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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3, 한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이전 글에서 정몽주의 최후까지 다루었습니다.

 

이번 왕 이야기에서 다루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 라이벌인 최영 과 정몽주 중, 최영과 정몽주가 이미 퇴장하였으니 이번 편에서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만들었다는 정도의 평가를 듣는 정도전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 부터 거꾸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정도전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대에는 상반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두 왕조를 섬기며 지조 없이 굴던 야심가가 죽음까지 비굴했다는 시각과 이방원에 의해 살해 당하면서도 큰 인물 답게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 했으리라는 설 입니다.

 

이전 글

[Story of Kings]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역사의 라이벌 최영과 정몽주 1

[Story of Kings]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2,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정도전 초상

 

정도전의 최후

 

이러한 두 가지의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반된 두가지 기록 때문 입니다. 태종(이방원)이 왕위에 오른뒤 간행된 태조실록의 기록에서는 1398년 10월 6일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인 "1차 왕자의 난"에서 피살당한 정도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당일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송현정에서 등불을 밝히고 가을밤 정취를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이숙번등과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포위한다음 병력을 안으로 투입하여 무차별 살육을 시작했고, 정도전과 몇몇은 담을 넘어 옆집으로 달아났으나 이방원의 군사들이 곧 침실에 숨어있는 정도전을 발견하고 호통을 치자 정도전이 조그마한 칼을 들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합니다. 칼을 버리라고 이방원의 수하들이 다그치자 정도전은 칼을 문밖으로 던져버리고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행태를 보인 후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태조실록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정도전을 비하하고 아예 그 흔적을 지워버리려 애썼던 승자 태종(이방원)을 생각할때 이 기록에 대한 의구심이 없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것도 그 최후에 대해 말한 사람도 결국 모두 이방원이기 때문 입니다.

 

반면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죽임을 당하기전 정도전의 아들이 "오늘은 정안대군(이방원)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고 말하자 "내가 고려를 버렸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 했다고 하는 기록 역시 남아 있습니다. 아런 말을 한 인물이 정작 정안대군 앞에서 목숨을 애걸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또 정조때 왕명 으로 간행된 삼봉집에서는 그가 최후에 남겼다는 절명시가 아래와 같이 남아 있습니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량가공)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온통 공을 들여서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업적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정도전, 자조(自嘲) -

 

 

 

위의 시구 역시 곰곰히 뜯어 보면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하며 죽어갔다는 실록의 기록이 잘 와닿지 않게 만듭니다. 정도전은 한때 태조 앞에서 스스로를 장량에 빗대며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한 것이라는 말한바 있습니다., 즉 조선을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연것은 이성계가 아니라 그를 이용한 자신이었다고 빗대어 말 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성계는 껄껄 웃어 넘겼다지만 왕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이방원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방석을 지지하는 괘씸한 행위 외에도 왕권을 위협할만한 위험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정도전을 죽여 없애야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패장이 당당하게 회한을 읆조린듯한 이러한 시구 때문에 후대에서 자조를 읆조리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는 이미지와 목숨을 애걸하며 죽어간 간신의 모습이라는 상반된 두가지의 이미지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어떤 최후를 취하게 될지 개인적으로도 무척 궁금해 집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시고 과연 그에게 어떤 최후가 어울릴지는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도전

 

