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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4,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르니, 함흥차사의 유래

지난 글에서 정도전의 죽음까지를 다루었습니다. 드디어 이 이야기의 마지막 편으로 태조 이성계의 말년을 다루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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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Kings]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3, 한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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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정도전이 남긴 시 한수를 소개할까 합니다.

 

仙人橋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흐르르니
半千年(반천 년) 王業(왕업)이 물소리 뿐이로다.
아희야 故國興亡(고국 흥망)을 무러 무엇하리오.

 

-정도전-

 

선인교 = 개성 자하동에 있는 다리

자하동 = 개성 송악산(松嶽山) 기슭에 있는 경치 좋기로 이름난 마을

반 천년 왕업 = 고려 왕조 5백년

고국 = 옛나라 곧 고려

 

오백 년에 걸친 고려 왕조가 옛 수도인 송도를 흘러가는 물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이 한탄은, 역사의 무상함에 대한 감흥과 함께,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개국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라는 정도전의 시각을 보이는 시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아희야 故國興亡(고국 흥망)을 무러 무엇하리오."

 

이 마지막 구절은 이미 망해 버린 나라의 흥망에 대해 더 생각 한들 무엇하겠느냐는 표현입니다. 이는 고려의 옛 신하로서 조선 왕조를 섬기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고뇌의 표현이자 자기 합리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 시를 지은 삼봉 정도전은, 자신 역시 이방원에 의해 선인교 나린 물처럼 역사의 큰 줄기속에 무상하게 흘러 가버릴줄은 예상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실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조차도 역시 말년은 이 권력의 덧 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

특히하게 봉분에 심은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태조의 말년

 

새 왕조를 연 태조는 애초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개경에 머물렀으나 무엇때문인지 즉위 한달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합니다. 일설에는 그가 즉위 후 과거 고려 왕족들을 가혹하게 몰살시킨 일로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사연인즉 태조는 고려왕족들인 왕씨들을 섬에 보내 여생을 보존해준다는 구실로 배에 태운다음 바다 한가운데서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모두 익사하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악몽을 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1394년 한양에 천도한 후 정치적으로 명나라를 섬기고 다른 나라와 교린하는 사대교린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숭유배불 정책과 농본민생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 신분제도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렇듯 새 왕조의 왕으로써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창업의 기틀을 닦은 그는 점차 왕조의 존속을 생각하고 후계자를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무명 장수 시절 처로 맞은 한씨 소생의 6명의 왕자외에 개경에서 새로 맞은 강씨 소생의 2명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중 강씨 소생의 막내 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고자 그 어미인 강씨를 현비로 첫 번째 비로 세웠습니다. 정처였던 한씨는 강씨의 책봉 후 1년 후에야 차비가 됩니다. 더구나 얼마 후 강씨가 죽자 그녀를 왕후로 추증하여 사실상 한씨는 후궁으로 전락한 셈이었습니다. 이는 이전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아직 어린 방석을 교육하여 재상이 중심이 된 왕도정치를 꿈꾸던 정도전,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았으나  한씨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 특히 조선 개국에 태조를 도와 공이 많았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분노를 샀습니다.

 

태조는 숫자가 많고 장성한 아들들을 두고 특별히 사랑한 막내를 세자로 삼았는데, 그 반발을 예상은 했더라도 설마 아들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게 될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왕위란 것은 골육도 개의치 않을 만큼 무서운것으로 태조가 정말 막내 아들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면 범같은 자신의 아들들은 언젠가는 제거를 했어야 하는것이 역사의 사례인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럴 마음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그 아들들은 이미 하나 하나 의심의 눈초리로 정세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준비하며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하고 많은 군사를 모으자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이를 자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핑핑 돌아가는 정치판에서 역사상의 인물들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한 가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정도전은 요동정벌 계획을 진행하면서 그것을 계기로 왕자들 역시 제거할 계획도 가졌으리라 짐작합니다. 그 역시 장성한 왕자들이 당당하게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어린 세자인 방석이 무사히 왕위에 오르기 어렵다는것을 깨닫고 있었을게 분명합니다. 1398년 10월 정도전, 남은, 심효생은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에게 궁중으로 들라는 명을 전합니다.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살육할 계획으로 해석하여 이방의, 이방간등의 형제들을 포섭하여 휘하 부하들과 함께 먼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의 군사들은 우선 남은의 집으로 쳐들어가 정도전과 남은을 죽이고 박위, 유만수, 장지화, 이근, 심효생들을 살해 하였습니다. 이로써 강씨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지지하던 세력들이 모두 몰락했고 후에 결국 세자인 방석을 유배길에 살해하고 방석의 형인 이방번 역시 죽여버려서 강씨 소생의 배다른 두 형제들은 모두 살해 당한 셈이었습니다. 이를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1차 왕자의 난은 배다른 형제들이 모두 죽인것으로 그치지 않고 태조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핵심 구신들 역시 모두 죽여서 나라의 권력이 사실상 이들 한씨 소생 형제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난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결국 한달뒤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방과가 바로 조선의 2대 왕인 정종 입니다. 태조의 양위의 원인은 자식들간의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난것에 대한 환멸과 심신의 충격을 받아서 일수도 있지만 사실상 태조의 권력기반을 지탱하던 인물들이 모두 죽어, 힘의 균형이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에게 확실하게 기울어버렸기 때문 입니다.

