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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조선시대 실제 왕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궁궐

창덕궁은 태종 5년 (1405)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입니다. 경복궁 동쪽에 위치해서 이어진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지만 광해군 때 다시 지어졌습니다. 고종대에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정궁 역할을 해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기거한 궁궐이었습니다.

 

태종이 경복궁을 두고 이곳을 지은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경복궁이 왕자의 난으로 자신이 피를 뿌린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고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싫어했다고도 하고 자신과는 정적이었던 정도전이 설계한 곳이라 싫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태종 자신이 풍수지리적 관점으로 경복궁은 산이 가두고 물이 말라 임금을 사로잡고 겨레붙이를 없애는(실제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과 정확히 일치한다) 궁이라는 말을 했다고 중신 하륜의 말을 빌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종실록 14년 6월 28일 자) 

 

다만 태종의 아들인 세종은 경복궁을 좋아해서 이곳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구획의 정확함이나 정도전의 이론에 기반한 설계, 위엄과 장엄함 등이 어쩐지 세종대왕과는 잘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왕권을 잡기 위해서 피를 뿌린 것으로 공통점을 가진 태종과 세조가 경복궁은 공통적으로 싫어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아무래도 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긴장감을 풀어주기에는 딱딱한 경복궁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진 구조를 가진 창덕궁이 더 적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왕실 일가들을 편히 모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성종대에 바로 옆에 이어서 지어졌으며 지금도 문 하나만 통과하면 창경궁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보통 그래서 궁궐을 들린다고 하면 창덕궁과 창경궁은 같이 관람하라고 하는데 만약 후원 관람을 예약하지 않으셨다면 두 궁궐을 같이 돌아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예약으로만 운영하는 후원 관람을 예약했다면 후원 관람은 꽤 많이 걸어야 하는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다 돌기에는 제 비루한 체력으로는 무리여서 창경궁은 2주 전쯤에 따로 돌아보고 왔습니다.

 

 

 

창경궁의 가을 단풍 구경

서울시에 대표적인 궁궐이 많은데 제가 가본 곳은 경복궁과 덕수궁뿐이었습니다. 최근 창경궁의 단풍이 워낙 아름답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아들과 함께 창경궁을 들러보았습니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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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조선시대의 한양은 커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벽도시이고 이 안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종묘 등 조선왕실의 주요한 궁궐들이 위치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이 위치가 이른바 사대문 안이됩니다.

 

이미 조선 시대에도 서울이 확대되면서 사대문 밖에도 거주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정약용(1762~1863)이 자녀들에게 한말과 같이 사대문 안은 조선시대의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 사대문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진다." 

 

조선의 수도 한양 지도. 각 궁궐들 위치
조선시대 한양의 지도

사설이 길었습니다. 저는 창덕궁을 돈화문을 통해서 입장했습니다. 창경궁을 관람하고 함양 문을 통해서도 입장이 가능합니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돈화문

돈화문을 통해서 창덕궁에 입장하는 경우 교통카드나 신용카드를 바로 입장 기기에 대고 입장하는 게 가능합니다. 따로 표를 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창경궁을 같이 관람하는 통합권이라면 반드시 종이 입장권을 가지고 있으셔야 합니다. 저는 후원 관람을 인터넷 예매했고 모바일 입장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로 신용 카드를 찍고 입장했습니다. 

 

창덕궁 입장
창덕궁 회화나무

창덕궁 돈화문으로 입장하면 가장 먼저 회화나무를 보게 됩니다.

위의 안내문을 요약해 옮기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 천연기념물

돈화문 안마당에 있는 8그루 회화나무는 모두 천연기념물입니다. 높이가 15~16m 이상이고 수령이 300~400년으로 추정됩니다. 183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로 추정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사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공간이고 이는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돈화문 주변 회화나무

여담으로 창덕이라는 의미는 창이란 성대함이고, 덕이란 도를 뜻하는 것으로 "덕을 밝혀 창성해진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창덕궁 경내 안내도
창덕궁 경사로 관람동선
창덕궁 세계유산

입장하고 조금 걸어 들어가면 정면에는 창덕궁 세계유산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아래에 옮겨봅니다.