정도전은 형부상서 정운경과 영천 우씨의 맏아들로 1337년 또는 1342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아버지 정운경이 개경에서 중앙 관리로 출세하여 개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과 친교가 깊어 어린 시절부터 이색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10여살이 차이나는 두사람은 나중에 성균관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게 되어 성리학에 대해 심도있게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색의 문하에서 그는 성리학적 국가경영 이념과 사상에 대해 심도깊게 이해하게되었고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려말의 혼란을 보며 성선설에는 회의를 가지게 되었지만 역성혁명론은 후에 그의 삶을 결정하게되는 이념이 되었습니다. 이색의 문하에서는 정몽주, 권근, 의중, 윤소종, 김구용, 이숭인, 하륜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많이 배울 되었습니다. 정도전 역시 성균관에서 경사를 강론하였는데 문장을 잘 짓고 성리학에 깊은 이해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도 혁명을 통해 개혁하려 했지만 당시 고려시대의 지배 종교인 불교 역시 조세 수입과 징발을 방해하는 해악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후에 그의 저서인 "불씨잡변"등에 드러납니다. 앞서 정몽주에 대해 이야기 할때에도 다루었지만 이 시기에 그는 정몽주와 마음이 맞는 친구로써 현재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권문세족과 외척을 혁명을 통해 제거하고 농민을 자유롭게 하여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이끌자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고 정몽주는 이에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그는 성균시와 동진사에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아갔으며 성균관에서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하며 성균관 박사등의 요직을 거치며 출세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승려인 신돈을 기용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 하였습니다. 때마침 부모가 연이어 작고하여 여묘살이와 학문을 연구하였고 3년상을 마친뒤 1369년 12월에는 관직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불교를 싫어했지만 승려인 신돈은 새로운 인재 등용을 위해 신진 사대부들을 많이 중용하였고 이 때문에 정도전, 정몽주 역시 그로 인해서 요직에 앉게 되었기 때문에 후에 신돈이 죽음을 맞이했을때 그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공민왕이 홍륜등에 살해되었을때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자고 주장하는 친명파의 입장을 취했고 농토를 권문세족으로 부터 뻬앗아 농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인임과 권문세족의 원한을 샀고 사원경제의 문란을 지적하며 불교 배척을 주장하여 정적을 많이 만들게 됩니다. 결국 우왕 1년 (1375년)에는 방문한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일지 말지에 대해서 신진사류와 권신들간의 대립이 일어났는데 이때 정도전은 극렬히 반대하며 권신들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유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들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에 많은 적을 만든탓에, 그가 유배를 당하자 사방에서 그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실망한 그의 아내와 주고 받은 편지를 요약해보면 정도전의 인간됨에 대해서 어느정도 들여다 볼수 있을듯 합니다.

 

"당신은 평소 독서에만 열중해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집안에는 한섬의 쌀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끼니 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그때마다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니 언젠가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영광이 있으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국법에 저촉되어 영광은 커녕 이름을 더럽히고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이런 것입니까?" -부인 최씨의 편지-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 친구들은 형제보다 정이 깊었는데 내가 이렇게 되자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이들은 원래 세로써 맺어졌지 은으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에 나는 원망하지도 않소, 하지만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때까지 고칠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것으로 믿소,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당신이 집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난 오직 나의 뜻에 충실할 뿐이오. 성패와 영욕은 하늘이 정하는것이지 사람에게 있는것이 아니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정도전의 답장-

 

정도전에 대한 기록은 그 업적에 비해서 그의 인간됨을 비난하는 내용도 많고 또는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기록이 있어 솔직히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부부가 주고 받은 편지를 읽고, 특히 정도전이 부인에게 쓴 답장에 솔직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이치에 대해 이렇듯 명쾌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그저 권력에 눈 멀은 소인은 아니었을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는 부인에게도 대의를 모른다 나무라지 않았으며 자신을 탓하는 것도 마음 깊이 이해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특히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때까지 고칠수 없는것...자신을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것으로 믿는다는 말들은 요즘의 이혼이 흔한 세태에 더 와닿는 문구입니다.

 

1377년에는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는 여전히 위험한 혁명분자(?)로 권신들의 경계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삼봉재라는 초려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지냈지만 권신들이 헐어버렸고 후에 제자들과 열은 학숙 역시 폐쇄당하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친우들의 신세를 지기도 하며 걸식을 하거나 밭갈이를 하는 등의 유랑생활동안 고려말의 권문세족의 치하에서 쓰러져가는 힘겨운 백성들의 현실을 실제로 보고 겪으며 마음속에 이러한 세상을 반드시 개혁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됩니다.

 

1383년 정도전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마음속에는 큰 뜻을 품고 함길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갑니다. 오랜 대화를 통해 이성계의 인물됨을 파악하고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는 그가 꿈꾸는 혁명을 위해서는 이를 실행에 옮길수 있는 힘, 즉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판단때문 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국가경영에 대한 견식과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고 인정하였으며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휘력과 병사들을 정예하게 이끄는 통솔력에 감탄합니다.

 

정도전은 밤늦게까지 이성계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음날 군영앞의 소나무에 시 한수를 새깁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 만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인간 세상이란 잠깐 사이 묵은 자취인것을.

 

이 시에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다고 평하여 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자신과 함께 자취(혁명?)를 남기자는 속마음을 남겼다고 분석 하는데 필자는 이 시의 은유가 깊어, 이러한 설명을 보기 전까지는 무슨 뜻의 시일까 하고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옛사람들의 풍류는 어쩐지 직설적인 지금의 세상보다 더 멋진듯 합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 위화도 회군과 조선왕조 창건이라는 역성혁명으로의 길을 걸어나가게 됩니다.

