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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남 아프리카의 정복왕 샤카 줄루(Shaka Zulu) 2편. 왕 이야기

이전 글에서 샤카 줄루가 주변 부족을 통일하고 줄루라는 단일 기치로 왕국이 성립되는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전 글 : 남 아프리카의 정복왕 샤카 줄루(Shaka Zulu) 1편. 왕 이야기


이 시기에 남아프리카에는 이미 유럽 백인들이 진출해 있었는데 네덜란드 출신 식민 세력인 보어인과 남쪽의 케이프 식민지와 영국인들이 그 대표적 세력이었습니다.


샤카는 줄루족을 통일하여 남부 아프리카 최대의 군사세력으로 성장한 이후에도 이러한 유럽 백인 세력들과 충돌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젊은 시절 유럽인 거주 구역까지 떠돌고 그 군대를 본 전임 딩기스와요의 안목과 조언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딩기스와요는 바다 건너에 큰 백인들의 나라가 있고 그들이 대포와 총의 위력, 주술 없이도 사람을 치료하는 백인들의 의료 기술 등을 들어서 백인들과 싸우지 말 것을 조언해 주었다고 합니다.

줄루족 전사

이미지 출처 : 망가천재의 스토리텔링


그래서인지 샤카는 가능한 백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고 영국인들이 더반항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줄루족과 교역에 특혜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직 내부에 아직 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샤카의 군단은 1820년 은드완드웨를 궤멸시킨 이후 주변의 부족들을 대상으로 과격한 정복활동에 나서서 주변 약 30,000평방km에 달하는 땅을 줄루 왕국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토는 넓어지고 백인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위협할 세력이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막 통합된 줄루 왕국 내부에는 서서히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샤카의 이복형제들은 적어도 실제로 성공하기 전에도 최소한 2번 이상 샤카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던 정황이 보입니다. 원래도 변덕이 심한 성격을 가졌던 그는 그의 적들에게는 상당히 가혹했고 무려 20년간 전사로써 병영생활을 해야 하는 그의 군대도 점차 지쳐가며 그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습니다.


1827년에 북부의 고산 부족을 정벌하기 위해 일단의 젊은 청년들이 중심이 된 부대를 보냈는데 그들이 평소에 천하게 여기던 산악 부족들에 오히려 패하고 돌아오자 분노한 그는 패퇴해 돌아온 전사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줄루족

이미지 출처 : 말위에서 천하를 논하다 블로그


샤카의 어머니 난디가 살아있는 동안은 현명한 그녀가 이러한 샤카의 잔혹함이 언젠가는 위협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견하고 샤카의 주변 인물들을 신경 쓰고 조언을 함으로써 이러한 불만들을 추스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 같기는 하지만 샤카의 측근인 음보파(Mbopa)를 하이에나와 같은 인물이라며 멀리할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가 나이 들어 죽게 되자 샤카의 줄루 왕국을 지탱하던 부분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샤카의 불안정한 행보는 어머니의 죽음에 4,000마리의 소를 도살하고 이 많은 소를 식량으로 풀지 않고 썩게 버려두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충분한 슬픔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인데 더구나 왕의 심기를 확대 해석한 전사들의 우발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조문객들 중 7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기까지 했습니다.


난디의 죽음 후 줄루 왕국 내 모든 지역의 밭에 김매기를 금지 시키고 소들의 젖을 짜는 일을 금지하였고 남녀 간에도 금욕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근위대를 왕국 곳곳에 파견해 사람들의 애도가 부족하다고 간주되면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광태들로 줄루 왕국내 식량 사정은 극도로 나빠졌고 이는 평소 샤카에 충성하던 충신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샤카의 이복형제들에게는 기다리던 기회였고 마침 샤카는 소수의 근위대만 주변에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치욕을 준 북쪽의 산악 지방 부족들을 재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북쪽으로 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1828년 기회를 엿보던 적대 세력들은 마침내 샤카를 암살할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샤카의 측근이던 음보파(Mbopa)는 그를 그의 궁성 밖으로 유인하였고 근위대와 일시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한적한 지역에 다다랐을 때 매복하고 있던 샤카의 이복형제 딩가네와 믈랑가나의 병력이 샤카를 급습해 죽여버리고 시신을 구덩이에 넣고 덮어버려 증거를 없애버렸습니다.


