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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드라마틱한 삶, 헨리 8세와 6명의 왕비, 왕 이야기

영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헨리 8세만큼 이야깃거리와 드라마 소재가 적합한 왕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영국 하면 떠오르는 전설상의 왕인 아더왕이 있지만 실체적인 기록이 명확한 왕으로 한정하자면 말입니다.

 

무려 6명이나 존재했던 왕비와 그중 두 명은 목을 날린 것으로도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될 듯하고 수장령으로 대표되는 영국국교회 성립으로 종교개혁을 했던 왕입니다. 근대에는 다른 나라들이 대응이 불가한 유명한 영국 해군을 실질적으로 강화시켜 영국을 헨리 8세 치세에 열강으로 떠오르게 만든 역사적으로도 한 획을 그은 왕이기도 합니다.

 

뭐 영국사에서 역사적인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업적도 있지만 더 유명한 것은 복잡한 사생활과 결혼 생활로 인한 많은 소재거리들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후세에 유명한 블러디 메리여왕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친부이며 하며 소설 거지와 왕자의 모델이 되는 에드워드 6세의 친부이자 선왕이기도 합니다. 뒤의 인물들도 행적과 소설 등으로 하나같이 유명한 인물들이죠.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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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 아서가 15세에 요절하여 왕위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18세에 헨리 7세의 승하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원래 형과 약혼을 해서 형수가 될 예정이던 아라곤의 카탈리나(캐서린)와 결혼을 했습니다. (형사취수제?)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실제로 헨리 8세의 형 아서와 결혼식까지 올렸으나 잠자리를 가지지 않은 처녀의 몸을 주장하여 교황청으로부터 헨리 8세와의 결혼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녀는 통일 스페인 왕국을 성립시킨 가톨릭 부부왕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로 '아라곤의 카탈리나'라고 불립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캐서린)
아라곤의 카탈리나

 

헨리 8세는 대외 전쟁에도 열성적이어서 이탈리아에서 충돌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 의 전쟁에 신성로마제국의 편으로 참전해 승리하긴 했으나 이 출병은 재정만 축내고 얻은 게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국내의 전쟁에서는 성과를 거두어 스코틀랜드와 전쟁에서는 플로든 전투에서 크게 이겨 스코틀랜드를 궁지에 몰기도 했습니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종교개혁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영국 국교회를 성립시키는 수장령을 선포한건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실제로는 영국교회에서 교황청의 간섭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가 메리 공주 외에도 자식은 유아 때의 죽음이나 사산으로 잃었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한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가임기를 넘긴 상황이라 이혼을 원했다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다른 대안이던 사생아들 마저 단명하고 사생아는 왕권 승계에서도 명분상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헨리 8세 이에 새로운 결혼을 통해 후계를 확보하길 원했다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과거 장미 전쟁의 사례처럼 후계 왕권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이 자명했고 헨리 8세 개인적으로도 아들과 후계자를 원했기에 교황청에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이 이혼 신청이 교황청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헨리 8세는 결국 수장령을 선포하고 영국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시키는 것을 선언했는데 이게 영국 국교회의 성립 배경입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이혼하기 위해서 영국 교회를 독립시키고 종교개혁함...인데... 그만큼 헨리 8세가 절대적인 왕권을 누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수 있었습니다.

 

앤 볼린
앤 볼린

 

어쨌든 아라곤의 카탈리나(캐서린)와 갈라선 헨리 8세는 카탈리나(캐서린)의 시녀였던 메리 볼린의 언니인 앤 볼린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앞서의 이혼 사태는 앤 볼린이 정부가 아닌 정식 왕비로 청혼하길 원했던 부분도 컸습니다. 헨리 8세는 앤에게서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지만 결국 앤 볼린은 훗날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되는 공주만을 낳았을 뿐 결국 사내아이를 낳아주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실망감으로 헨리 8세는 새로운 애인인 제인 시무어에게 기대를 옮겼고 왕비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 저항하던 앤 린은 다소 얼토당토않은 다섯 명의 남자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목이 잘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제인 시무어
제인 시무어

 

다음 왕비가 된 앤 블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무어는 앤 린과는 반대의 성격으로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금발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제인 시무어는 훗날 에드워드 6세가 되는 아들을 출산합니다. 그러나 제인 시무어는 출산 후유증으로 곧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헨리 8세는 제인 시무어만을 진정한 아내로 여겼다는데 이는 그녀가 그토록 염원했던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사망 후에도 제인 시무어 곁에 묻혔습니다.

