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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고문관

이 땅에 태어난 남자들이 청춘의 한 시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일 들이 하나 있다. 바로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 군대에 징집되는 경험이다. 나 역시 20여년 전 입영통지서를 받아들었고 버스를 타고 논산에 도착해 머리를 깍고 훈련소에 입영을 했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어떻게 치루어 졌는지도 모르는 입영식 뒤에 따라왔던 가족, 친구들이 돌아간 후, 갑자기 우악스러워진 조교의 욕설에 위압감을 느끼며 오리걸음으로 훈련소 내무반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군대라는 낯선 곳에 대해 느꼈던 두려움, 불안감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사복을 싸서 편지와 함께 집에 소포를 부치면서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며칠 후 집에 도착한 내 옷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만 펑펑 우셨다고 한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이 시기에 나는 순하고 남을 미워해 본적 없는 청년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나름 때 묻지 않은 청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내무반에 스무명씩 우겨 넣어져 옷을 갈아 입은 후 침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던 대기 시간들, 복도의 조교의 존재로 인해 암묵적으로 웃음과 대화가 일절 금지되어 있었지만 처음 본 사이들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며 급격히 친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러다가 시끄럽게 떠든다고 걸려서 단체로 원산폭격 얼차려를 받기도 했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청춘들은 서로 서로를 챙기며 친해지기에는 약 1주일간의 훈련소 대기시간이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와 같은 훈련소 중대가 되어 같이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에 우리들은 태어나서 처음이랄 수 있는 사회와 격리된 단체 생활에도 서로서로 배려하며 어떤 연대감 같은걸 느끼는 사이가 되었다. 군대에서는 결코 시간이 여유 있게 주어지지 않는데 어린 시절부터 활동적인 행동들 보다 어딘가 틀어박혀 책을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어설펐다. 게다가 내게 지급된 장비들 중 머리에 잘 맞지 않는 철모와 탄띠는 훈련내내 나를 괴롭혔다. 

 

분명한 것은 군대에서도 체질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초기부터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장비들은 남에 것과 슬쩍 바꿔 치거나 요령껏 조교들과 친밀해져서 다시 지급받거나 했지만 그런 요령 하나 없던 나는 딱 한번 장비 교체 이야기를 했다가 알아서 몸에 맞추라는 조교의 불호령에 내무실로 달아나듯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나가기 위한 집합은 내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다. 어설프고 일해본 적 없는 손은 매번 군대의 투박한 장비들에 긁히고 상처입기 일쑤였고 몸에 맞지 않는 장비들은 언제나 빠릿빠릿한 준비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만 빼고 모두 재빠르게 준비하는 것 처럼 보였던 훈련소 동기들도 이제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각각 차이는 있지만 모두 허둥지둥 숨이 턱까지 차서 아찔 할만큼 따가운 햇살아래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도열해야 했던것 같다. 연병장의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을 지나 훈련장으로 행군하면서 몸에 맞지 않는 장비들에 옥죄어 하고 힘들어 하며 6월의 더위에 헉헉 되었던 것 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훈련 중대원 중에는 행동과 말투가 조금 어눌한 친구 A가 있었다. 전라도 어느 산골마을 출신이던 그는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던 우리보다도 좀더 적나라한 사투리에 행군하면 늘 같은 손발이 나가곤 하던 친구였다. 이 친구는 나 보다도 이런저런 행동들이 더 어설펐으나 마음만은 착한 친구 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사투리와 어설픈 행동들을 지적하지 않았고 그의 사투리에 재미있어 하고 그의 따뜻한 마음씨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훈련병 생활이 이어지면서 우리 대부분은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잃어갔던 것 같다.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던 어느 뜨겁던 여름날 우리는 무더위 속에 제식훈련을 받게 되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날씨에 구령에 맞추어 앞으로 가, 뒤로 돌아가 등을 전우조라는 이름으로 10여명씩 조를 짜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군복의 등은 완전히 땀에 젖어 달라붙고 안경에는 쉴새 없이 땀이 묻어나 앞을 보기 힘들 정도 였다. 우리 조가 된 이 친구 A는 안타깝게도 손발이 같이 나가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제식의 기초는 앞으로 딛는 발과 반대편 팔이 같이 나가야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비교적 차분하게 바라만 보던 조교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습한 날씨 때문인지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야이 고문관 새끼야~ 이걸 한 시간째 못하냐, 너네 전우조! 저 새끼 이거 해낼 때까지 휴식 없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제는 알겠나? 라는 조교의 물음에 습관이 된 반응으로 "네 알겠습니다." 라고 악을 썼지만 모두가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여름철 변덕스러운 날씨답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 덕에 뜨거운 햇살은 피했지만 쏟아지는 폭우에 안경에 물이 차 거의 앞이 보이지 않고 눅눅한 습기는 더 숨을 막히게 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실수에 "괜찮아"를 연발했지만 제식을 무사히 통과하여 비를 피하며 쉬고 있는 다른 전우조를 보면서 쉴새없이 걸어야 했던 우리는 누구라고 할것 없이 점차 침묵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빗속에서 지친 누군가가 실수를 하자 우리 중에서 짜증섞인 "아 씨팔" 이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이후에는 살 얼음판 같은 긴장이 우리를 지배했다. 조교가 고문관이라고 지목한 A는 처음에 잘 하다가도 여전히 손발이 같이 나오기 일쑤였고 우리의 분노의 화살은 그를 향하기 시작했다.