 

창덕궁(昌德宮) 세계유산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이란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하여 보호하여야 할 문화유산을 말하는데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중 8년(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립한 창덕궁은 조선시대 전통적인 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으로 손꼽힌다.

 

진선문
진선문

멀리 진선문이 보입니다. 진선이라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올린다는 뜻으로 왕이 있는 정전의 영역에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영조 때 이곳에는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금천교
금천교

이미 창경궁에서 보셨듯 이곳에도 금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금천교라는 다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궐내 각사

진선문으로 들어 가기 전에 왼편을 보니 궐내각사가 보입니다. 많은 건물들이 모여 미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궐내각사 안내문

안내문 글을 옮겨 봅니다.

 

궐내각사(闕內各司)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라 부른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는 예문관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 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궐내각사
궐내각사
궐내각사
궐내각사
궐내각사
궐내각사

궐내각사를 둘러본 다음 진선문을 통과하니 왼편으로 인정전으로 향하는 인정문이 보입니다. 다른 궁궐들이 정문에서 정전까지 쭉 뻗은 구조라면 창덕궁은 특이하게도 돈화문에서도 90도로 꺾어서 금천교를 건너야 하고 또 인정문을 들어서서 90도를 돌아야 정전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인정문

다른 궁궐에서 보셨듯 삼도가 있습니다. 가운데가 임금이 지나가는 어도, 양쪽이 신하가 지나가는 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정문

인정문을 들어서면 인정전 일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랫동안 정궁이라 그런지 창경궁이나 경운궁에 비해 건물들이 더 크고 멋진 느낌이 강합니다. 

 

인정문 위 잡상
인정전
인정전

제가 이전에 방문했던 궁궐들 중에서 경복궁은 정전은 2층이었지만 그 외의 창경궁이나 경운궁(덕수궁)의 정전들은 다 단층이었는데 비하면 2층으로 된 큰 정전이 이곳이 오랫동안 정궁이었다는 위엄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특이하게도 외관에 황색이 많이 사용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외관의 황색은 궁금해서 찾아보니 순종황제가 1908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하였는데 창호를 황제의 상징인 황색으로 칠하고 바닥에는 서양식 마루를 깔고, 유리창문 및 커튼 그리고 전등도 설치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정전 안에 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정전
인정전 주변 파노라마
인정전 주변 파노라마 촬영
품계석
품계석
인정전 경내
인정전 내부

앞서 언급하였듯 순종대에 일부 개조를 해서 정전 내부에 서양식으로 전등과 커튼 등이 설치된 모습이 보입니다.

 

인정전

인정전 뒤편으로 보이는 청색 기와는 선정전으로 임금의 공식 집무실로 쓰이던 곳입니다. 

 

인정전
선정문

인정전을 나오면 바로 옆에 선정문을 보게 됩니다.

 

선정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 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선정전은 한때 혼전(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때의 흔적이다.

 

선정전
선정전
선정전 내부 파노라마
선정전 내부 파노라마 사진

선정전의 지붕은 청색 기와인데 이 청기와는 아라비아의 푸른 안료와 중국의 기술을 이용한 비싼 건축 재료라고 합니다. 연산군은 인정전을 모두 청기와로 덮으려 했으나 이듬해 반정으로 쫓겨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광해군 역시 청기와 때문에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니 왕도 마음대로 사치를 부릴 수 없었던 조선 왕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정당
희정당

원래는 침전이었으나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는 왕의 집무 공간인 희정당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왕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으로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여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동궐도"에 그려진 여러 개의 돌기둥 위해 세운 아담한 집에 연못이 있는 모습이었다면 현재의 희정당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다른데 이는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라 합니다. 

 

희정당
희정당
휴게시설

희정당 맞은편에 커피를 마시거나 기념품을 살 수 있는 휴게시설이 있습니다.