 

실질적으로 이 난의 주역은 이방원 이었는데 그는 장자승계라는 왕위계승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것으로 정당화하며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는 그 자리를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이는 맏이인 진안대군이 일찍 사망하여 장자 승계에 따라 이방과가 세자가 됨이 순서였고 방과의 인품이 야심이 없고 무능하여 언제라도 훗날 자신이 이자리를 차지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형제를 죽이고 아비를 쳤다는 아름답지 못한 사태의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방과에게 떠 넘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였으나 이는 누가봐도 다음 순서인 이방원을 위한 허수아비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태조의 넷째였던 이방간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으로 왕위에 대한 남다른 야심이 있었으나 이방원에 비해 실력이 뒤지고 세력이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적이 컸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가 접근하자 이 두 사람은 세력을 합쳐 군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우습게도 왕위를 차지하려 군사를 일으킨 방간이 공격대상으로 삼은것이 정종이 있는 궁궐이 아닌 이방원 이었다는 점은 이미 당시의 실세가 누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방간과 방원의 군사는 개경 선죽교에서 대치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결국은 방간의 군사가 패하여 방간은 사로잡혀 유배되고 박포는 유배지에서 처형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사태입니다. 1차와 달리 왕위를 놓고 배다른 형제가 아닌 친형제지간이 맞붙은 사건으로 승리한 이방원의 세력과 기반은 이제 어느 누구도 넘볼수 없을정도로 단단해 집니다. 결국 큰 야심이 없던 정종은 이 무서운 동생에 불안해 하다가 왕위에 오른지 1년 남짓한 1400년에 이방원에게 양위를 하게됩니다. 이에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입니다.

 

태종은 본인이 왕에 오른 뒤에는 오히려 서슴없이 사병을 혁파하고 관제를 개정하고 토지제도, 조세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신문고등을 설치하여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는 수단으로 삼았고 국가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한 공신들과 장인과 처남들 마저 망설임 없이 숙청하여 조선초의 불안했던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공신은 물론 외척의 정치적 개입자체를 차단한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불안했던 조선의 기틀을 세운 사실상의 창업군주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왕권강화와 개혁을 통해 단단해진 기반으로 세종대의 융성을 가져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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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태종에게도 즉위 초반부터 큰 근심이 있었는데 바로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존재였습니다. 방해물은 거침없이 제거하는 실행력을 가진 태종이었지만 그도 결코 하지 않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배다른 형제가 아닌 친 동기간은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과 바로 아비인 태조 이성계에 대한 최소한의 효를 저버릴수 없었던 부분입니다. 태종은 결코 어리석은 왕은 아니었기에 그러한 행위까지 나아간다면 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서 결코 무탈하게 왕위를 유지할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함흥차사

 

사랑하던 자식과 수족과도 같던 구신들을 잃은 태조는 왕위를 양위하고 함경도 함흥으로 은거하여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든것을 잃은것과 다름없는 태조는 아들인 태종에 대한 심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태종은 자주 차사를 보내어 태종을 환궁시키고 부자간의 불화를 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명궁으로 유명한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즉시 활로 쏘아 죽였으므로 그로 인해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야사로 전해 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후에 일어난 조사의의 난에 박순, 송류등을 보내 반군을 회유하고 반란에 동조한 동북면 지방민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들이 죽음을 당하고 설득에 실패한 사건과 연관지어 생겨난 이야기로 보입니다. 조사의의 난은 태조가 총애하였던 동북면 안변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이 태종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일으킨 난인데 함경도에 머물고 있던 태조가 그 배후에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한때 관군을 격파하고 세를 떨치던 이 반란도 결국 조사의와 강현이, 태종이 보낸 진압군에 패배하면서 난은 실패하였는데 이 난이 진압된 후에야 태조는 결국은 돌아와서 환궁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태조가 다시 한번 아들을 쳐서라도 정권을 되찾으려한 시도라는 설도 있고 단순히 조사의가 태조의 위세를 등에 업으려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동북면의 많은 세력들이 호응하였음을 볼때 태조의 개입설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습니다. 설령 태조의 개입이 의심스러웠더라도 아들인 태종으로서는 이를 덮어둘수 밖에 없었을듯 합니다.

 

또다른 설로는 태종은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태종이 무학대사를 보내어 회유하여 결국 양주까지 내려오게 합니다. 이때 태종은 태조를 만나고자 양주까지 행차하였는데 태조는 이기회에 숨겨둔 철퇴로 태종을 죽이려 계획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태조가 아들인 태종에게 얼마나 분노 했었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실제로 아들로 부터 권력을 찾기 위해 어떤 시도나 계획을 했었을지도 모르지만 한번 태종에게 기울어진 대세는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만년에 환궁한 그는 모든일에 환멸을 느끼고 체념한듯이 불교에 전념하며 7년여를 더 살고 1408년에 병으로 사망합니다. 태조는 총애했던 왕후 강씨 곁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태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씨의 묘를 도성 밖으로 이장되고 후궁으로 격하해버리고 맙니다. 죽은 후의 소망조차 이룰수 없었던 말년이었습니다.

 

한 왕조를 개창하고 일개 시골 무장에서 왕위까지 오르는 격변의 삶을 살아온 태조는 자식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고 함께 조선을 개국한 동지와 같은 존재인 공신들을 죽이는 일들을 겪게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들로 인해서 환난을 같이한 동지인 공신들을 잃고 사랑하는 자식을 둘이나 먼저 보내는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왕 이야기를 쓰면서 여러번 기술하였지만 왕과 같은 권력의 정점인 자리도 사실은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보다 더 불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왕위에 오른 태종 역시 총애한 셋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첫째인 양녕은 세자에서 폐하여 유배를 보내야 했고 둘째 아들은 불가의 승려로 출가시키고 나서야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줄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외척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기위해 장인과 처남들을 사사해야 했고 배우자인 원경왕후는 교태전에 유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족이 해체되는 일을 치루고 나서야 뜻하는대로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과연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할거리를 던져 줍니다.

 

20번째 왕이야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4편을 끝으로 이번이야기를 마무리 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