 

"아 이 고문관 새끼"

 

마침내 같은 처지의 훈련병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A를 고문관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순간 부터였을 것이다. 우리가 6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이 끝나는 내내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고문관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또한 "고문관" 이라는 명칭은 이내 우리에게 두려움과 멸시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 되기 시작했다. 훈련소의 조교들 중 몇몇은 우리중 누군가가 조금만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여도 망설임 없이 "고문관 새끼"를 연발 했고 그 명칭을 들은 날은 동료 훈련병들이 자신을 고문관으로 여기거나 부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이후 훈련병들은 이 순박한 친구인 A를 스스럼 없이 고문관이라고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까지도 그의 면전에서는 그를 고문관이라 부르지 못했다. 아마도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하기에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러던 어느날 숙영지 구축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2인 1조가 되어 텐트를 치고 숙영 훈련을 하는 날이었는데 이런 일에는 소질이 없는 나는 텐트를 잘 칠것 같은 짝을 원했다. 하지만 군대는 줄이다. 선착순 줄을 서는데 하필 A는 내 옆에 섰고 나와 그가 텐트를 치는 짝이 되었다. 둘다 그런일에는 소질이 맞지 않는데다 서로 손발도 맞지 않아서 그날 A와 나는 텐트를 가장 늦게야 칠 수 있었고 가장 늦은 벌로 엎드려 뻗쳐 얼차려를 받으며 조교에게 "고문관 새끼들" 이라는 멸시를 들어야 했다. 

 

어느새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이 되었고 좁은 2인용 군용 텐트 안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붙이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나는 그를 처음으로 고문관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얼차려를 받아 화가 난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내가 같은 고문관으로 불려졌고 같은 존재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 이었으리라. 서로가 격한 말다툼을 벌인 상태에서 잠이 들었던 우리는 밤새 모기에 시달리고 비가 새어 들어와 물바다가 된 바닥에 반쯤 몸이 잠긴채로 잠을 설쳐야 했다. 한 여름인데도  바닥의 빗물로 몸이 흠뻑 젖은 우리는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그럼에도 고단한 훈련은 미칠듯한 졸음을 선사했고 결국 서로가 너무 싫었지만 살기 위해 서로 껴안고 잠이 들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추위 속에 벌벌떨며 서로의 체온으로 겨우 쪽잠을 자야했던 밤이 지났지만 A를 향한 나의 증오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것은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보다는 나도 그와 동류가 되어 "고문관"이라는 군대내의 천대받는 특수한 계층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그를 고문관으로 스스럼 없이 불렀고 다른 이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그를 멸시했다. 그것이 내가 그와 동류가 아니라는 어떤 증명이었고 그와 다르다는 나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표지였다.