 

 

조선을 설계하고 건설한 기획자

 

정도전은 위화도 회군이후 우왕을 폐하여 유배하고 그 아들인 창왕을 세웠다가 폐한뒤 공양왕을 세우는 시기에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를 위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는 역성혁명의 뜻을 계속 밀고 나가자 결국 친우였던 정몽주는 그와는 뜻을 달리하게 됩니다. 사실 정몽주 역시 죽기 전에 정도전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가풍이 부정하고 파계가 불분명하다" 라며 그의 출생을 의심하는 말로 탄핵하여 정도전을 유배토록 한뒤 고문을 가장하여 죽이도록 자객을 사주하여 보냈지만 미리 눈치챈 정도전은 간신히 몸을 피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어릴때 부터 쌓아온 우정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권력앞에 우정도 부질없다고 바라볼 수도 있고 앞서의 편지나 이야기들에서 드러나듯 큰일인 자신이 믿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개인의 작은일인 우정을 포기한것으로 바라볼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몽주와 정도전의 인물됨의 크기를 통해 볼때 후자쪽의 관점에 더 마음이 기웁니다.

 

결국 정도전은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정몽주는 계속 그를 탄핵하며 제거할 기회를 엿봅니다. 하지만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무사들에게 먼저 죽임을 당한것은 정몽주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태조실록에 이방원에 의해 비굴한 모습으로 기록된 "공이 내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한번 더 살려 주시오" 라고 했다는 내용이 설명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결국 정도전이 먼저 목숨을 잃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역성혁명의 마지막 저항세력이 와해되자 복귀한 정도전은 1392년 7월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마침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조선 왕조를 개국한 공신이 됩니다. 조선 왕조 개국후의 그의 활약은 눈부십니다.

 

새왕조의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하며 궁궐과 종묘의 위치, 각 궁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과 성안 46방의 이름을 제정하였고, 태조의 교지를 지어서 새 왕조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였으며 정부의 형태와 조세 제도를 정비했고 숭유억불이라는 역사시간에 외우던 단어가 뜻하듯 불교를 배척하고 조선의 기본 통치이념을 유교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나라의 법제도를 마련했고 "경세문감"을 지어 관료의 직책을 확립하였습니다. 그외에도 문물을 정비하고 수많은 저술을 쏟아내는등 도저히 한사람이 진행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어려운 일들을 동시에 진행하며 해낸 것을 보면 자신을 해동 장량이라 칭한것이 오만함만이 아닌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 명나라의 공물요구가 과도해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 확보, 사병 혁파를 통한 병권 집중노력, 병제 개혁, 역참 확정등 국방력 강화와 군사적 제도 정비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신흥국인 조선이 일신하여 국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던 명의 주원장은 정도전이 쓴 글귀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핑계로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할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조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정도전을 내어주지 않았으며 지속적인 명나라의 소환요구가 있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정도전을 공직에서 물러나 있게 하였습니다.

 

 

미완의 혁명가?

 

정도전 역시 미완의 혁명가라고 한다면 반론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미완의 혁명가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역시 자신의 큰 뜻의 마무리를 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개국 초기부터 요동정벌을 준비합니다. 이후의 그의 태도를 보면 이러한 정벌 게획이 허장성세만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물들이 추진하는 일의 뒤에는 한가지 이유만이 있지 않습니다. 우선은 요동정벌을 진행하며 유신들과 특히 정안대군 이방원등이 가지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여 국가의 군사력으로 귀속 시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정말로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가지고 준비를 했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1398년에 홍무제 주원장이 죽은뒤 북경을 기반으로 한 주원장의 4남인 연왕(영락제)과 주원장의 손자인 2대 건문제가 싸움을 벌이는 내전이 발생하고 결국 연왕이 건문제의 제위를 찬탈해 영락제로 즉위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태조 이성계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것을 건의한것이 1398년초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는 주원장이 죽은후 제위 다툼으로 명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게 될 정세등을 파악하고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이 이 내전의 와중에 요동을 침공한다면 북경에 근거를 둔 연왕이 근거지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건문제와의 내전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웠을것이고 어쩌면 제위를 얻기위해 요동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만약은 없는것이지요. 요동 정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도전 역시 1398년 10월에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하지만 설령 요동정벌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도 조선의 국방력은 고려말의 혼란기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화되어 있었으며 이는 태종과 세종대의 조선의 국토를 확립하는 군사활동의 기반이 됩니다.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한 이유는 이 요동정벌을 구실로 사병을 혁파하여 중앙군에 귀속시키려 시도한 것 외에도 바로 세자책봉에 태조의 후비 소생인 막내 방석을 지지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정도전이 방석을 지지한것은 단순하게 태조의 의중을 파악하고 영합하려 했던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꿈꾸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직 어린 세자 방석의 스승이 되어 세자를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을 잡고 신권과 왕권이 조화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야심차고 목표가 결정되면 서슴없이 결단을 내리는 정안대군 이방원과 같은 장성한 왕자들로는 그러한 체제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그가 왕도정치의 실현의 기대를 걸었던 방석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왜? 간신, 변절자, 비굴한자로 폄하 되었나?

