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비극의 시작. 폐비 윤씨 -3(完)-

2017.02.27 00:00 Story of Kings & History

드디어 유교적 이상향 군주라 칭송 받고 신하들에게 사랑받았던, 그러나 후일 분란의 씨앗을 남긴 성종에 대한 마지막 글 입니다.


유교적으로 이상적이었던 군주 성종, 그는 간관들의 다소 불손한 언행들 마저 받아 넘길정도로 너그러움을 보인 왕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교질서 안에서의 사대부에 대한 너그러움에 그쳤습니다. 실제로 그의 치세에 사대부들에 대한 유배는 있었지만 목숨까지 앗는 사사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잘못을 적당히 넘어가려 한 사례들이 보입니다.


이런점은 똑같이 유학에 통달한 군주지만 여성과 노비에 대해서도 궁휼한 마음을 가졌던 세종대왕과는 달리 성종의 경우 유교적 질서를 벗어나는 여성의 투기나 재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한 부분이 드러난 일들은 재가한 과부의 자식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제재와 투기의 죄를 범한 폐비 윤씨에 대한 냉혹한 사사에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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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윤씨가 묻힌 서삼릉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410298&cid=47322&categoryId=47322


드라마 "왕과 나"의 폐비 윤씨 사사 장면


성종 10년 6월 2일(1479년) 성종은 갑자기 정승들을 불러 이른 아침에 입궐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영의정 정창손, 우의정 윤필상 및 상당 부원군 한명회, 청송 부원권 심회 등을 만나 중전 윤씨를 폐하는 일을 논합니다.


"궁곤(宮壼)337) 의 일을 여러 경(卿)들에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이 매우 중대(重大)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 입직(入直)한 승지(承旨)와 더불어 이를 의논하고자 하였으나, 생각하니 대사(大事)를 두 승지와 결단할 수 없으므로 이에 경들에게 의논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선경 삼일(先庚三日) 후경 삼일(後庚三日)338) ’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고 함이겠는가? 부득이하여서 그러는 것이다.

지금 중궁(中宮)의 소위(所爲)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예전에 중궁의 실덕(失德)이 심히 커서 일찍이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경들이 모두 다 불가(不可)하다고 말하였고,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혹은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비록 내가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소치(所致)이지마는, 국가(國家)의 대계(大計)를 위해서 어찌 중궁에 처(處)하게 하여 종묘(宗廟)를 받드는 중임(重任)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후궁(後宮)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그릇되게 이러한 거조(擧措)를 한다고 하면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이 소소(昭昭)하게 위에서 질정(質正)해 줄 것이다. 옛날에 한(漢)나라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인종(仁宗)이 모두 다 왕후(王后)를 폐하였는데, 광무제는 한 가지 일의 실수를 분하게 여겼고, 인종도 작은 허물로 인했던 것이지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중궁의 실덕(失德)이 한 가지가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았다가 뒷날 큰 일이 있다고 하면 서제(噬臍)339) 를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예법(禮法)에 칠거지악(七去之惡)340) 이 있으나, 중궁의 경우는 ‘자식이 없으면 버린다.[無子去]’는 것은 아니다."

하고, 드디어 ‘말이 많으면 버린다[多言去], 순종하지 아니하면 버린다[不順去], 질투를 하면 버린다[妬去]’라는 말을 외우고, 이어 이르기를,

"이제 마땅히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겠는데,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2일 정해 1번째기사-


즉 성종이 후궁의 방에 있는데 중궁이 투기하여 갑자기 들이닥쳐 칠거지악을 범해 폐서인 하겠다고 의견을 물은 것입니다.

이예 신하들이 강봉하여 후궁으로 내리는 방안 별전에 안치하여 반성하게 하는 방안등, 대비에게 아뢰어 처결을 듣자는 안 등을 이야기 했지만 성종의 의지는 강해서 출궁시켜 폐서인 하겠다는 강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흔히 드라마 등에서 많이 다루는 성종과의 다툼 중에 손톱으로 용안에 상처를 낸 일은 야사의 기록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결국 성종의 적자인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는 이일을 계기로 폐서인 되어 궁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윤씨가 폐비(廢妃)된 이후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원자의 생모이자 조강지처가 되는 윤씨를 다시 왕비(王妃)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가 끈임없이 반복되었으며, 많은 조정대신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면에서 참을성 있고 너그러운 모습을 많이 보인 성종도 폐비 윤씨에 대해서는 무척 냉랭한 모습을 보입니다.