 

훈련이 끝나갈 때쯤 나는 입소 할 때 보다 체중이 10kg 가까이 빠져서 55kg의 차가운 눈빛을 가진 악만 남은 검게 탄 얼굴의 깡마른 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때라고 힘들지 않았겠냐만은 평소 운동이라고는 거의 해본적 없는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이던 나의 여름 훈련소 생활은 예전에 순하고 여린 청춘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누군가가 내리는 명령을 수동적으로 생각없이 수행할 수 있는 악과 깡만 남은 더 이상은 순진무구하지 않은 비쩍 마른 남자로 바꾸어 놓았다.

 

수료식을 하고 자대 배치 대기를 하던 훈련 중대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통신병으로 차출이 되어 먼저 훈련소를 떠나게 되었다. 그날은 운전병이나 다른 보직으로 차출 받은 인원들이 모두 떠나는 날이라 절반 이상의 훈련병들이 짐을 쌌다. 우리가 키보다 높게 짐을 우겨 넣은 더블백을 메고 내무반을 나설 때 나는 A가 울고 있는걸 봤다.

 

"잘 가라 이 새끼들아 또 보자"

"제대하면 꼭 보자"

 

그는 우리가 걸어가는 내내 내무반 창가에 달라붙어 울며 그런 아쉬움의 소리들을 토해냈다. 네가 그러면 안되잖아 우리가 널 어떻게 대했는데? 우리가 널 얼마나 소외시키고 멸시했는데 너는 왜 우리가 가는게 그리 아쉽고 눈물이 나는거냐?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을때 더블백을 멘 누군가 한 명이 작은 소리로 이죽거렸다.

 

"저 고문관 새끼, 병신같이 왜 저러는 거야, 우리가 갈군것도 모르나?"

"알면 달리 고문관 이겠냐?"

 

몇몇이 맞장구를 치며 그를 어이없어 했지만 더블백을 메고 열차를 타는 내내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제식 좀 못한다고 해서, 말투가 어눌해서, 사투리를 써서, 싸움을 못해서, 말을 빨리 못 알아듣는 다고 해서, 그 선하고 순박한 남자를 우리가, 아니 나에게 그를 그렇게 멸시하고 우습게 여길 자격 같은게 있었을까? 그저 나는 닫혀진 집단 안에서 그와 같이 멸시받을까봐, 내가 그와 동류의 취급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며 그 무리에 동참했던게 아마도 진실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젠 기억 속에서 서서히 얼굴이 흐려져간 훈련소 동기들 중 아직도 그의 얼굴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소주 한잔 같이 기울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잘못 했다고 나도 두려워서, 비겁해서 그랬다고 사과하고 싶다.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거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회사에서, 또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A들을 본다. 삶속에서 여전히 멸시받는 또 다른 고문관들을 본다. 이젠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란걸 알지만 여전히 나는 용기가 없어서, 두려워서 그들의 편에는 서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아직까지도 끈덕지게 나를 두렵게 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아직도 어떤 힘에 억눌려 스무살 무렵의 훈련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 빈티지 매니아 2015.09.02 1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후대디님
    고문관이란 말이 무슨 고급장교직책인줄 알 정도로 군대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데
    (그래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남편군대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ㅎ)
    지금껏 군대이야기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군대이야기였습니다.
    성장소설의 한 단락을 보는것 같습니다.
    A 와 그 반대편에 선 자들
    지금 대한민국은 그렇게 갈라지고 있는지는 아닌지요

    • 맞습니다 다만 그 차별이 이제는 집이 가난해서, 정해진 교육의 틀을 벗어나서, 시대를 잘못만나 기회를 못가져서, 갑이 아닌 을이라서같이 개인이 어쩔수 없는 사회 제도, 구조로 차별받는 세상이 된듯해서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 자금은 잘 살고 있겠죠?
    그때 누구 한사람이라도 손을 내밀었다면 서로가 괜찮았을텐데.. 참 여유없는 세상입니다. 지흐대디님은 그래도 대단하신 분이에요.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 ^^ 거긴 군대고..그중에서도 훈련소잖아요.. 군대에선 누구나 고문관이 될 수 있죠.. 아마 지금쯤은 잘 살고 있을 겁니다.. 다들 그래왔구요.. 그냥 기억하기 싫은 군대의 추억 정도로 여기고 살고 있을 겁니다.. 우연히 만나면 소주한잔으로 풀 수 있는 그런 추억일 겁니다.. 마음의 짐은 이제 내려 놓으세요..

