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 Story of Kings

이반뇌제, 아들을 죽인 비극적인 광기 -2-

지난 이야기에 이반4세, 즉 이반 뇌제가 차르로 즉위하는데 까지를 다루었습니다.


다소 과격하고 화가나면 폭력을 일삼기도 하던 이반 뇌제의 인격적인 문제는 앞서도 서술했던 어린시절의 보야르들의 학대에서 비롯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사랑하는 황후인 아나스타샤 앞에서는 그럭저럭 평온함을 유지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전반기의 정치들은 나무랄데 없는 명군의 정치였는데 그의 정치가 뇌제로 번역되는 그로즈리라 불리게 되는 잔혹함으로 변하게 된 시점이 황후의 죽음 이후이기도 하기때문에 많은 사료들이 그녀의 존재가 이반 4세의 광증을 억제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반 4세 아들을 죽이다. 일리아 레핀 작

 

주변에도 젊은 시절 못말리던 성깔(?)을 자랑하던 분들중에서도 현명한 아내를 만나 흔히 어르신들이 말하는 사람구실을 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물론 끝까지 아닌 경우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명군으로써의 전반기

 

차르로 즉위한 이반 4세는 우선 자신의 측근으로 선출회의란 기구를 만들어 보야르들의 두마(귀족의회)에 대항세력으로 삼았으며 전국회의(잼스키소보르)를 소집하여 귀족, 성직자, 상인과 도시 자유민 등 여러 신분의 대표들 앞에서 어린시절 자행된 보야들의 만행과 그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였습니다. 결국 보야르들은 이 젊은 차르에게 굴복하였고 이반 4세는 보야르들의 힘을 한풀 꺽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지방의 자치권을 중앙에 귀속시키고 상비군을 창설하였으며 사법권에 지방의 하층 귀족과 자유민을 참여케 하는 등, 보야르들의 권력을 꺽고 왕권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위한 정책을 연달아 내놓으며 절대군주로써의 차르의 지배력을 러시아 제국에 정착시켜려 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도 타타르의 멍에로 일컫어지는 몽골의 잔존 세력인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각각 1552년, 1556년에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진출해나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서유럽, 특히 영국과 교역 루트를 여는등 대외적인 외교활동도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전반기의 이반 4세의 정치는 권력을 제한 당한 보야르들을 제외한 대다수 러시아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며 러시아는 크게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반 4세의 영토 확장

 

하지만 서쪽으로의 발판 마련에 대한 야심도 있었던 이반 4세의 발트해 연안의 리보니아 침공(1558년)은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개입하여 진흙탕 같은 장기전이 되어버렸으며 거의 가용한 대부분의 군사력이 이 전쟁에 투입되다보니 힘의 공백이 발생한 틈을 타 남부의 크림한국과 잔존 타타르 세력들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리보니아 침공은 이반 4세가 초기 보야르들을 누르기 위해 상설한 선출회의의 구성원들 조차도 반대했던 일로 전쟁중 역병과 기근까지 겹치자 국내의 여론은 이반 4세로 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후 시작된 광기

 

여러가지 압력을 받고 있던 이반 4세의 자제심의 끈이 끊어져 버린것은 바로 그가 너무나도 사랑하던 아내,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나스타샤의 죽음 앞에 이반 4세는 거의 반쯤 실성한 모습을 보였으며 "반역자 놈들이 내 아내를 독살했다"고 소리지르곤 했다고 합니다.

 

황후의 죽음 이후 이복형인 블라디미르와 그 친지들, 선출회의의 멤버이자 측근이었던 아다세프와 실베스트르를 숙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보야르든 자신의 측근이든 거슬리는 것들은 모조리 숙청하거나 없애 버리는 이반 뇌제의 공포 정치가 시작 되었습니다.

 

1563년에는 후세에 러시아(소비에트)의 지도자로써 이반 4에 못지 않은 피의 통치를 펼친 스탈린도 본 받아서 실행했던 일을 단행합니다. 바로 보야르들이 정권을 위협하여 국가를 다스릴수가 없다는 비난을 하며 모스크바를 떠나 은거해 버린것 입니다. 이는 모스크바에서 계급간의 대립을 부추겨 보야르들의 세력을 꺽으려는 모험적이만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한수였습니다. 결국 모스크바의 각 신분 세력의 여론에 떠밀린 보야르들이 차르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 사과함으로써 이반 4세의 은퇴 소동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반 4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재판없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할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며 '오프리치니나' 로 불리는 차르의 직할영지 체제 구축에 착수하게 됩니다.