 

정도전의 사병혁파와 과전법에 격렬하게 반발했던 조준은 정도전이 죽자 "정몽주는 정도전의 음해로 죽었다"며 정몽주의 복권을 상소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결국 태종대에는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복권되었고 영의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태종(이방원)의 정몽주를 복권한 이류는 정도전을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이었다는 시각이 최근의 주장들인데, 이 역시 두가지 목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몽주를 죽인것인 정도전의 음해 때문이었다로 몰아가고 더 나아가 마치 정몽주가 정도전에 의해 살해된것으로 여겨지게끔 하여 자신이 가진 "나라의 대신을 살해하도록 사주하였다" 라는 도덕적 결함을 희석시키기 위함입니다. 두번째로 라이벌인 정몽주를 복권하고 추존함으로써 정도전을 죽어도 싼 변절자, 반역자의 이미지로 낙인찍음으로써 역시 정도전을 죽인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입니다.

 

태종의 시도는 결국은 절반만 성공한것 같습니다. 필자가 역사를 재미있게 접하던 학생 시절에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꽤 느꼈다면 정도전을 죽인것에 대해서는 "죽어도 싼자를 죽였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세종대에는 세종의 세자시절 스승인 권우가 정몽주의 제자였고, 세조때에 관직에 진출한 사림역시 정몽주 문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몽주는 지속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 되었지만 반대로 그 라이벌이었던 정도전은 지속적으로 폄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창건시 워낙 여러분야에 걸쳐있는 그의 업적과 흔적들은 아무리 태종과 후대의 폄하하려던 세력들이라도 모두 지울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조선은 그가 설계한 것들이 근간이 되어버린 나라였기에 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정조가 정도전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고 정식으로 흩어진 글들을 보강하여 편찬하도록 하면서 복권 여론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정조 역시 나라를 쇄신하고 당파를 타파하려던 임금이기 때문에 정도전의 글들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종대에야 정도전은 개국공신으로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복권은 아니라 죄는 있으되 조선왕조 건국에 워낙 많은 공로가 있으므로 이를 감안해 복권한 절반의 복권이었습니다. 더구나 1970년대에 군사정권하에서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다시 내세움으로써 정도전을 기회주의자, 변절자로 폄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1990년대 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가 제작될 만큼 재평가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무려 죽은지 6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재평가되고 복권된 인물이랄까요?

 

다른 의견으로는 정도전이 그토록 조선왕조에 끼친 영향력이 큼에도 복권되기가 어려웠던 이유로 그 성정이 모질어 많은 적을 만든것 때문이라는 이유를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역성혁명과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다소 과격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그의 행동은 친우인 정몽주를 살리려 하지 않은것과 마찬가지로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스승인 이색 역시 도우려 하지 않은 일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보았을때 인간으로 매력적이지 않은것 처럼 보이는 이 기록들은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습니다.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 역시 그의 출생 성분을 의심하고 모욕하는 다소 치졸한 형태로 탄핵하고 자객을 보내는등의 시도를 먼저 했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잘 언급되지 않습니다. 또 무엇보다 성리학적 이상향의 구현이 신념이 최우선 이었던 사람이 과연 반대하는 입장에선 스승과 문인들을 도울수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것외에 오히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역사의 인물들도 결국은 사람에 의해서 평가가 되고 후세에 의해서 위인이 될것인가 악인이 될 것인가로 달라지는 사실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오늘 역시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너무 길어져 버린듯 합니다. 원래 이번글로 마무리를 짓고 싶었으나 부득이하게 태조의 말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

[Story of Kings]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4,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르니, 함흥차사의 유래

 

 

내용 및 이미지 참조

 

wikipedia.org

https://blog.naver.com/les130?Redirect=Log&logNo=80007048500

 

책 - 사화로 보는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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