  • 지후대디님의 됨됨이가 엿보이는 글이네요.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 볼트씨스펙 2016.07.21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배려심과 생각들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다고생각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남은 없는 남을 뜯어서라도 내 욕심만을 채우난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가 염증이 나는군요

  • 현실주의 2016.07.22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성적으로 보면 글쓴이님 말에 동감하나 현실은 다르지요. 현실은 냉정한것이고 냉정하지못하면 낙오되는게 현실입니다. 고문관 이라 불리는것들은 그냥 고문관일뿐입니다. 고문관이라 불리는것도 본인 잘못이며 못난것도 남들한테 우습게 보이는것도 본인 잘못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었기에 고문관이라 불리는거지요. 남을 배려한다는건 배려할수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할수있는 특권이며 여유입니다. 서로를 위하며 배려하며 살자 등등등 동화책소설같은 이야기는 동화일뿐이지요 현실은 냉정한겁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댓글에 동의 하지는 않겠지만 세상은 냉정한거이 현실이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잘하면 그만인것이지요.

  • 마이클장 2016.08.07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와글읽고오랜만에군대애기생각에
    소름이돋네요15년이지났지만
    생생한군대라는 두글자
    님글에공감을 얻네요

  • Korinem 2016.08.19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훈련소에서 동기애를 배우고 군생활의 첫 단추를 끼우는데 A라는 분의 마음이 어땠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저또한 전우조에 a같은 친구가 있었지만 가끔 짜증만 날뿐 고참 후임병 관계도 아닌 동기사이에 몸좀 힘들다고 고문관이라고 부른건 안타깝네요. 사람일은 모르거늘....... 여담이지만 제대한지 12년 됐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오는건 살가웠던 놈들이 아니라 a같은 후임 한명입니다. 이제는 세상일에 찌들고 계산적인 친구들보다 그노마 한명이 소중하네요

  • 행인 2016.09.12 0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십대 초반 청춘을 그런 곳에 억지로 가두는 게 원흉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정말 불합리한 부분은, 분노를 해야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는데
    인간이란 게 본디 근처에 있고, 만만한 대상에 분노를 하게 되죠.

  • 김끄덕이 2016.09.18 0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늦은 댓글이지만, 사실 저런 유형은 동작성지능이 낮은 사람입니다(저 포함). 사람의 지능은 언어성지능 동작성지능 2가지로 나뉘어있는데, 언어성지능은 누구나 알수있지만, 동작성지능이 낮은 사람은 겉보기엔 멀쩡한거 같에도 행동은 느리고 답답해서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한국 군대의 징병제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군대는 다들 단체생활 단체생활 그러는데, 사실 단체생활이 아니라 특수조직입니다. 이게 바로 징병제의 부작용이 낳았다고 볼수 있씁니다. 그래서 윤일병사건이 일어났고요. 저는 운이 좋게도 공익 떳지만 저도 현역갔으면 살아남지 못했을겁니다. 그러나 글쓴이님께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서 까지도 잊질 않으셔서, 이렇게 글쓰신 것만으로도 저는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 군인이될 2017.01.18 0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기초군사훈련 시절 고문관 동기생을 많이 무시했던 기억이 나네요.. 많이 부끄럽습니다 고작 훈련 하나 더 잘 받는다고 그 동기생을 무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많이 후회스럽네요 무시하기 전에 도움 한 번이라도 더 줄 걸 그랬습니다 이 글 보고 많이 반성하고 깨닫고 가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