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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가을 단풍 구경

서울시에 대표적인 궁궐이 많은데 제가 가본 곳은 경복궁과 덕수궁뿐이었습니다. 최근 창경궁의 단풍이 워낙 아름답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아들과 함께 창경궁을 들러보았습니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총 5개의 궁궐이 있으며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 중요시되었던 장소입니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매우 가까이 인접해 있고 종묘도 가까이 있어서 만약 창경궁을 둘러보신다면 가신 김에 시간을 할애해서 창덕궁과 종묘도 같이 돌아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입니다.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여 양궐 체제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쳐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며 창덕궁 경내가 좁아지자 성종이 왕실의 어른들인 정희왕후(세조), 안순왕후(예종), 소혜왕후(덕종) 세분의 대비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옆에 마련한 것의 창경궁이었습니다.

 

창경궁 춘당지
창경궁 춘당지

창경궁은 애초에 궁궐의 역할보다 생활공간 확장의 목적으로 세워졌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살았던 수강궁을 확장하여 지어져서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우선이었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입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일어난 장소가 바로 창경궁이기도 합니다.

 

창경궁 월근문
창경궁 외각 월근문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광해군이 1616년 중건하였습니다. 이후 1830년 순조대에 화재로 내전 일대가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고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온 때와 같이 일제에 의해 전각들을 허물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는 1909년에는 일반에 창경원으로 개방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추정됩니다.

 

위 사진의 월근문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당 경모궁을 참배할 때 번거롭지 않도록 홍화문 북쪽 담당을 허물고 만든 문이라는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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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조선의 22대 왕, 즉위까지의 험난한 길 -1-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22대 왕이된 이는 정조(이산, 李祘) 입니다. 원래의 휘호는 정종이었지만 후에 정조로 바뀌었습니다.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사사된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2년 10월 28일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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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돌담길
창경궁 돌담길

해방 후에도 한동안 창경원으로 식물원과 동물원으로 이용되다가 1983년 12월 31일 자로 공개관람을 중지하고 복구 작업을 시각 하여 1986년 8월 23일 창경궁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종묘와의 연결로를 90년 만에 복원하는 사업을 완료하였습니다. (2022년 7월 22일)  

 

일본은 풍수지리상 북한산의 기운이 흐르는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음으로써 조선의 국운도 함께 꺾고자 시도를 했었습니다.  본래 하나의 숲으로 이어져 있었던 창경궁과 종묘는 1932년 이후 종묘 관통도로(율곡로) 개통으로 인해 단절되어 있었고 창경궁 또한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위상이 격하되었습니다.

 

복원 사업으로 창경궁과 종묘 간 340m 길이의 사잇길인 궁궐 담장길은 역사 공간으로 되살려졌고 율곡로는 터널로 지하화 되었습니다.

 

창경궁 돌담길

화창한 날씨에 창경궁을 아들과 함께 방문했는데 11월 초의 날씨에 단풍이 절경이었습니다. 담벼락 밖에서도 창경궁 안의 화려한 단풍이 보였습니다. 오후에는 비가 많이 와서 단풍들이 많이 떨어졌을걸 생각하면 정말 절묘한 시점에 방문한 것 같습니다.

 

창경궁 돌담길

 

창경궁 담당 밖에서도 보이는 단풍

 

창경궁 매표소

창경궁은 09시부터 20시까지 입장이 가능합니다. 함양 문에서 창덕궁과 연계관람인 경우는 일반적으로 17시까지 이며 해가 길어지는 6월에서 8월은 17시 30분까지 11월에서 1월은 16시 30분으로 매표시간이 조정됩니다.

관람요금은 내국인은 1,000원으로 만 25세에서 64세까지만 요금을 받습니다. 외국인의 경우는 19세~64세까지가 1,000원만 7세에서 18세까지는 500원이 관람료입니다.

 

저와 아들은 창경궁만 둘러볼 생각으로 홍화문 앞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고 입장했습니다. 창덕궁은 후원 예약을 시도해보고 가능할 때 들러보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화문
홍화문 앞

 

창경궁 이정표

 

창경궁

홍화문을 통해 입장하면 창경궁에 대한 설명과 배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설명문을 옮기면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통현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서 동궐이라 하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궁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중략-

임진왜란(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들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중략-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창경궁 위치도

 

창경궁 단풍

보통 옥천교에서 명정문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크게 도는 분들이 많아서 저와 아들도 그쪽 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춘당지까지 가는 길에 단풍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11월 초 창경궁 단풍

 

창경궁 단풍

 

창경궁 단풍

 

창경궁 인물사진

 

창경궁 단풍

 

창경궁 인물사진

붉은색과 노란색의 단풍들이 어우러져 이날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물려 인물 촬영을 나온 분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화려한 단풍을 배경으로 아웃포커스해 인물 사진을 담는다면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경궁 단풍

 

창경궁 단풍

 

창경궁 단풍

 

창경궁 단풍

단풍이 절정에 오른 이 길을 걸어가면 춘당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현재의 소 춘당지)였습니다.

 

소 춘당지 위치

지금의 춘당지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 농포"라는 논을 일제가 파헤쳐 큰 연못으로 만들었고 1983년 이후에 전통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입니다.

