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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비극 -2-

이전 글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게 된 원인에 대해서 당쟁의 과정에 의해 희생 되었다는 관점 중심으로 서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후대에도 이견이 분분한 상황 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과정을 다시 한번 살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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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Kings] -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나? -1-

 

 

최근 드라마 "비밀의 문" 에서의 영조, 한석규 분

 

영조

 

이전 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영조는 경종의 독살설과 어미의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왕이 되기 위해 항상 조심하고 학문으로 자신을 갈고 닦은 왕입니다. 그는 아들 역시 자신처럼 학문으로 신하들 보다 우위에 서길 바랬고 그 때문에 사도세자를 늘 다그치고 효를 시험하는 선위파동으로 심신에 압박을 주었습니다.

 

사도세자의 몇가지 일탈이나 광증으로 표현되는 히스테릭한 증상은 분명히 영조의 집착으로부터 기인한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영조는 어느 시점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분명하게 포기 하였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사도세자는 세자였기에 포기 하는것만으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조가 원하는 대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면 결국 죽일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속설에는 사도세자가 소론과 숙부인 경종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자 영조는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영조의 경종의 죽음에 대한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일이었고 본인이 저질렀건 본인이 억울함을 느끼고 있던 또 위의 속설이 근거가 없더라도 어느 순간 아들이 소론과 남인의 기대를 받는 세자가 되었고 그대로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이 어떻게 평가될까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일이었을 것입니다.

 

불안한 왕권으로 왕위를 이은 영조는 분명 업적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끝까지 권력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왕이기도 했습니다.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해서는 모함이라는 설과 실제라는 설이 분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중록과 서간에 그 기록이 분명히 있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있었다면 분명히 표출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정신적인 문제는 없었더라도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분노 표출과 일탈은 그가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의 크기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 이기도 입니다. 그가 장인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우울증과 화증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영조가 아직도 숙종의 능에 참배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완곡하게 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불만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조 기사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공개

 

혜경궁 홍씨의 기록은 최근에 와서는 노론이라는 당파의 입장에 치우치고 자신의 아버지인 홍봉한을 감싸려는 의도가 있다고 평가 받긴 하지만 그래도 세자가 내관을 죽여 목을 베고 여러 내인을 죽인 일들이 기록한 것은 거짓은 아닐것으로 보입니다.

 

왕이 될 세자가 이처럼 쉽게 살인을 저질렀다면 영조의 입장에서는 지고의 자리를 물려줄 왕세자로써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일이었을 터 입니다. 또한 사도세자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박씨를 순간의 분노로 때려 죽인일도 분명 주변 사람들을 불안케하는 일들이 아닐수 없습니다. 죽기전 평안도에 다녀온뒤 궁궐 전각 지하에 군기붙이를 숨겨둔 것이 영조에게 들킨 일들은 사도세자가 쿠데타를 기도했었다는 설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영조를 죽이겠다고 말을 했는지는 불명확 하지만 태도로써 그러한 부분들이 은연중 드러났을지도 모릅니다. 친 어머니인 영빈 이씨마저 영조의 편에 서서 결단을 촉구한 것은 사도세자 본인에게도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된 책임이 있어 보입니다.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 영빈 이씨

 

세자빈이던 혜경궁 홍씨와 장인인 홍봉한은 어떻게 보면 사도세자를 필사적으로 보호해야할 입장이었습니다. 홍봉한은 요즈음에 노론이었던 당파에 이익에 우선하여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만드는 일에 오히려 앞장섰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권력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권력자들에게는 속한 당파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권력이 더 중요합니다.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는 당론보다 분명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는것이 분명히 더 낫습니다. 어찌되었던 죄인의 장인과 죄인의 처가 될수 밖에 없는 상황에 단순히 당파의 논리로 사도세자를 버리지는 않았을터 라고 생각이 듭니다.

 

글쓴이의 생각에는 사도세자에게 무엇인가 치명적인 문제를 느꼈거나 결국 왕이 될수는 없다고 보고 차선책으로 세손을 보호하여 왕위에 세우는것을 선택했던걸로 보입니다. 실제로 세자의 비행 10가지를 고한 나경언의 고변을 영조에게 직접 전달한 사람은 홍봉한이었습니다.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친모 입니다. 그런데 그녀마저도 아들인 사도세자를 처벌하라며 영조의 편에 섰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사도세자는 과도한 압박으로 인해 어느 순간 품어서는 안될 생각을 품고 그 사실이 공공연하게 주변 사람에게 알려지게 행동 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정순왕후, 숙의 문씨, 화완옹주