영웅의 죽음으로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최후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샤카 줄루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지만 뛰어난 왕은 아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뒤는 결국 그의 살해에 가담한 이복형제인 딩가네(Dingane)가 차지하여 줄루왕국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산들와나의 학살

이미지 출처 : 여강여호의 책이 있는 풍경 블로그


주변의 부족 사회를 국가 사회로 만들어낸 샤카 줄루의 역할 때문인지 다른 지역의 부족 사회와 달리 줄루 왕국은 주변의 백인 세력인 보어인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하면서도 샤카가 죽은 1828년 이후 약 50여 년 후까지 왕국은 유지됩니다. 줄루족과 교역을 하던 영국인들과 달리 기본적으로 농사꾼들로 농사지을 땅이 필요했던 보어인들의 경우는 땅을 두고 줄루족과 지속적인 충돌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때로는 보어인들이 학살 당하고 때로는 보어인들이 줄루족을 완벽히 방어해 내기도 했던 이 전쟁들은 결국은 보어인들이 공화국들을 세우고 우세를 점하고 있던 단계였습니다. 1867년에 타티 강에서 금맥이 발견되고 1870년에는 킴벌리 근처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결국 제국주의의 끝판왕 영국의 손길이 다가오게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보어 전쟁 전에 결국 줄루족과 영국의 식민지 군대와의 전쟁도 시작되었습니다.


1879년에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는 영국 육군 2만여명이 투입된 첫 침공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중 본대이자 보급대를 주둔지에 남겨두고 영국군 지휘관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유인에 낚인 사이 줄루 전사 군단 2만명이 이산들와나에 진을 치고 있던 1800여명의 영국군을 기습 공격합니다. 영국군은 13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쌓아놓았던 보급 물자를 모두 상실해 일시 후퇴하게 됩니다. 아무리 수적인 차이가 있지만 근대적 무기를 가진 제국주의 정식 군대가 구식 무기를 가진 아프리카 군대에 패했다는 부분에서 영국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학살당하는 영국군

이산들와나 전투

이미지 출처 : 기침 가래엔 용각산 블로그


이산들와나 전투와 이어진 로크스드리프트 전투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다룬 글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사에서 늘 보던 일시적인 선전이었을 뿐 결국 같은 해 재 절치부심하여 재 침공한 영국 군대에 의해서 줄루 왕국은 멸망당하고 맙니다. 수많은 제국주의 항쟁사에서도 이산들와나와 같은 충격적인 패배는 얼마 되지 않기에 줄루 왕국은 멸망했지만 그 이름을 오래 남긴 셈입니다. 또한 그들의 시작점인 샤카 줄루와 딩기스와요 같은 시초들도 연구가들의 관심을 끌고 그 흔적이 남은 케이스라 생각됩니다.


줄루 왕국은 멸망했지만 줄루족은 현재 남아프리카에서도 최다수 부족이고 지금도 상징적인 왕이 존재하며 그 부족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조직해서 남아프리카 정권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인카다라는 이름을 가진 해당 정당은 당원 수가 200만 명이나 되는 상당히 큰 정치 조직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아프리카의 검은 나폴레옹이라 불리지만 제가 보기엔 칭기즈칸에 더 가까워 보이는 유사성을 가진 샤카 줄루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동일한 시기에 백인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의 진출이 없었다면 제가 보기에는 부족 사회 통합 후 활발한 주변 정복에 나섰던 몽골족처럼 아프리카 전역을 정복해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백인 세력과 접촉이 없었다면 딩기스와요나 샤카와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요.


참조 :

영문 위키 Shaka

살육과 문명 - 빅터 데이비스 핸슨

전쟁사 - 김성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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