 

창경궁 춘당지

춘당지의 아름다움은 가을날 단풍과 어우러지면서 호수의 아름다움이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창경궁 춘당지

 

창경궁 춘당지

백송이라는 나무도 길가에 있었는데 실제로 보면 정말 특이한 나무입니다. 나무줄기에 마치 분칠을 해 놓은 듯 지나치게 하얀 나무의 껍질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창경궁 백송

 

백송 설명문

백송

"백송은 나무껍질이 하얗고 껍질 조각이 오래되면 저절로 떨어지는 특징이 있으며 잎은 3개씩 모여 난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인 희귀한 나무로 조선 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싶었다. 현재는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창경궁 단풍

춘당지를 지나 더 위로 올라가면 대온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창경궁 단풍

대온실 앞 춘당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과 촬영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날 못 찍었으면 오후에 내린 비로 단풍이 많이 졌을 테니 이분들도 타이밍이 절묘했네요...

 

창경궁 대온실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입니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였던 철과 유리로 지은 대온실의 외관은 고풍스러운 목조 전각이 대부분인 궁궐 안에서 매우 이색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일제가 불순한 의도로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기 위해 훼손한 창경궁의 일면을 대표하는 건물이지만 건축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를 지닌 근대의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보니 근대문화유산의 의미로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 춘당지

평소에 많이 걷지 않다 보니 조금 걸었는데도 가을 햇살에 살짝 땀이 납니다. 춘당지로 내리쬐는 햇빛이 만들어내는 빛 망울들과 단풍들이 어우러져 잠시 주저 않아 경치 구경을 했습니다.

 

창경궁 단풍

 

창경궁 춘당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춘당지를 크게 돌아서 내전 터 일원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창경궁 단풍

 

창경궁 춘당지

 

창경궁 단풍

 

창경궁 내전 터 일원

내전 터 일원 (Inner Palace Site Area)

"앞에 보이는 숲 일대는 궁궐 여성들의 처소로 가득했던 생활구역이었다. 그 가운데 요화당과 취요현은 효종이 공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며, 통화전은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어린 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들도 섞여 있었으나, 1830년에 일어난 화재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다"

 

실제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내전 터 일원

음료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어 따가운 햇살과 걷느라 목이 살짝 말랐었기에 이곳에서 잠시 목을 축였습니다.

 

창경궁 풍기대

다시 힘을 내어 이동하니 집복헌과 명춘헌이 보입니다. 

 

창경궁 일대에 후궁들의 처소중 유일하게 남은 건물들인데 영춘헌은 정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태어난 건물 앞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해서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고 통영전에 있는 대비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집복헌에서는 순조가 태어나고 돌잔치를 거행한 곳입니다.

 

 

창경궁 양화당
양화당

양화당은 창경궁의 침소이며 통영전의 동쪽에 있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1833년 복구 때 순조가 직접 썼다고 합니다. 창경궁 창건 때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도 무사하게 살아남은 건물입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가 주로 이곳에 머물며 지냈다고 합니다. 1790년 통영전 화재에도 불타지 않아서 정조와 신하들이 신기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1830년 순조 때의 화재에서는 이를 피해 가지 못하고 불에 탔다고 합니다. 1833년에 복구되었고 철종의 왕비 명순대비가 여기서 승하하였다고 합니다.

 

창경궁 함인정
함인정

창경궁 안의 정자인 함인정은 1633년 인조에 의해 이전 건물을 허물고 동일한 이름으로 지어졌고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안 좋았을 때 사도세자가 영조의 일방적인 비난에 분노하다가 실수로 동궁 건물 중 하나였던 낙선당을 불태운 사건이 있었는습니다. 이때 영조는 사도세자의 방화를 알고 함인정으로 신하들을 모이게 한 다음 사도세자를 불러 그 앞에서 호되게 질책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때 분노한 사도세자가 저승 전 앞 뜰의 우물에 뛰어들었으나 경악한 신하들과 나인들이 가까스로 구해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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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나? -1-

22번째 왕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 입니다. 왕 이야기는 최근 인조를 시작으로 영조와 러시아의 이반 뇌제까지 아들을 죽여야 했던 왕들을 작은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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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이용한 왕은 영조였고 조선왕조실로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명장전 내부
명정전 일원

마지막 경로로 명정전으로 향했습니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한 1616년 이후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습니다. 궁궐의 정전으로는 작은 규모인데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장전 일원
명정전
명장전 일원

 

명장전 일원

 

명장전 주변
명정전

 

명장전 일원

 

명장전 일원

 

명장전과 주변 문정전, 숭문당
명정전 일원 파노라마

 

명정문 잡상

명정문은 현재 보수 중이라 사진을 담지 못했는데 지붕의 잡상이 눈에 띄어 담아 보았습니다.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놓이는 토우인 잡상은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10 신으로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을 막기 위해 놓는다고 합니다.

 

10 신은 서유기에 나오는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 등 토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창경궁 옥천교

명정전을 나서서 보게 되는 옥천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질러  있습니다. 궁궐의 다리에 맞게 양식과 조각이 아름다워 이 다리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성종 대인 1483년 인 것으로 여겨진다.

 

홍화문 단청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 1484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8년 1616년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단청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홍화문 단청

 

홍화문 단청

 

창경궁 담벽

다시 홍화문을 나섰습니다.

 

창경궁 돌담

창경궁 돌담길을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궁이 창경원으로 남아있지 않고 복원되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묘와의 연결로와 같이 복원이 좀 더 활발하게 되길 바라며 다음에 창덕궁과 함께 한번 더 찾아야겠다고 계획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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