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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인조(終), 소현세자의 죽음과 꽃들의 전쟁

우리 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은 강대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 나라가 침공을 받았을때 참전하며 도와주었고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의 정치체계를 도입하고 문화적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이 나라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맹방으로 여겨왔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옆에 있던 가난하고 보잘것 없어보여 종종 무시하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던 나라가 이제는 점차 강성해져서 세계에서 그 나라와 더불어 2대 강국으로 거론될 정도로 힘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현재의 미국과 중국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광해군과 인조의 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조선의 이야기 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항상 똑같지는 않아도 언제나 유사한 선택의 기로에 높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중간에 끼인 나라의 입장에서는 역사의 사례를 보면 국제 정세를 잘 보고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공적인 줄타기를 잘해야 살아 남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국방력도 무시 못할 정도로 강해져야지만 우리 스스로를 지킬수 있겠지요. 군량미 횡령이 빈번하고 제대로된 전쟁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조선군이나 4GB USB를 90만원에 구입하는 군 조직으로는 앞으로에 대비하지 못할게 자명한지라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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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Kings] - 인조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오늘은 전편에 이어 아들을 죽인 왕들의 이야기 중 첫번째 이야기인 인조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 입니다. 이후에 영조와 러시아의 이반뇌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려 합니다. 사실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물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후 소현세자의 일가가 당한 일들을 돌아보면 설령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교사는 하지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모른체 했을 가능성이 큰것은 사실 입니다.

 

소현세자의 죽음

 

소현세자의 죽음과 꽃들의 전쟁

최근의 tvn 드라마 삼총사에서 소현세자, 이진욱 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후 심양에 머물면서, 후에 도르곤이 오삼계의 구원 요청을 받아 청군을 중원으로 진입 시키면서 북경에서 청나라의 문물과 국제 정세를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선교사인 아담 샬을 만나면서 천주교와 서구의 과학기술에도 눈을 떴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볼모 생활 중에도 청나라의 핵심 인사들과 교분을 가지고 청나라 조정에도 인맥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청나라가 조선을 심하게 핍박하지 못하게 하도록 노력하였고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세자빈 강씨와 함께 사들여 귀국시키려는 노력도 하였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국제 정세에 밝고 조선에 천주교와 서구 과학기술을 들여오려는 생각을 가졌던 이 소현세자가 인조의 다음 왕이 되었더라면 후대 조선의 역사는 조금 달라졌을까요?

 

이후 세자빈 강씨와 함께 8년만에 조선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실리적인 사고와 친청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청나라에 두번이나 굴복하고 백성을 전화에 휘말리게 하고서야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에 꼼짝 못하고 납작 업드리긴 했지만 조정 내에서는 여전히 청을 오랑캐라 여기며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고 슬퍼 했을 만큼 현실직시를 못하고 사대주의에 찌든 반청노선을 표명하고 있는 인조에게는 심히 거슬리는 행태였습니다.

 

이러한 부자간의 사고의 차이는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언쟁까지 불러 왔고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불화가 일었습니다. 더구나 청나라의 환대를 받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볼 때마다 인조 자신이 죽는날 까지 잊지 못한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를 한 굴욕적인 과거가 떠올라 자신도 모를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껄끄러운 부자지간이 되었습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두달여가 지난 1645년 4월 23일 인조의 어의인 이형식의 시침을 받은 건강하던 34세의 소현세자는 3일만인 4월 26일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들이, 더구나 자신의 뒤를 이를 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는데도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세자빈 강씨와 대신들의 청을 뿌리치고 장례일을 앞당겨 서둘러 입관을 진행했고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 절차를 밟게 하였습니다.

 

참관 인원도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합니다. 마치 어느 나라의 사고 조사를 위한 법에 수사권 부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며 애써 진상을 밝히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의 데자뷰 같기도 합니다.