 

클레베의 앤
클레베의 앤

 

네 번째 왕비인 클레베의 앤은 독일 신교국가인 클레베 공국의 공주로 신교 국가 간의 관계를 깊이 해서 영국이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요소도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다만 헨리 8세는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반해 결혼을 결정했는데 영국에 도착한 그녀가 초상화와 달라서 많이 실망했고 영어를 못하던 것과 좋게 말해서는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지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서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앤의 시녀인 캐서린 하워드에게 마음이 끌린 헨리 8세는 클레베의 앤에게 결혼 무효를 선언하고 왕궁을 떠날 것을 종용합니다. 이쯤 되면 시녀 킬러, 시녀 취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다만 왕비의 시녀도 귀족이었다는 시대상은 참고할 필요 있습니다.

앞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이 잘린 앤 블린의 사례도 있고 조금 버티던 클레베의 앤은 "왕의 누이" 대우를 받으며 영토를 받고 영국에 머물 수 있는 대가로 이혼에 합의하게 됩니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하워드

 

아직 10대 후반으로 천진난만하고 다소 경솔했던 캐서린 하워드는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가 됩니다. 헨리 8세는 그녀를 총애하고 그녀에게서 더 많은 아들을 얻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다만 그녀는 헨리 8세의 왕비라기에 다소 경솔했습니다.

그녀는 음악교사 매녹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고 시녀 시절에 서기관 프란시스 더햄과 결혼을 전제로 공공연하게 육체관계를 맺었었다고 합니다. 또 헨리 8세의 시종이던 토머스 캘페퍼에게 반해있었습니다.

왕비가 되었으면 이러한 관계들이 흠잡히지 않도록 끊어내야 했을 터인데 그녀는 왕비가 된 후에도 경솔하게도 캘페퍼에게 연서를 보내고 매녹스를 궁정음악가로 프란시스 더햄을 개인비서로 임명해 궁정으로 불러들여 곁에 두었습니다.

1541년 헨리 8세는 그녀가 간통을 하고 있다는 밀고를 받게 되고 처음에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곧 분노에 차서 더햄과 캘페퍼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게 되고 캐서린은 겁에 질려 간통을 실토하고 맙니다. 왕비의 간통은 반역죄로 간주되어 그녀는 결국 앤 볼린에 이어 두 번째로 목이 잘린 헨리 8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캐서린 파
캐서린 파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는 과부였지만 헨리 8세에 눈에 띄어 왕비가 됩니다. 원래 그녀는 토머스 시무어를 사랑해 그와 재혼을 바랐으나 왕의 구애를 거부할 순 없었을 겁니다. 캐서린 파는 인내심이 강하고 이해심이 많은 성격으로 헨리 8세와 사이좋은 부부로 지냅니다. 각각 어머니가 다른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를 잘 키우고 노쇠해 가는 헨리 8세를 잘 보필합니다. 그녀는 각각 떨어져 살던 헨리 8세의 자식들을 한 자리에 모여 살게 했고 결국 헨리 8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로 남게 됩니다. 헨리 8세 사우에는 결국 토머스 시무어와 재혼하게 됩니다.

 

자 3명의 왕비와 이혼하고 2명의 왕비의 목을 자른 헨리 8세의 결혼 생활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기도 합니다. 아들을 얻기 위한 헨리 8세의 여정은 훗날 드라마의 소재가 될법한 결혼 생활 스토리를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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