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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tory of Kings

[카데시전투] 누가 이긴 전투 일까? (3) -끝-

-글머리에 -


이전 부터 한번 써보고 싶었던 역사에 관한 글을 한번 써보려 합니다.

우선 고대의 전쟁 기록 및 역사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며 기록에 따라 발생 년도나 병력수에 따른 견해들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글에서는 참조한 자료중에 제 기준에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자료와 연도로 표기하였고 필요한 경우는 병기 하였습니다.

또한 해당글은 역사 기록들외에 필자의 아마추어적인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3. 평화조약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평화 조약은 전투 직후 맺어지지 않았으며 조약의 대상은 전투에 참여 했던 무와탈리스도 아니었습니다.

 

 

카데시전투

<조약문이 새겨진 히타이트의 석판>

 

애초에 무와탈리스의 목표는 이집트정복은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도 지리적으로 멀리떨어진 이집트는 설령 일시적으로 정복이 가능했더라도 장기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으리라 보입니다. 이는 바빌론을 점령하고도 물러나왔던 히타이트의 역사를 보면 당시에 군사력의 투사거리 및 이동수단과 정치력이 미치는 한계가 어느정도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그는 카데시를 구하고 말을 갈아탄 아무르를 응징하여 속국들이 이집트 쪽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고 운이 좋으면 이집트의 파라오를 사로잡거나 전사시켜 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패권을 확립하는 정도가 목표였던것 같습니다.

이는 그가 전투에 신중하게 병력을 투입하고 후반에 이집트의 원군이 도착하자 추가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전투를 확전시키지 않을 걸로 보아서도 분명해 합니다.

 

반대로 람세스 역시 히타이트 정복을 카데시 전투 당시에 전략 목표로 두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그 역시 히타이트군 도착전에 카데시를 점령하여 이집트 쪽으로 말을 갈아탄 아무르를 보호하고 히타이트에 본떼를 보여줌으로써 해당 지역의 약소국들을 이집트쪽으로 돌아서게 하려 했었지 않나 합니다.

 

강대하면서 비슷한 힘을 가진 두 국가의 가진게 많은 지배자들이, 서로를 완전히 끝장내려면 본인도 많은것을 걸거나 잃어야 하는 걸 알게된 현실적인 지배자들이었다면 국지전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뒤 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을까요?

 

이후에 람세스는 힘을 회복하자 본인이 직접 3회이상 출병하여 히타이트를 꾸준히 괴롭혔던것 같습니다.

이는 국내의 권력 다툼과 아시리아와 같이 성장하는 적대세력, 히타이트 멸망의 원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해양민족의 칩입이나 속국들의 반란등에 시달리는 히타이트에게 압박을 주었고 이집트로서도 전쟁에 투입되는 많은 인적/물적 군사적인 비용을 생각하면 끝장내지 못할 상대와 영원히 주고 받는 전쟁을 치루고 싶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실제로 평화 조약은 16년 후 조카에게 승리하여 왕위를 차지한 무와탈리스의 동생인 하투실리와 맺어졌으며 하투실리는 찬탈이었던 만큼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내부의 불만 세력과 성장하는 앗시리아 등을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이 필요했을 듯 합니다.

 

 

카데시전투

<터키 히타이트 하투사 유적>

 

해당 조약에 대해 네이버 오픈 백과의 내용을 발췌합니다.

 

"1906년에 베르린 대학과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 공동 발굴팀은 터키의 보가즈코이(Bogazk?y)에서 히타이트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발굴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이 판은 기원전 1270년,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핫투시리 3세(Hattushili Ⅲ)가 맺은 평화협정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협정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천 년 이상이나 경과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협정이 맺어지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놀랍게도 이 협정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협정의 이름은 ‘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핫투시리 사이에, 좋은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핫투시리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힛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으로 히타이트의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 "

 

이 조약으로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오랜 평화의 시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투를 치루던 적국에서 서로의 지배층이 방문이 가능해질 정도의 우호국이 된 셈입니다.

특히 람세스는 67년의 제위기간 중 반세기에 가까운 후반기는 이집트에 전쟁이 없는 평화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카데시 전투는 누가 이긴 전투 일까요?

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서로 이겼다고 주장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투의 승패는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굳이 승패가 필요하다면 히타이트에 약간 유리한 형태로 비겼다고 해둘까요?)

 

진정한 승리자들은 고대에 이와 같은 조약을 이끌어낸 람세스와 하투실리 그리고 각국의 외교관들이라고 봅니다.

 

이들은 끝없는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 수도 있는 국가들 사이에 성공적으로 평화조약을 이끌어 내어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되는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됩니다.

현대에도 평화를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얼마전의 이스라엘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보복공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기원전의 두 강대국의 전투기록 보다도 그 평화 협정내용과 두 국가가 이루어낸 평화가 주목 받는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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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전투] 누가 이긴 전투 일까? <2>

[카데시전투] 누가 이긴 전투 일까? <1>

 

참조자료: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Ancient Egyptian Literature

The Armies Kadesh

네이버 오픈백과 -히타이트, 카데쉬 전투 항목-

네이버 캐스트

브리태니커 백과 - 카데쉬전투-

위키피디아 카데시전투

시저의 AMCIENT HISTORY 블로그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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