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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경운궁)을 아들과 함께 둘러보다.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덕수궁(德壽宮)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입니다. 덕수궁은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이었던 자리를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에서의 몽진에서 돌아온 후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으로 삼았던 곳입니다.

 

장소가 협소하여 주변의 계림군의 집을 포함하여 개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선조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뒤 죽을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을 보수하여 거처를 옮긴 후에는 이곳은 경운궁이란 이름의 행궁으로 남습니다.


>이후 이곳은 인목대비를 유폐한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인조반정 당시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쇠락을 거듭하듯 경운궁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했던 아관파천 당시에 왕가의 일원들은 러시아 공사관과 가까운 이곳 경운궁으로 옮겨와 머물렀습니다.

 

덕수궁(경운궁)

 

고종은 이후 이곳 경운궁에 머물면서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정궁이 되었습니다. 후에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면서 이곳에 거처하였기에 덕수궁으로 이름을 고칩니다.

 

그 출발이 개인저택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궁궐터 중 가장 협소한 편이며 전각의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고종이 이곳에 머물렀던 이유가 왕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여 여차하면 주변의 외국의 공사관들로 피신하기 쉽기 때문이었다니 역사의 아품이 느껴지는 이야기 입니다.

 

서울 근교에 살면서 서울로 출 퇴근 한지가 벌써 10년이 넘었고 이제는 부산의 지인들로 부터도 어색해진 말투로 배신자 취급도 당하지만 그 동안 무엇이 그리 바뻤던지 서울에 있는 궁궐터 등을 한번도 구경해본적이 없는 듯 합니다. 회사 지인의 결혼식이 근처에 있어서 간김에 아들과 함께 들러보고 구경을 하고 왔습니다.

 

아직 어려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 해줘도 잘 모르겠지만 혹시 커서 이 블로그를 본다면 하는 마음으로 경운궁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 보려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서울 시청 바로 맞은편에 덕수궁이 있었습니다. 시청 뒤편으로 새로 지은 독특한 모양새의 신 청사 건물이 보입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의 출입구면서 매표소가 있는 대한문(大漢門) 앞 입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인파가 많았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대한문은 1906년 원래의 대안문(大安門) 을 수리한 이후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궁궐을 지키던 수문장들의 교대식을 재연하고 있어서 볼거리를 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가운데 서 계신 분은 정말 미동도 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인형이 아닐까 하고 착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양쪽의 두분은 확실히 경력이 조금 부족한 분들인지 조금씩 움직임이 있더군요

 

덕수궁(경운궁)

간혹 엉뚱한 초점을 잡는 카메라 EOS M 입니다. 분명 아들 얼굴에 초점을 두었건만 10장중 1장꼴로 이런식으로 뒤쪽에 초점이 잡히면서 핀이 나가 버립니다. 

 

덕수궁(경운궁)

이 아저씨들은 왜 안 움직이지? 아들 녀석이 가까이 가서 손가락으로 찔러 보려는걸 말려야 했습니다. 어쨌든 그리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에 서둘러 입장 하였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대한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오른편에 있는 함녕전 입니다. 1897년 창건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것을 화재 직후에 중건한 전각입니다. 덕수궁의 대부분 건물들이 이처럼 1904년 일제가 고의로 저질렀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대화재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중건된 건물들이 대부분 입니다. 고종도 거처를 했었고 후에는 순종이 이곳에 거처하다가 승하한 곳 입니다.

 

덕수궁(경운궁)

개인적으로는 왕이 머물던 거처로는 조금 소박하고 수수한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함녕전(咸寧殿) 이라는 글짜가 보이시나요? 조선 시대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답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을 왼쪽으로 돌아나오면 중앙에 있는 중화전(中和殿)의 뒤편이 보입니다. 1902년 창건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후 단층건물로 중건 되었다고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중화전의 북쪽은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등의 건물들이 있습니다.

 

 

덕수궁(경운궁)

중화전의 덕수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 입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중화전 정면에서 보이는 문이 중화문입니다. 어쩐지 이곳에 서 보니 옛 왕들이 늘어선 신하들에게 조례를 받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중화전 뒤에는 석어당이 있습니다. 이곳은 앞서 이야기 했던 선조가 임진왜란 후 돌아와 머물렀던 어소 입니다. 이역시 1904년 화재로 불탄 자리에 중건한 건물입니다.

 

덕수궁(경운궁)

즉조당은 임금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며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 당시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를 했다고 합니다. 

 

관련 글

광해군 현대에 재평가 받은 왕, 왕 이야기 16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 안에는 독특하게도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있습니다. 바로 대한제국의 정궁이라 할수 있는 건물입니다. 1910년에 완공된 르네상스풍의 이 건물은 당시 공사비 130만원이 투입되었는데 잘 아시다시피 완공 시기가 이미 대한제국의 말미이며 1910년은 바로 국권을 잃은 치욕을 당한 해입니다. 고종은 잠시동안 이곳을 몇 차례 이용했다고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는 동관은 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던 역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아쉽게도 석조전 내부는 공개 준비중으로 올해 10월부터 관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미술관으로 쓰이는 동관앞에는 조금은 생뚱맞게 서양식 정원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맞은편의 전통적인 양식의 중화전과 서양식 석조전의 정원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현대의 빌딩이 흘러간 역사의 흐름이 주는 대비를 보여주는듯 해서 묘한 감상에 빠졌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원래 1~2시간만 둘러볼 계획이었는지라 서둘러 나왔더니 그 사이에 수문장 교대식 재연이 있었나 봅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더운 날씨에 고생들이 많으시더군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이벤트 같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덕수궁(경운궁)

가수 이문세의 노래중에 광화문 연가에 가사중에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이라는 부분에서 항상 이미지로만 떠올리던 덕수궁 돌담길에 와보았습니다. 그 주변을 늘 여러번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자주 다니면서도 왜 이제야 와 보았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평생 와 보지 않았을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덕수궁(경운궁)

덕수궁 돌담길 사진에는 이런 구도의 사진이 많더군요 저도 한번 찍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짧은 덕수궁 방문이 끝났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낮잠잘 타이밍이라 아들이 지하철 타자마자 곯아 떨어짐) 나중에 딸과 가족과 함께와서 찬찬히 둘러보고 역사 이야기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노랫말로 뇌리에 이미지로 남아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2시간 짜리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나의, 우리의 소중한 추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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