지 수학적 경우의 수와 후성 유전물질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하고 사실 사람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자녀는 이 염색체가 정확이 23개씩 갈라져서 생물학적 부모의 유전 형질을 50 : 50으로 물려받게 됩니다. 즉 나는 나의 자녀에게 유전자는 50%의 형질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셈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자녀는 50%의 복제된 '나' 인 것입니다. 형제는 25% 나와 같은 형질을 공유합니다. 우리가 서로 닮는 건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같은 형질이 발현된 것입니다. 다른 점은 이미 가지고 있는 형질 중 다른 부분이 발현되었거나 46개 조합의 공통으로 물려받지 않은 다른 부분에서 온 것이겠지요.


처음의 제 의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흔히 핏줄이라 말하는 자녀를 왜 보살피고 돌보는가?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졌던 즈음에는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뭔가를 찾기도 어렵던 시대라(전화 모뎀 접속) 찾기도 어려웠고 몇몇 책에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글들이 많았는데 "인간성" 같은 철학적인 답변이 아니라 과학적, 논리적 답변을 원하던 제게는 명확한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총각 시절의 저는 제가 아이를 키우고 아이에게 부모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에 이르는 모든 어린아이를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의문에 더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납득이 되는 설명을 보게 된 것은 우연히 접하게 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 또는 "이기적 유전자"로 번역되는 책에서였습니다. 1976년이 초판인 이 책은 과학 교양서 중에서 여전히 많이 읽히는 책들 중 하나입니다.


가장 제 머리를 한대 후려친듯한 충격을 준 해당 책의 개념은 바로 “생물 진화의 주체는 유전자이며, 생물들은 모두 유전자의 자가복제 속에서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이다” 개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결코 인간이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창조된 특별한 피조물이 아닌 친척인 원숭이처럼 진화하는 동물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그 당시 시대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면 그럼에도 우리가 다른 종들과 구분된다고 특별하다고 여기던 지성, 인간성, 모성애, 이타적 마음 같은 것들조차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닌 단순히 우리 몸속에 있는 유전자의 복제와 그 유전형질을 지속적으로 후손에 남겨가기 위한 행위에 도움이 되고 선택된 사전에 프로그래밍 된 단순 형질과 같다는 개념이 2차적인 충격인 셈입니다.


이 책은 이전까지 주류 학설이던 집단 선택설을 부정하고 대안 가설로 "자연선택의 진정한 단위는 유전자이다." 와 같이 주장하며 DNA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함께 모성애, 공격성, 협력과 배반, 이성 간의 경쟁, 세대 간의 경쟁 등 자연의 여러 행동 양상들을 '유전자적인' 관점에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물론 진화의 단위가 개체가 아닌 집단이라는 집단 선택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여전히 유전자 선택설과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사실 저는 우리가 단순히 "유전자를 태우고 다니는 로봇"이라는 개념이 더 확 와닿으며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주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우고 다니는 유전자의 복제와 그 형질을 남기는데 최적화되어 설계된 일종의 머신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왜 인간을 보존하기 위해 태우고 다니는 초시공 요새 마크... 죄송, 아 왜 이런 게 떠오르지...)


유전자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이에게 모성애, 다른 이에게 이타심 등을 가지는 것도 그 유전자 또는 이 유전자 풀을 가진 집단의 정보를 계속 전달하고 이어가는데 유리한 특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탄생한 생명의 30억 년 유구한 역사에서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유전자 정보를 계속 이어가는데 최적화된 기체(?)인 셈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때때로 지성, 이성, 모성애 같은 인간성에 가치를 두는 대다수 우리의 감성에 큰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책 발간 시점부터 다양한 논란이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성이, 우리가 만들어낸 도덕이, 생명체의 종족 보존의 욕구에 의한 본능 같은 설명들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개념이었습니다. 우리는 유전자가 자신의 정보를 유구하게 이어가기 위해서 가장 유리한 행동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사실 이런 생각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인성은 더 고차원적인 것이고 생각도 없고 이성도 없는 유전자 따위에게 조종 당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제 생각은 심플합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든 아니면 더한층 심층의 것이 있든 우리는 그러한 특질을 지닌 결과로 살아남았고 그러한 모성애, 이타심, 협력 등이 어디에서 발원하든 또 그 동기가 지나치게 시시한 이유이거나 존속 그 자체의 목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한 것을 지니게 된 그 자체로 특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는 인간 몸속에 있는 생물의 근원 정보일지 모르지만 그 자체가 인간은 아닙니다. 언제나 이기적 유전자가 자신의 정보를 후세에 남기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형질은 인간에게 이기심이나 투쟁 의지만 발현시킨 게 아니라 지성과 이성을 부여하고 모성애와 부성애, 이타심, 협동심 같은 것들도 발현시켰습니다.


자연의 선택이든 유전자의 선택이든 우리는 수많은 우연의 교차로를 지나 이기적 유전자를 잘 보존하며 정말 우연히 모성애, 이타심, 투쟁심, 협력, 이성, 지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 과정에 사소한 무엇 하나만 어긋났었어도 우리는 결코 현재와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동기가 무엇이든 어떻게 시작되었든 여러분 모두는 정말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아들을 보며 나를 닮은 이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것 역시 태초부터 약간 다른 방향의 진화를 택한 선인장 같은 것은 누릴 수 없는, 사람 종만이 누릴수 있는 특별한 감정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모든 분들은 정말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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