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속에서도 몇몇 왕들은 특이한 성향을 가진 왕들이 몇몇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왕으로서는 기록상 고려의 목종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노국공주의 죽음 뒤의 공민왕의 경우는 완전하게 그런 취향을 드러냈다기 보다는 일시적인 일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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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Kings] - 공민왕과 노국공주, 왕 이야기 10
8세기 신라토용
오늘 소개할 신라 중대의 끝을 알린 혜공왕의 경우는 그 여성적인 성향과 복장 도착등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흥미위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남자들 사이에서 고교 시절 국사를 배우며 또 남다른 의미로 유명한 왕은 바로 지증왕 이긴 합니다. 신체에 대한 기록이 종종 남은 삼국 유사 때문인지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도 그렇고 신라시대의 왕들은 유달리 큰(?) 인물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잡담은 잠시 뒤로 하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신라 하대의 헬게이트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혜공왕에 대한 이야기로 25번째 왕 이야기로 풀어 볼까 합니다.
신라 혜공왕의 이름은 김휘 입니다. 신라의 36대 국왕이며 무열왕 계열의 마지막 왕이기도 합니다. 재위기간은 765년에서 780년 까지로 15년 남짓이지만 겨우 8세에 왕위에 올라 778년까지는 모후인 만월부인이 섭정을 하였으므로 그가 친정에 임한 기간은 겨우 2년 정도의 짧은 시기 입니다. 혜공왕의 출생에 대해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덕왕의 생식기는 길이가 8촌(24Cm)인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비를 폐하고 다음 왕비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을 맞았다. 시호는 경수태후(景垂太后)요 의충 각간(依忠角干)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불국사의) 표훈 스님에게 말하기를,"내가 복이 없어 자식을 얻지 못하니 원컨대 스님은 하느님〔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점지하도록 하라” 하였더니 표훈이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天帝〕께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하느님의 말씀이 딸이면 곧 될 수 있으나 아들은 안 된다고 하시더이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딸을 아들로 바꾸어주기 바란다”고 하니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하였다. 하느님이 말하기를,“그렇게 될 수는 있으나 아들을 낳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였다 표훈이 하늘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에 하느님이 다시 불러 말하기를,"하늘과 인간 사이를 문란케 할 수는 없다. 지금 네가 이웃마을 다니듯 하늘을 왕래하여 하늘의 비밀을 누설시키니 금후 다시는 다니지 말라’’ 하였다.
표훈이 내려와서 하느님이 하는 말로써 이르니 왕이 말하기를,"비록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 자식이나 얻어 뒤를 이었으면 그만이겠다” 하였다. 이러고서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으니 매우 기뻐하였다.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삼국유사-
원래 여자아이 였는데 하늘에 청하여 억지로 남자 아이로 만들었다는 설화로 실제의 일을 나타내었다기 보다 경덕왕이 늘그막에 어렵게 아이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설화 자체는 후에 혜공왕의 죽음 이후 그 여성적인 취향을 빗대어 만들어낸 이야기 이거나 혜공왕 사후 그를 제거한 세력들에 의해서 자신들을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큽니다.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은 통일신라의 힘이 절정기에 이르렀을때의 왕입니다. 그는 중앙의 관제와 행정조직을 개편하며 당나라식의 관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편이 아니라 왕권강화 수단의 일환으로 보기도 합니다. 혜공왕 자신도 역시 국학에 행차하여 유교 이념을 확산하려 한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중국식 통치체계와 유교 이념은 왕에 대한 충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레 사상적인 왕권 강화 방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습니다. 경덕왕때 부터 추진 되어오던 신라의 왕권 강화의 움직임은 강력한 왕이 죽고 어린 아들이 왕위를 이어 그 모후가 섭정을 행하는 권력의 공백기에 이르러 신라의 귀족들을 실력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발굴 당시의 석굴암
경덕왕때 건립된 석굴암과 불국사
그러한 예를 들자면 혜공왕은 즉위후 연이은 반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즉위 4년 일길찬 대공이 아우 대렴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33일간(삼국사기 기록, 삼국유사에서는 3개월)이나 궁궐을 포위했다고 합니다. 결국 왕의 군사는 이들을 간신히 물리치고 반란을 평정했는데 혜공왕 6년에는 가장 규모가 큰 반란인 96각간의 난이 일어납니다. 각간은 제 1관등인 이벌찬을 지칭하는 말인데 당시에 제 1관등인 각관이 96명이나 있었고 이들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 서로 싸우는 난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이들이 각각 서로 싸웠다기 보다는 당시 신라의 모든 유력 세력이 편을 갈라 싸우는 거대한 내란이 있었다고 유추됩니다.
