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달았던 제목은 가장 무능했던 왕 인조 입니다, 간혹 최근에 본 인조에 대한 동정론은 "준비되지 못했던 왕" 입니다.
왕으로 가져야할 식견이나 제왕학을 배우지 못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여유없이 왕위에 올라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하지만 글쓴이의 생각에는 설령 즉위 초기는 그랬더라도 2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내내 준비되지 못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의심 많고 때로는 그의 할아버지 선조 못지 않은 열등감과 시기심을 드러낸것이 인조 입니다.
왕위를 원했지만 왕위에는 어울리지 못했던 무능한 리더라는 생각을 합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는 삼전도 비
즉위초의 혼란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군의 명분은 인목대비를 유폐한 불효,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죄,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하지 못했다는 부분 입니다. 그 외에도 36개의 죄목을 열거하며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고 민심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적어도 주요 명분중 하나인 후금과의 우호관계라는 명분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임금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전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명나라를 섬기는것은 사대주의에 찌든 사대부들에게나 중요한 명분이었고 백성들에게는 광해군은 임진왜란 등에서 전쟁의 고통을 나누었던 "우리 임금" 이었기 때문입니다. 반정의 주요 세력은 서인 게열로 이 차가운 민심에 당황하여 남인계(온건파 동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에 제수하는등 남인계에게도 요직을 나누어 주며 민심을 달래려 했습니다.
당시의 당파는 크게 동인과 서인으로 볼수 있는데 선조 중기부터 광해군 까지 동인이 세력을 잡았습니다. 동인은 또한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 북인은 또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가 되지만 크게 보면 이들은 모두 동인계 입니다. 반면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계열은 이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 멸망때까지 이 역시 여러분파로 나뉘어 지면서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 반정 세력들은 모두 한 배를 탔지만 각각 속내는 달랐습니다. 인조는 왕위를 원했고 서인은 동인에 밀려 실각된 권력을 찾고자 하였고 아들(영창대군)을 광해군에게 잃은 인목대비는 복수를 원했습니다. 먼저 반정을 지지한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이려 했지만 남인계인 이원익등의 반대로 제주도에 유배하는데 그칩니다.
풀리지 않은 그녀의 복수심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김상궁과 후궁들, 궁녀들에게 향해서 그들을 모조리 살해 합니다. 서인은 할수 없이 권력을 남인에게 일부 나누어 주긴 했으나 곧 반대 당파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대북계 인사와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했던 소북계 인사들까지 숙청과 살육이 자행 되었습니다. 이러한 명분과 관련없는 살육과 단순한 반대 당파에 대한 숙청은 반정의 명분이 허울뿐이라는것을 보여줍니다.
1623년 10월에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흥안군 이제를 추대하고자 하는 역모가 있는 등 인조 즉위초기의 왕권은 그리 단단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명나라는 인조 반정을 왕위 찬탈로 생각했고 후금은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며 군사적 도발을 해왔습니다. 더구나 내부적으로는 수 많은 역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괄의 난
인조반정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이괄은 2등 공신에 봉해졌는데 그로써는 크게 불만을 품을수 밖에 없는 논공행상의 결과 였습니다. 반정 막바지에 누설에 대해 겁을 먹고 집을 나오지 않았던 김류나 자신보다 역활이 작았던 이수일등이 자신보다 상위의 공신이 된것을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웠을듯 합니다.
반정 두달 후 이괄은 평안 병사 및 부원수가 되어 후금을 방비하기 위해 평안도 영변에 부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괄이 군사력을 통솔하게 되자 조정에 남은 반정 공신들은 불만을 가진자가 군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껄끄러워 졌습니다. 결국 이들은 인조에게 이괄이 북인계 인사들과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변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자신이 반정 막바지에 포기하려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괄이 아무래도 불편했던 김류에 의해 주도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괄의 역모에 대한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압송하여 조사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논공행상의 불만뿐 아니라 자신을 제거하려는 반정 세력들에게 분노한 이괄은 정말로 반역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괄 역시 흥안군을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전을 압송하러온 인사들을 죽이고 항 왜병 100명을 선봉으로 삼아 1만 2천명의 군사로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그는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개성을 지나 임진강에 이르렀는데 이에 놀란 인조는 수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천안을 거쳐 공주까지 피란을 갑니다.
1624년 이괄은 3월 29일 한양에 입성하여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처럼 승승 장구하던 이괄은 같은날 장만과 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를 포위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그 기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광주로 이동하던 그의 군세는 관군의 추격으로 와해 되었고 달아나던 이괄은 부하들에게 살해 당하게 됩니다. 왕으로 추대되었던 흥안군은 국문도 없이 살해당했고 이로서 이괄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이괄의 난은 이후 이괄의 부하였다가 살해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정묘호란의 불씨중 하나가 됩니다. 더구나 인조는 한양에서 피란전에 김류의 주장으로 이미 무고가 밝혀진 북인계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단지 당파가 달라서 죽임을 당한 피의 숙청이었습니다. 이처럼 인조는 서인들에게 휘둘리며 뒤에서도 이야기 하지만 하지 않아도 좋을 일들을 더 많이 한 임금 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와 서인 집권층에 대해 백성들이 철저히 외면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백성들에게 외면 당한 왕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떠나 피란하던날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때 백성들이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을 정도이고 이괄의 반란군 한양 입성이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정도로 인조와 서인정권에 대한 높은 반감을 보였습니다.
이는 후에 임진 왜란때의 자발적인 의병 봉기와 달리 정묘호란시 강화도에서 병자호란시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했을때 왜 왕을 구하려는 백성들의 의병이 모이지 않았는지 백성들에게 철저히 외면을 당했는지의 일부가 설명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선조의 조정을 백성들이 기억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조와 서인정권의 행보가 그들이 말한 대의와 명분 보다는 당파의 이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외교적인 무능과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
광해군 재위기간에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인정할만 한 부분은 전란을 치르면서 생긴 국제 정세와 외교에 대한 감각으로 이를 높이사야 할듯 합니다. 그가 취한 실리적인 외교 정책은 후금과의 충돌이나 전란을 미연에 막기도 했습니다. 반면 인조와 서인집권층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급박하게 흘러가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지했습니다.
반정 후 척화파를 중용하여 광해군의 밀명으로 청과 싸우는척 하다가 투항한 강홍립의 일가와 친척을 모두 몰살 시켰고 이 역시 정묘호란의 또다른 불씨가 되었습니다.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의 무지와 외교적 무능은 정묘호란시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는 화평안을 보낼때 그 문서에는 명의 연호를 써서 그들을 자극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에 분개한 청의 사신은 옷감 4만필과 소 4천마리를 추가로 요구 하였습니다. 말 한마디가 중요한 외교의 전장에서 광해군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 대한 지원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때 누르하치에게 "조선 국왕이 대금국 칸 전하에게 드립니다" 국서를 보내 전란을 막은 것과는 참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수 없습니다.
병자호란 시에는 남한산성에서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으로 인정하겠다"라는 요구에 다른 사람으로 꾸며서 보내어서 결국 본인들이 아님이 들통나 요구사항이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 라는 추가 요구를 받게 되는 등 보다 가볍게 넘어갈수 있는 일에도 꼭 손해를 자처하는 얕은 수를 썼습니다.
홍타이지(청태종)
앞서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 한택 형제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청태종)를 만나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광해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에 사대주의로 일관하는 인조와 서인정권의 태도에 후방의 위협을 느끼던 후금의 홍타이지는 결국 1627년(인조5년 정묘년) 1월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이 군세의 길안내 역활로 선봉에선 이가 바로 강홍립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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