 

공포 정치

 

오프리치니나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창설된 오프리치니키 라는 군사조직은 검은 옷에 검을 말을 타고 다니며 차르인 이반 4세에 명령에만 절대 복종하면서 러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모반자 처형에서 잔혹함을 과시해 이반 4세의 눈에 든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오프리치니키의 우두머리가 되어 앞장서서 모반자를 색출하고 차르에 불만을 가진자들을 끓는 물에 삶거나 고문하고 기둥에 묶어 불위에서 통닭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구워 죽이는등 상상할수 있는 모든 잔혹한 처형쇼를 벌임으로써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1570년에는 노보고르트를 공격해서 1,500명의 보야르들과 셀 수없이 많은 노보고르트 시민들을 학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후에 스탈린도 그대로 배워서 행합니다. 후세의 피의 통치자인 스탈린 역시 그의 철권 통치하에 NKVD(국가인민위원회) 와 베리야라는 이반 4세의 오프리치니키와 말류타 스쿠라토프에 그대로 대응되어 보이는 수단과 심복이 있었던걸 보면 스탈린은 어쩌면 이반 4세에게 심취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역사가 반복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1572년에는 이만하면 자신의 절대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었다고 생각한 이반 4세는 오프치니키를 해산 합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의 토지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차르의 직할령이 되었으며 반대자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숙청한다는 공포정치의 근간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었습니다.

 

비극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폭력적인 광증을 차르의 절대권 강화에 이용하기 위해 고도로 계산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기도 합니다. 만약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 이었다면 그의 절대권 강화를 위한 정책들이 절대로 당대에 수립될수 없었으며 아마도 정권을 유지할수도 없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은거와 같은 고도의 정치적 수법은 미친 사람이라면 실행하기 어려운 수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수은이 건강에 좋다는 잘못된 의학지식으로 생긴 수은 중독 증세(발굴된 시신에서도 수은 중독 증세가 발견됨)가 있었고 어린 시절의 학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난폭함을 드러내는 경우와 아나스타샤 황후 사후의 우울증은 그에게 분노조절 장애와 광기를 가져다 주었던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에 다룰 비극 때문 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사실 명확하지 않으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1581년 어느날 이반 4세는 며느리인 황태자비의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다며 그녀를 지팡이로 때렸다고 합니다. 이 충격으로 임신중이었던 황태자비는 결국 나중에 유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폭행 소식을 듣고 경악한 황태자가 이반 4세의 방에 뛰어들어오자 격한 다툼이 있었고 광기에 이성을 잃은 이반 4세의 지팡이는 황태자의 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쳤다고 합니다. 결국 달려온 신하들은 피투성이가 된 황태자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고 있는 실성한듯한 차르를 보게되었습니다. 순간적인 분노와 광기로 가장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아들을 그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만것이었습니다.

 

포스팅 앞부분에 첨부한 일리야 레핀작의 "이반4세 아들을 죽이다" 라는 그림은 그 상황을 잘 묘사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촛점 잃고 망연자실한 이반4세의 눈동자와 마치 피가 흘러나오는 아들의 이마를 부여잡고 지혈하려고 애쓴 듯한 그의 손이 이 비극을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 모르는 공포와 잔혹함으로 후반기를 통치했던 이반 4세도 자신의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많은 회한을 느꼈을까요?

 

황태자 바실리는 이반 4세의 기대를 받던 후계자 였기에 그 슬픔이 더 컸을듯 합니다. 만년을 고독 속에서 보낸 3년 후 1584년 이반 뇌제는 뇌일혈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제위는 병약한 다른 아들인 표트로 2세 에게로 이어졌는데 그 역시 1598년 후사 없이 숨을 거두어 러시아 류리크 왕조는 이로써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혼란과 암흑속에 빠지게 됩니다.


요즘 부산에도 출장을 다녀오고 조금 바쁜 한주간을 보내다 보니 블로그 글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다음 왕 이야기에서는 몇몇 분이 예전에 요청주신 "정조" 에 대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전 글

이반 뇌제, 명군과 폭군 사이의 엇갈릿 시각 -1-

  • 빈티지 매니아 2014.11.02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속편이 안 올라와서요 궁금해서 독일 위키피디아 찾아 보았더랬습니다 ㅎ
    역사에 두가지 길이 없듯이 만약 아나스타샤가 일찍 죽지 않았더래면 어찌 되었을까 ...
    그로즈니란 말이 붙지 않을수도 있겠다 싶데요
    그런데 옛날에도 두마라고 명칭했네요

    • 배우자가 미치는 영향이 참 큰것 같습니다 항상 내편이 있는것과 주변에 믿을수 없는 사람들 뿐이라는 생각이면 누구라도 잔혹해지나 봅니다

    • 알러브잇 2014.12.08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 박정희대통령도...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본인의 많은 업적들이 퇴색되어가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가...거의 정확히 육영수여사 서거 후부터였다고 합니다...두분 생전에 박대통령이 육여사를 가르켜 청와대내의 가장 강력한 제1야당이라고 농담했었다죠..그만큼 육여사가 박대통령에게 쓴소리도 해가며 중심을 잘 잡아주었었단 반증.

  • 오... 지후대디님의 지적 호기심은 어디까지인지...
    제가 너무도 모르는 분야라 관심있게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수은중독이 광기를 불러오나봐요. 베토벤도 그렇고 ㅠㅠ..카르바조인가 그 광기의 화가도 수은중독이었다는데..화가들은 그림 그리는 재료로 인해 그렇다고 해요 ㅠㅠ..비극적인 그림, 가슴 아프네요. 아들을 죽인 아버지들 ㅠㅠ

Inst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