 

1645년 공신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인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6월 27일 -

 

이러한 시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로 인하여 인조가 아들을 또는 뒤에 이야기할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설이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용조씨의 독살설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인조의 묵인이 없다면 그러한 행위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인조의 성품과 역사를 통해 왕이라는 권력의 자리의 잔혹함을 생각해 본다면 이 "독살설"로 마음이 기웁니다.

 

그 후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소현세자의 장사일이 불길하다며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자 인조는 불같이 화를내며 강빈 집안의 4형제를 모두 유배에 처합니다. 또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는 세자빈 강씨가 자신을 저주하였다는 무고를 한 일이 있었고 1646년 강씨의 궁녀들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고 옥사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세자빈 강씨도 인조를 독살하려 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으며 강씨와 소현세자 사이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장남인 석철은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애석하게 여겨 자신이 데려다 기르겠다고 했으나 결국 1648년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죽고 맙니다.

 

인조 실록 49권 26년에는 다응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瘴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한탄에서 인조가 행한 행위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 알수 있습니다. 용골대가 데려 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앞으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거라는 예측에서도 인조의 성품을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둘째 역시 두달 뒤 병으로 형의 뒤를 따랐고 셋째 석견만이 살아남아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귀양에서 풀려나 간신히 살아 남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풍토병으로 죽었다는 소현세자 두 아들의 죽음에도 약간의 의심이 갑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흔히 소현세자의 일가를 법살 했다고 표현 합니다. 즉 인조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살해를 저질렀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 입니다.

 

꽃들의 전쟁

 

인조의 정비는 인렬왕후 였는데 그녀는 인조가 능양군 시절 시동생인 능창군이 역모의 수괴로 몰렸을 당시 혼수를 팔아 뇌물을 바치며 구명에 힘썼고 광해군이 정원군의 집을 강제로 빼았아 경덕궁을 짓는등의 박해를 받으며 명문가의 여식이었던 그녀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인조반정 후 왕비가 된 후에도 동냥아치 중전마마로 불릴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궁녀들을 증오로 살해했던 인목대비와는 달리 광해군의 비인 폐비 유씨의 궁녀를 받아들여 궁내의 인심을 얻었으며 매사에 조심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왕후였습니다.

 

인조도 인렬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은 후궁에 마음을 두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존중했고 반정과 집권초의 역모, 정묘호란 등의 온갖 어려움을 함께 헤쳐온 그녀가 1635년 42세의 늦은 나이로 아이를 사산하고(당시의 나이 기준으로 볼때 부부간의 금실이 정말 좋았나 봅니다.) 산후증으로 사망하자 인조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 이듬해의 병자호란에서 그 동안 오랑캐라 무시하던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려야 했던 치욕은 인조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붕괴시킨것으로 보입니다.

 

인렬왕후 사후 인조는 계비인 장열왕후 조씨와 2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그 중 후궁인 소용 조씨는 인조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연달아 인조의 자식을 낳으며 총애를 얻게 됩니다. 위키백과에서 그녀에 대한 첫 마디는 "조선의 팜므파탈" 이군요. 개인적으로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 에서 소용 조씨를 연기한 김현주씨의 연기가 역대 소용 조씨를 연기한 배우들 중 최고 수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꽃들의 전쟁

jtbc의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의 소용 조씨, 김현주 분

 

그녀는 총애를 믿고 자신의 눈 밖에 나는 인물이 있는 경우 인조 앞에서 자주 모함하며 궁내에 그녀를 두려워한 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인조 앞에서 밤낮으로 모함했다고 하는데 특히 세자빈 강씨에 대해서 유독 적개심을 불태웠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로 그녀가 여느 역사속 후궁들 처럼 야심을 품었다면 1차적으로 두 사람이 없어져야 자신의 자식이 왕위에 오를수도 있는 경우의 수가 생기기 때문 입니다.

 

실록에서는 그녀와 소현세자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서의 소현세자의 시신의 모습 앞 부분에 함께 그녀가 평소에 세자와 세자빈을 모함했던 사실을 콕 찝어서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2020) 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6월 27일 -

 

이 사관의 기사에 이어지는 내용이 앞서의 소현 세자의 시신 상태를 언급하는 기사 입니다.