학계에서는 이 반란을 혜공왕과 모후에 섭정에서 왕권강화의 움직임이 계속되는데 대한 반대 세력의 난이었다고 보는 시선과 당시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닌 김옹과 김양상 같은 실권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 성격의 난으로 보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합니다.
이 반란이 평정된 후에도 혜공왕 재위 시기의 기록은 계속되는 귀족의 반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왜 혜공왕 시기에 이렇게 갑자기 귀족들의 반란이 빈번해졌을까요? 삼국 통일 이후의 무열왕계의 독주와 지속적인 왕권강화 정책은 비교적 귀족 세력이 강하였던 신라에서 그간 쌓여오던 귀족들의 불만이 어린왕의 즉위로 인한 공백기를 맞아 터져나온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혜공왕 12년에는 결국 교서를 내려 관제를 다시 옛 것으로 복귀 시켰는데 이를 두고 경덕왕대의 왕권 강화책을 귀족들이 무력화 시킨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느쪽으로 보던 혜공왕 시기의 정치는 강한 귀족세력과 왕의 힘의 공백기로 매우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또한 혜공왕에 대한 평가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혜공왕 16년 2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노는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했다
-삼국사기-
어린 왕(혜공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때까지 언제나 여성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도류와 어울려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왕은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살해 당하였다
-삼국유사-
삼국유사의 이 기록 때문에 혜공왕은 여성적인 성향을 가진 복장 도착자이거나 동성애적인 취향를 가진 왕으로 여겨지고 있기도 합니다. 반면 삼국 사기의 기록에는 음악과 여자에 빠져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성적인 취향에 대한 묘사는 상반되어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결국 매우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즉위한 왕이었지만 너무 어린나이에 왕이 되었고 왕으로써 어울리지 않는 취미와 풍류에 몰입했던 왕이 아닌가 여겨 집니다.
결국 혜공왕대 마지막 반란인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군사가 궁궐을 침범하는 중에 혜공왕과 왕비는 죽임을 당했고 상대등 김양상, 이찬 경신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삼국사기) 반란 진압후 실권을 쥔 김양상이 선덕왕이 되어 신라 하대의 첫 왕이 됩니다. 이로써 신라 무열왕계는 끝이나고 이후 신라는 155년 동안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고 재위기간이 1년 미만인 왕이 4명이나 되는 반란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는 잘 아시다시피 후삼국 시대와 고려의 성립이라는 신라멸망이라는 트리를 타게 되었습니다.
혜공왕을 죽인 이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엇갈리는데 김지정에 의해 죽음을 당한것이라면 혜공왕의 후사가 없었기에 김양상이 그 뒤를 이어 선덕왕이 된것이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김양상에 의해 왕위를 찬탈된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김양상과 선덕왕은 동일 인물인데 삼국유사에서는 마치 별도의 인물인것 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신빙성이 떨어지기는 합니다.
어느쪽이 진실이었던 현재로서는 명확히 알길이 없지만 확실한 것은 신라의 무열왕계가 계속적으로 추진했던 왕권 강화 정책이 실패하였고 혜공왕은 어렸기 때문일지 그 그릇이 안되었던지 어찌되었던 이를 지속 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극심한 권력의 분열과 귀족들간의 다툼에 의해 통일 신라가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된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끝으로 분명 관점과 상황은 다르지만 신라시대의 국가의 주권은 왕에게 있었고 현재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이 주권이 명확한 주권자가 아닌 일부의 세력들에게 집중되거나 침범 당할때의 결과는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사례를 통해 느껴지는 바가 있습니다. 과연 현대의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국가의 주권을 정말로 잘 지키고 충분히 잘 행사하고 있는것일까요?
-뱀다리-
해당 글에서 특정 성적취향은 비하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글쓴이는 특정한 성적취향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임을 알려드립니다.
사용된 토용, 석굴암, 불국사 이미지 출처 : https://www.mu-um.com/history/detail1.php?bid=hist_k&idx=191&sf=&sv=&page=1
내용 참조 :
wikipedia.org
삼국유사
역주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