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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인조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벌어지던 즈음 동아시아에서는 누르하치의 후금이 일어나 동북에서 명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의 힘도 아직은 만만치 않아서 산해관 밖 영원성의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패배하고 그 직후에 명을 다하고 맙니다.

 

전투에서 홍이포에 입은 부상이 사망 원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의 뒤는 홍타이지가 이었습니다. 광해군의 집권시에는 조선이 뚜렷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전화를 피할수 있었으나 이제 인조의 정권은 명에 사대하며 홍타이지의 후금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모습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정묘호란에 대해서는 당시 청에 대한 명나라의 교역중단 조치와 그동안의 급격한 팽창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지만 명나라와 전력을 다해 겨루고 있던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후방에 있는 명나라의 우방을 자처하는 조선과 명나라의 장수로 조선 경내에서 게릴라 전을 펼치는 모문룡은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임이 분명 하였습니다.

 

모문룡은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머물면서 그 병력이 1만 정도로 불어났고 적극적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대신 밀무역으로 부를 쌓고 조선에는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식량이 제때에 도달하지 않으면 주변 부락을 약탈하는 패악을 부리는등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폐해가 엄청났습니다. 현대에는 그 태도나 행동이 모호한 명과 조선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인자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던 명나라 장수로 조선 경내에 주둔하면서 후금을 자극하는 존재임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을 묘사한 부조비

 

정묘호란

 

결국 1627년 3월 1일 정묘년에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습니다.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앞서 글에서도 언급한 강홍립 이었습니다. 후금군의 일부는 모문룡을 공격하고 주력부대는 3월 3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3월 11일에는 평양을 함락 시켰습니다.

 

3월 12일에는 이미 황해도 황주에 이르렀고 이에 놀란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인조와 서인들은 명나라가 구원군을 보내 주리라 생각했지만 명나라는 이미 제 코가 석자인 상태 였습니다.

 

임진 왜란때 처럼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후금군에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인조가 고립된 강화도에는 근왕병도 의병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후금 역시 조선을 점령하려는 것보다 굴복시켜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조선과 후금이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화친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 했습니다.

 

전쟁 기간은 약 2개월이고 화약을 조율하던 기간을 빼면 더 짧은 전쟁 기간을 보면 홍타이지의 의도가 조선의 정복보다는 한차례 타격전을 수행하고 화친을 통해 굴복시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고 물자의 약탈과 조선과 교역을 통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려는 복합적인 의도였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꽃들의 전쟁에서 묘사된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최근에는 인조와 서인정권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전쟁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실 인조는 정묘호란이후 국호를 바꾼 청나라에 대해 납작 업드린 상태로 사실상 많은 양보를 했고 청의 계속되는 심한 요구를 더 들어 줄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글쓴이의 생각에는 기존의 정설인 인조와 서인정권은 여전히 명에 대한 사대라는 명분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불러왔다는 생각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청의 군신관계 요구에 대해 존명사대의 명분에 갇혀있지 않고 실리적인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면 굴욕은 있었더라도 전쟁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격렬하게 반발하지는 않았을듯 합니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최후 통첩후 7개월 동안 조선의 입장표명을 기다렸습니다.(물론 군사적 준비와 압록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린 이유도 있습니다.) 그사이 인조와 서인 정권은 싸울것이냐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를 가지고  끝없이 대립 했었고 결국 인조는 어떤 군사적인 역량에 대한 판단이나 준비도 없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조선의 최종 의사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1636년 병자년 12월, 12만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진격해 왔습니다.

 

청나라와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정묘호란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적인 전쟁이었다면 병자호란은 명백하게 명나라로 편을 정한 조선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명과 싸우며 전투를 통해 단련되어 있던 청나라 군사들은 압록강을 건넌지 5일만인 12월14일 개성에 다다랐습니다. 너무나 빠른 이 진군은 조선왕이 강화도로 달아나는것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전격전 성격이 강합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일단 몸을 피했는데 이를 청나라군이 포위하였습니다.

 

남한산성에는 충분한 식량과 피복 등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굶어 죽거나 얼어죽는자들이 속출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던 근왕병들은 청군에게 차례 차례 각개 격파되었고 방비를 허술히 하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세자 부부가 포로가 되는 등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결국 남한산성내의 식량이 떨어지자 농성 59일째가 되던날 인조는 청나라의 신하가 되는 조건을 포함한 11개조를 수락하여 항복하였습니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홍타이지(청태종) 앞까지 걸어가 바닥에 머리를 부딛치며 절하는 이른바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의 예를 행하였습니다. 이것도 청이 많이 봐준것으로 원래는 중국의 항복 방식인 입에 옥구슬을 물고 망자의 차림으로 항복의 예를 치루는 것은 면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흔히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약하게 부딛친다는 홍타이지의 빈정섞인 비난에 인조는 실제로는 수십번 머리를 부딛쳐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이 지경을 당하고도 인조는 알량한 자존심에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한 사실을 기록할때는 영을 내려 항복이라는 단어 대신 하성(성을 나와 내려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했다고 합니다.

 

결국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이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고 조선백성 50~60 만명이(실제로는 7~10만 명이라는 설도 있음)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당시 청은 인구 확보를 위해 명을 침공해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점령지에 눌러 앉기 보다는 수많은 백성을 끌고가 인구 확보에 주력했던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0만에서 900만 사이로 추정됨으로 수치가 사실이라면 조선인 10명중 1명에 가까운 비율로 청나라에 끌려간 셈입니다.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몸 값을 치르고 조선에 돌아온 여인들은 "환향녀"로 불리웠고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거나 자식들과 헤어지는 일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는 화냥녀, 화냥년등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조선의 백성들과 여인들도 엄청난 박해를 당한 셈입니다.

 

정묘호란과 병자 호란은 먼 과거의 이야기로만 치부해 버릴수 없는것이 현대에도 G2라는 용어가 등장하며 과거의 절대적인 미국의 패권에서 경쟁자로써의 중국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보면 당시 청과 명의 명백한 국력의 차이(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기 전까지도 청의 객관적인 국력은 명과 비교 할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인구적인 면으로도 병자호란 당시에는 조선보다도 총 인구수가 적은 나라였습니다.) 보다 현재의 미국과 중국의 국력 격차가 훨씬 더 적습니다. 한반도는 어쩌면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한번 양대 강대국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당하는 일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귀환

 

병자호란 8년후 말기를 향해가던 명나라는 결국 이자성이 일으킨 농민 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당하고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산해관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청의 진입을 막고 있던 명의 신하 오삼계는 이자성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 청에 투항하여 청군을 화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겨우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풀려나 8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게 됩니다. 특히 소현세자의 경우는 청에서 카톨릭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구문명을 접하고 청의 선진적인 모습을 보게되면서 반청에서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친청적인 입장으로 전환했습니다.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정하여 군사적인 경험도 쌓았으며 서양과학과 카톨릭을 들여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이 세자의 모습은 용렬한 인조에게는 수치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면서 친청적인 모습에서 형언할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는 껄끄러운 존재가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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