 

더구나 소현세자가 죽기 3일전 시침했던 어의 이형익에 대해서는 왕이 그에게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내용과 소용 조씨의 친정과 왕래가 빈번하여 그 어미와 불의의 소문이 날 정도였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습니다.

 

특명으로 전 현령

이형익(李馨益)

을 서용하였다.

형익

은 침술(鍼術)로 상께 총애를 얻어, 일찍이 병을 치료할 일로

조 소용(趙昭容)

의 어미 집에 왕래하였는데, 인하여 추잡한 소문이 있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1월 4일 -

 

즉 완곡하게 나마 인조 실록의 기록자들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소용 조씨와의 연루를 의심하여 표현해 두었던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후세의 역사가들 중에는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도하였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녀의 속살거림에 결국 인조는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며느리와 손자들을 법살하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꽃들의 전쟁

 

인조의 후궁에서의 꽃들의 전쟁은 인렬왕후의 뒤를 이어 계비가 된 장렬왕후, 소용조씨, 세자빈 강씨의 대권을 향한 전쟁을 묘사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용 조씨도 소현세자의 아우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에 그녀의 악행들이 드러나 사약을 받고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심지가 굳은 위대한 인물들을 주변인의 참소나 모함등에 일회 일비 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침착한 사고를 하는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이 항상 비극을 일으키는 일들이 비단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도 늘상 보고 듣게 되는 일들입니다. 결국 꽃들의 전쟁은 의심많고 참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조 때문에 벌어진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을 죽게 만든 또 하나의 비극적인 전쟁 입니다.

 

조선 역사상 최악의 왕

 

인조에 대해 글을 쓰며 인조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글쓴이 개인적으로 인조야 말로 조선 역사상 최악의 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악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마저 왕권 강화라는 일부의 목적이라도 있어 보였던 것에 비해서 인조는 숨을 거두는 1649년 까지 재위기간 내내 정치면 정치, 외교면 외교, 가정사면 가정사 모든것이 우왕좌왕, 남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후세에 "단언컨대 조선 최악의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의 무능을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힘이 없던 왕권, 급변하던 국제 정세와 신권의 향상 때문으로 돌리고 동정하는 여론도 있지만 최근에 읽은 청나라의 강희제에 대한 글들을 보면 어린나이에 황제위에 올라 어쩌면 인조 보다도 더 힘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 상태에서 강한 힘을 가진 만주족 권신에게 짓눌리면서도 침착하게 계획하여 황제의 권위를 어떻게 해서 되찾아오고 청나라의 황금기를 여는지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서 역시 인조의 사정이란게 변명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볼모로 잡혀갔던 아들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자 귀국한지 2달만에 독살(정황상의 심증)하고 그 일가들까지 법살하여 뿌리를 뽑으려 했습니다. 북벌을 주장하며 자신을 몰아붙였던 서인세력은 전쟁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고 임금의 무능만을 매섭게 질책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급급했습니다.

 

그의 사후 증손자인 숙종대까지 조선 왕실에서 왕권을 누린 임금은 한동안 없었으며 사후에는 예송논쟁으로 일컫어 지는 상복을 몇년 입는가 하는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명분 따위로 당파 싸움이 격화되는 후대를 연 왕이기도 합니다.

 

맺으며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조가 살아간 시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왕과 지배층들이 쓸모없는 명분에 얽매어 백성들에게 두번의 전화를 겪게 하는 고통을 주고도 끝없는 각 당파와 세력간의 주장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빈번하던 시대, 특정 당파의 인사들의 배만 불리고 무엇하나 이룬 것 하나 없는 시대입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글머리에 언급했듯 힘의 관계가 급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쪼록 현명한 판단과 실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입니다.

 

지금까지 조금 길고 내용도 부족했던 인조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글은 똑 같이 아들을 죽였지만 인조와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영조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참조

wikipedia.org

책 - 조선임금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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