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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나? -1-

22번째 왕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 입니다. 왕 이야기는 최근 인조를 시작으로 영조와 러시아의 이반 뇌제까지 아들을 죽여야 했던 왕들을 작은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조는 재위기간만 무려 51년인 장수한 왕 입니다. 신분상으로는 천민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임금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거듭된 전쟁과 사회혼란으로 위축되었던 조선은 영조대에 이르러 다시 생기를 찾고 발전하게 됩니다.

 

영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즉위 초기에 탕평책을 통하여 당파를 타파하려 노력했고 악형을 폐지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쓰고 서적 간행등으로 대표되는 학문을 진흥시킨 왕입니다. 하지만 신분의 컴플렉스 때문인지 왕으로써 열심히 학문을 닦고 역활을 수행했던 영조에게 두 가지의 큰 오점이랄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의 형인 선대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로 평생의 의혹을 받은 것과 바로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입니다.

 

영조 어진

 

경종 독살설

 

이전의 숙종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야기 했듯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고 영조는 천민 출신인 최무수리였던 동이, 숙빈 최씨의 아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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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장희빈(장옥정) 그리고 인현왕후 왕 이야기 13

 

아버지 숙종의 복잡한 여자관계(?)와 일시에 집권 당파를 교체해 버리는 환국 정치로 인해서 발생된 사화로 어머니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경종은 죄인의 아들로 살얼음판 같은 시기를 겨우 버텨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장희빈을 죽게한 노론 세력에게 그 아들인 경종이 당연히 당연히 껄끄러운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다만 경종도 보통 내기는 아닌것이 신임사화를 통해 단숨에 노론 세력을 축출하고 소론을 정국에 등용하여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노론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으며 노론 세력에게 깊은 원한을 삽니다. 또한 노론세력이 왕의 병약함을 들어 대리청정을 지지한 왕세제 연잉군(훗날의 영조)은 이러한 사화의 결과로 자연히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습니다.


결국 경종은 소론의 강경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동생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고 끝까지 보호합니다. 그러던 중 연잉군이 바친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은 극심한 배탈과 고통을 호소하며 구토와 설사를 하던끝에 죽게 됩니다.

 

경종이 몸이 약하긴 했지만 별다른 병증이 없던 상태였는지라 이는 연잉군(훗날 영조)에 의해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독살설의 근원이 됩니다. 당시 사서에는 경종이 구토와 설사를 한다는 병증을 전해듣고 게장과 생감이 의가에서 금하는 음식이라는 말에 연잉군의 당황해하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독살을 의심하는 기록이 완곡하게 남겨진 것과 달리 경종의 죽음의 과정을 기록한 사서의 정황에는 독살로 볼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무엇이 사실일지는 영조만이 알겠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독살설은 현재로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영조의 즉위로 정권을 잃었다고 볼수 있는 소론 세력은 독살설의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이는 평생 영조의 두가지 컴플렉스중 하나가 됩니다. 또 다른 컴플렉스는 바로 천한 어미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영조는 왕으로써 열심히 학문을 닦고 신료들보다 학문적 우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계기의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경종의 독살설과 노론과 소론의 당파간의 당쟁은 후에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도 결국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숙종 말년에 서인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장희빈은 한때나마 왕비에 올랐기 때문에 경종의 정통성이 더 확실했고 무수리 출신의 아들인 영조는 그 신분적인 컴플렉스를 왕이 된 후에도 평생 떨치지 못합니다.


경종의 죽음이 노론과 영조에 의한 독살이라는 의심을 가진 소론 강경파의 공격은 영조 재위내내 이어젺고 이 의혹을 씻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자 당쟁의 폐해를 없애려고 한 탕평책도 결국은 이때문에 실패하고 영조 후반은 노론의 독주가 허용되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 본 아들 이였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대를 이를 아들이었기 때문에 지극한 사랑과 축복속에 태어난 아들이였습니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당일 원자로 책봉되었고 영빈 이씨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정빈인 정성왕후의 양자로 삼아 생후 14개월만에 세자로 책봉 되었습니다.


영조는 툭하면 대신들 앞에서 사도세자의 영특함을 자랑하는 아들 바보의 면모를 보일 정도였는데 어린 세자의 몸짓 태도하나에 감탄하고 감동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영조는 단식, 눈물, 병석에 들기로 신하들을 다루는 재주외에도 잦은 양위 선언으로 신하들의 주장을 꺽어왔습니다. 사도세자가 15살이 되기전까지도 수 차례 양위소동을 일으켜 왔던 영조는 영조 25년에는 정말로 사도세자에게 양위하고 싶은 마음을 내 비추었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수행하였고 15세의 나이치고는 성공적으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영조는 자주 양위소동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사도세자는 신하들과 같이 눈물을 흘리며 석고대죄하며 이를 철회하도록 해야했습니다. 그 무렵의 영조는 예순에 가까워진 까다로운 노인이 되어있기도 했습니다.

 

글쓴이는 영조 하면 드라마 "이산"에서 이순재씨가 분한 영조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진이나 기록을 보며 떠올린 영조의 이미지와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영조 역이었습니다.

 

이즈음에 사도세자는 울화증을 호소하는 편지를 장인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양위를 무기로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영조의 행동은 세자의 숨통을 조여왔고 상황을 반복하게 만드는 노론 계열의 신하들에게도 점점 질려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자의 대리청정은 후계자로써 기반을 다지는 계기보다는 권력의 속성으로 보면 목숨과도 직결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시 분조를 이끌고 아버지인 선조 대신 훌륭하게 전쟁을 수행하면서 선조의 미움과 의심을 사서 하마트면 왕위를 이을수 없을뻔 했으며 소현세자 역시 청나라에 볼모가 된 후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가교 역활을 훌륭하게 수행하면서 오히려 아버지인 인조의 미움을 사게 된것을 보면 대리청정을 사도세자에게 맡기며 세자의 효를 시험하고 신하들의 충성을 시험하는 영조의 양위소동은 사도세자에게 목숨을 위협하는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출신 신분과 경종의 죽음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영조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에게도 더욱 엄격했는데 번번히 사도세자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곤 했습니다. 이때문에 사도세자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울화가 점차 쌓여가고 있었으며 극도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 졌을것으로 생각됩니다.


1755년 영조 31년에는 나주벽서 사건(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라는 벽서가 나주 객사에 붙은 사건, 주모자가 소론에 속한 윤지로 밝혀짐)이 발생하여 얼마남지 않은 소론들이 완전히 몰락 하였는데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는 보복성 처형을 막으려고 사형이나 처벌을 줄이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자의 객관성 있는 올바른 행동은 영조와 노론을 자극하였고 영조와 세자간에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조정은 영조의 뜻을 받드는 노론과 세자를 지지하는 일부 남인과 소론으로 분열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영조 자신의 컴플렉스에서 일부 비롯되고 노론과 다른 당파의 다툼은 필연적으로 사도세자를 더 압박하여 결국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게 되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사도 세자와 죽음과 그의 아들 정조, 그리고 영조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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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비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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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終), 소현세자의 죽음과 꽃들의 전쟁

 

참조

wikipedia.org

조선임금 잔혹사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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