 

인정전

커피는 아니지만 음료 한잔을 마시며 바라보니 멀리 인정전이 우뚝 솟아 보이는군요. 큰 고층 건물이 없던 조선시대라면 멀리서도 이 인정전이 보였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휴게시설에서 내다본 선정전, 희정당 주변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는데 도자기류, 특히 찻잔은 꽤 탐이 나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만 좀 지나치게 비싼 편입니다. 역시 관광지 물가랄까요?

 

낙선재

후원으로 가기 위해 희정당을 지나 올라가려다 보면 조금 떨어진 곳에 낙선재가 보입니다. 사실 이곳은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붙어 있는 공간으로 뒤편의 정자와 한정당까지 모두 묶어서 일반적으로 낙선재라 부르지만 사실 여러 채의 다른 건물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낙선재 일원 안내도
낙선재 안내문

안내문의 내용을 아래에 옮겨봅니다.

 

낙선재(樂善齋) 일원

낙선재는 왕의 서재 겸 사랑채이다. 헌종은 자신과 효정 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자 19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면서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를 지었다. 이듬해에는 석복헌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다. 석복헌은 경빈의 생활공간이었으며, 수강재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왕실 어른으로 정사를 돌본 순원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입히지 않아 외형이 소박하며, 외국 문물에 대한 왕의 기호를 반영하듯 낙선재의 창살 무늬와 상량 정의 건축 양식 등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 낙선재의 현판 글씨는 청나라의 문인 섭지선의 글씨이며,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낙선재

이곳의 건물들에서는 소박함 속에서 기품과 아름다움이 느껴졌습니다. 쉽게 말하면 단아하고 기품 있지만 그 속에 아름다움도 지닌 한옥 건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달까요?

 

이곳의 석복헌에는 순종의 비 순정효 왕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습니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1989년 열흘 간격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 창덕궁 낙선재로 환궁(1960)
낙선재에서 덕해옹주와 이방자 여사
장락문

낙선재 출입문 장락문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낙선재
낙선재
낙선재
낙선재
낙선재
낙선재

청나라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는 헌종의 취향 때문인지 중국식 문도 보입니다. 이곳에서 봄이나 가을날 책 한 권 읽는다면 너무 여유롭고 힐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낙선재
석복헌
낙선재 일원
낙선재 일원
낙선재 일원
낙성재 일원
낙성재 주변

낙선재 앞에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이미 잎과 감이 거의 다 떨어졌지만 그래도 늦가을, 초 겨울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줍니다. 다른 분이 담은 사진을 보면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입니다.

 

낙선재 일원

낙선재를 둘러본 감상은 단청도 없이 소박한 느낌을 주려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정말 아름다운 한옥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의 가족이나 권력자가 머무는 한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되면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다는 운현궁에도 한번 들려봐야겠습니다.

 

미처 사진을 담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안내문만 옮겨 봅니다.

 

성정각(誠正閣) 일원

 

현재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에 큰 건물인 중희당이 있었고,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동궁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육각 누각인 삼삼 와, 그 옆의 칠분서 그리고 승화루는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였으며, 단층의 몸채에 중층의 날개채가 직각으로 붙은 독특한 모습이다. 

 

창덕궁을 둘러본 소감은 이전에 본 경복궁이 직선으로 넓은 지역이 구획되어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끼고 자연과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세워져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곳 후원 관람까지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왜 조선시대 왕들이 이곳을 경복궁에 비해서 좋아했는지 알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창덕궁의 비원인 후원 관람을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조선시대 궁궐의 비원,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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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덕수궁과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중화전을 돌아보며

오랜만에 화창한 봄날 아들과 덕수궁을 찾았습니다. 복원된 석조전 내부 관람이 인상적이었고 궁 주변 산책도 봄낭의 정취가 느껴지는 외출이 된 것 같습니다. 이전 주에 문화재청 덕수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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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
오랜만에 글이 다음 메인 한켠에 실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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