윤씨가 내쳐진 그해 10월에 폐비윤씨의 집에 도둑이 들어서 윤씨의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발생했는데, 대신들은 이웃주민들을 수사하고 폐비윤씨의 집 담장을 높이 쌓자고 건의 하였으나 성종의 대답은 냉소적이어서 자신이 방비하지 않아서 도둑을 맞은것 뿐이고 그것 때문에 죄없는 이웃을 괴롭혀서야 되겠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도둑맞았다고 담을 쌓아주자고 하면 도성안의 도둑맞은 집은 다 국가에서 담을 쌓아주어햐 하느냐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말이긴 하지만 한때 국모였던 원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폐비 윤씨에 대한 일임을 생각하면 폐비 윤씨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 못하는 성종의 냉랭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에피소드 입니다.

그러나 원자가 있는 한, 궁궐 밖으로 내쳐진  폐비 윤씨의 존재는 차츰 성종뿐 아니라 대비들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연산군이 성장해 어미의 존재를 알 경우,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폐비 윤씨의 보복이 두렵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윤씨가 폐비된 지 3년 뒤 결국 성종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동의를 얻어 사약을 내렸습니다.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725) 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跋扈)726) 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중략-

"어떤 약(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礵)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임자 1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결국 폐비 윤씨는 폐비된 지 3년만인 1482년 8월 29일(음력 8월 16일)에 사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실록에서는 폐비 윤씨의 죄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폐비 윤씨의 사사는 폐비 윤씨를 몰아내는데 관여하였던 왕실과 조정의 인사들이 경우 후일 연산군이 원자로서 왕위에 오를경우 복위할지도 모르는 윤씨에 후환을 두려워한 부분이 컸다고 생각 됩니다.


폐비 윤씨의 사사는 많은 드라마에서 드라마틱하게 묘사되는데 특히 야사에 있는 폐비 윤씨가 사사시에 피를 토한 적삼을 연산군에게 전해한을 풀어 달라고 한 "금삼의 피" 와 같은 부분은 1936년대 동명의 소설(박종화 작)로 인해서 더 유명해지고 이후의 드라마에서도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됩니다.


매일신보1936.3.20-12.29(234회 완) -박종화 작-


앞서의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성종이 정말 후일을 걱정했다면 원자인 연산군에 대한 대책을 더 고심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한 적당주의로 그 사실을 아직 어린 원자가 모르기만 하면 될것이라 생각힌것 같습니다. 이러한 미온적인 대처에 의해 결국 아들인 연산군에 의해 1504년에 갑자사화라는 무시무시한 피바람을 불러오게 됩니다.


최근의 조금 다른 해석은 군신들과 스승과 제자 사이었던 성종, 신하들에게 사랑받았던 성종, 호색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 신하들에게 억눌린 삶을 살았던 성종,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연산군이 왕권 강화의 시도의 일환으로 갑자사화를 이용했다는 것으로 보는 시선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갑자사화 이전의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사초에 세조가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한 글을 남겼다는 주장으로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실각하여 화를 입은 일)부터 이어진 갑자사화, 이 2건의 사화 이후 연산군의 왕권은 강화되고 신권이 힘을 잃었기 때문 입니다. 다만 그렇게 얻은 강화한 왕권을 막상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몰랐던것 같습니다.


더이상 두려워 누구도 간하지 않는 조정에서 옥죄인 삶의 고삐에서 풀려난 듯 연산군은 강화된 왕권을 사냥, 연회, 음행, 금표난발, 민가철거 등의 자의적인 욕구를 만족하기 위한 행위와 혼동하여 행사 하면서 결국 중종반정의 명분을 마련해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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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랜만에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주제의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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