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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카데시전투] 누가 이긴 전투 일까? (1)

-글머리에 -

이전 부터 한번 써보고 싶었던 역사에 관한 글을 한번 써보려 합니다.

우선 고대의 전쟁 기록 및 역사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며 기록에 따라 발생 년도나 병력수에 따른 견해들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글에서는 참조한 자료중에 제 기준에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자료와 연도로 표기하였고 필요한 경우는 병기 하였습니다.

또한 해당글은 역사 기록들외에 필자의 아마추어적인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소설 람세스에서는 소설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카데시 전투로 잡고 있습니다.

대학때 이소설을 읽고는 카데시 전투는 람세스의 군사적인 승리중 하나로 이 승리로 히타이트의 세력확장을 막고 카데시 조약을 통한 평화로운 치세를 이룩한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기원전 1275년경 레바논 북부 지역인 카데시에서 격돌했던 전투로 현재의 터키지역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던 히타이트와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오리엔트의 두 강대국이 패권을 두고 겨룬 전투 입니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전차를 타고 히타이트군을 무찌르고 있는 람세스2세

 

람세스2세는 신전들과 기념비를 통해 이 전투를 장쾌한 승리로 기록하고 남겼기 때문에 이집트의 승리로 보는 시각들이 많았지만 보가즈카이에서 발굴된 석판을 통해 히타이트의 상세한 전적보고서가 출토되어 히타이트의 시각에서 기록된 이문서에 따르면 적어도 람세스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사진출처 : http://unesco114.blog.me

보즈카이 히타이트 설형 문자가 기록된 석판

 

그럼 이 전쟁은 과연 누가 이긴 걸까요?

 

1. 전쟁전의 정세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xhrl?Redirect=Log&logNo=110023772851

기원전 13세기의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영역

 

히타이트는 하투사를 수도로 기원전 17세기 후반 현재의 터키지역에서 성립되어 점차 주변국들을 정복하고 경쟁자였던 미탄니를 굴복시켜 당시 가나안 까지 진출해있던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 하게 됩니다.

 

히타이트는 바빌론, 미탄니 등을 정복하고 그 세력이 성장하지만 실제로는 주변의 많은 소국과 정복한 미탄니도 지배령으로 완전히 포함하지는 못하고 친 히타이트 정권을 세워 본국과 위성국가들로 이루어진 국가 연합체 성격의 세력을 유지한 걸로 보입니다.

 

고대의 교통이나 통치력이 미치는 한계를 보았을때 아마 최선의 방법이었을 걸로 보이고 이지역은 사방이 열려 있어 수많은 세력의 흥망성쇄가 이어져 왔던 중근동으로 마찬가지로 속국들을 거느리고 있으나 후방에는 적이 거의 없는 이집트와는 다른 입장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터키와 시리아 지역의 주변국들에 패권을 가진 히타이트 제국에 가장 강력한 상대가 이집트였고 이지역의 패권을 가진 2개의 강국으로 서로를 인지 하고 있었음은 틀림 없습니다. 

 

당시 히타이트의 왕이었던 무와탈리스의 입장에서는 주변국의 반란이나 후방의 적 (당시 결국 히타이트를 멸망 시키는 앗시리아가 상승세로 성장 중이었습니다.) 들로 부터 안전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국경을 마주한 이집트가 현재의 시리아지역까지 재 진출해 오는 부분은 위성국들의 이탈을 막기위해서라도 차단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반대로 이집트의 람세스2세의 입장에서도 군사적으로 성장하여 이지역에 침투하고 있는 히타이트에게 침공을 당할지도 모르는 부분을 사전에 차단해야 하고 히타이트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강함을 보여서 주변의 속국들의 혹시나 있을 이탈도 막아야 합니다.

 

또한 즉위한지 오래되지 않은 파라오는 국민들에게 보여줄 군사적 업적이 필요합니다.

이런 업적은 항상 모든 세습 군주들에게 필요한 부분입니다.

에를 들어 아버지가 탈환하지 못한 영토를 탈환하는 것과 같은 후세에 남길 만한 업적이지요.

 

이와 같이 두 강대국의 군주에게는 서로에게 군사적으로 우위를 보여줄 의미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만큼 상대를 완전히 정복하는 장기적인 총력전을 치룰 의도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카데시 전투의 경과와 그 이후의 맺어진 조약의 내용 때문 입니다.

 

즉 서로가 매운 맛을 보여주고 약간이라도 우위를 가지고 공존을 하려했던게 애초의 두군주의 본심들이 아닐까요?

 

카데시 전투 이후 두 군주들은 반란을 일으킨 속국들이나 후방의 적에 대한 안전보장에 더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와탈리스는 시리아 소국들과 북부의 카스카족에게, 성장중인 앗시리아에, 람세스는 에돔, 모아브, 네게브를 정벌하고 리비아인들의 퇴치에 눈을 돌립니다.

 

결국 이 매운맛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움직인 것은 파라오 람세스2세 입니다.

 

발단은 원래 히타이트의 속국이었던 아무르가 이집트의 속국으로 말을 갈아탔고 이에 무와탈리스는 이를 응징하려 합니다. 람세스 2세는 이 기회에 히타이트와 정면승부를 결심합니다.

 

기원전 1275년경 (또는 1288/1286)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오늘날의 레바논 북부지역인 카데시로 진격하여 히타이트제국과의 일전에 나섭니다.

당시에 그는 거의 5000여대에 달하는 강력한 전차부대와 4개 보병사단으로  2만5천명의 병력을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또는 전차 2500대(전차병 5000), 보병 2만명의 2만 5천명)

이에 응해 히타이트도 전차 3500대와 히타이트와 동맹국 보병을 합쳐 3만5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 하였습니다.

 

고대에 이정도의 병력을 동원 할 수 있는 국가는 당시에는 이 두국가가 유일하리라 생각됩니다.

 

-본격적인 전투의 추이는 다음글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참조자료: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Ancient Egyptian Literature

The Armies Kadesh

네이버 오픈백과 -히타이트, 카데쉬 전투 항목-

네이버 캐스트

브리태니커 백과 - 카데쉬전투-

위키피디아 카데시전투

시저의 AMCIENT HISTORY 블로그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블로그

 

다음글 :

[카데시전투] 누가 이긴 전투 일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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