 

정순왕후는 세손(정조) 보다 겨우 7살이 많은 15살에 66세의 영조의 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김한구의 딸로 뼈속부터 노론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고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숙의 문씨는 영조의 후궁으로써 그녀는 노론 벽파인 김한로와 결탁하여 영조의 총애를 무기로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해 바치고 부자지간을 이간질 하는데 역시 앞장 섰습니다. 자신의 영향력으로 권력과 결탁해 그 달콤한 과실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여동생 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친오빠인 사도세자의 비행을 부풀리고 과장하는 일을 주특기로 삼았습니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보면 그녀는 나중에 세손에 영향력을 미치려 애를 썼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의 어미가 되려는 시도를 할 정도로 권력욕이 높았던 것이 이유라고 볼수 있을듯 합니다. 결국 입적 시도가 실패하자 세손을 혜경궁 홍씨에게서 떼어놓을 목적으로 죽은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도록 영조를 설득합니다.

 

이처럼 사도세자와 영조, 부자지간의 사이에는 자신이나 당파의 목적을 위해 그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노론인 윤급의 종인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가지를 영조에게 고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고변은 조정의 최고급 관리들과 홍봉한 등을 통해 영조에게 전달되는데 영조의 분노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나경언은 3일뒤 자신의 고변이 모함이라고 자백하고 사형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석고대죄를 시작 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친 어머니인 영빈 이씨마저 는 물론 장인인 홍봉환도 아무런 구명 활동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사도세자의 주변인물들 마저 그를 포기하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나경언의 고변이 계기가 되어 결국 영조는 5월 13일 사도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용서를 빌었으나 영조는 명을 물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신하들 조차 감히 입을 떼지 못하였으며 세손(훗날의 정조)만이 아비를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영조는 세손을 내보낸뒤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것을 명했습니다. 직접 뒤주에 자물쇠를 영조가 채웠고 사도세자는 좁은 뒤주안에서 8일간을 신음한 끝에 굶어 죽었습니다. 사도세자의 나이 27세 였습니다. 이 사태가 바로 임오화변으로 불리는 사도세자의 죽음 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느 한 가지에서만 원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당쟁에 의해서이든 영조의 컴플렉스와 권력욕 때문이었든 사도세자 본인의 광증과 일탈 때문이었든 아니면 그 모든게 복합적이었든 결국 역사를 통틀어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를 해한 일이 적지 않은것이 왕위라는 권력의 속성인가 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현재의 연구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한 사안 입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태도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조는 세손에게 죄인의 아들이라는 부담을 지우지 않고 보호하면서도 또한 자신이 아들을 죽여여만 했던 사정도 인정받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록들이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변조되는 등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남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조

 

화성 행궁에 마네킹으로 재현되어 있는 정조

 

 

죄인의 아들이자 세손이던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두달후에 동궁으로 승격이 됩니다. 동궁은 왕세자를 칭하는 말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 주겠다는 영조의 의중이 반영된것 입니다. 이를두고 노론은 연산군을 떠올리며 세손까지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노론 당파의 당색에 맞추어 주도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인 홍봉한이 세손을 지지하면서 노론은 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벽파), 홍봉한을 지지하는 부홍파(시파)로 갈라지게 됩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수가 없다가 했는데 가족쯤이야! 혜경궁 홍씨의 집안만 해도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벽파에 가담합니다. 결국 정조는 영조의 장남이지만 어릴때 목숨을 잃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계승자로써 심각한 결격사유인 죄인의 아들이라는 부분은 명분상으로나마 벗어나게 됩니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외할아버지 홍봉한, 할아버지 영조는 모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핵심적인 인물들 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조를 필사적으로 보호하여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아버지를 죽게한 원수로 볼수도 자신을 보호해준 감사를 할수도 없는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776년 영조가 82세로 엄청난 장수를 누린끝에 승하하자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공격속에 인고의 세월을 보낸 정조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습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지 15년 뒤의 일입니다.

 

즉위 후 가장 먼저 정조가 한말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노론 벽파를 경악시켰고 즉시 행동을 취합니다. 정조는 즉위 첫 해에만 입곱차례의 암살 시도를 이겨내며 암살에 대비하기 위해 옷을 입고 침소에 드는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당쟁에 찌든 조정을 개혁하려 합니다. 학자에 따라서 세종대왕 이후의 조선에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평가 받는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죽은 그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 되었습니다.

 

참조

wikipedia.org

조선임금 잔혹사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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